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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Apr 20. 2019

우리는 왜 콜센터에 전화 걸 때 예민한가?

  집에서 쓰는 AI 블루투스 스피커가 고장이 났다. 엄마가 매일 찾는 것이라서 빨리 고쳐야 한다는 마음에, 바쁜 업무 시간을 쪼개어 서비스센터에 전화를 걸려해도 도저히 시간이 나지를 않는다.   결국 점심시간에 잠시 짬을 내어 겨우 전화를 걸었다. 급한 내 마음 아랑곳없는 자동응답기의 느  음성 여러 단계참고 들어주며 마지막 단계에 도달할 때쯤, "지금은 점심시간이오니 잠시 후 걸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멘트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내가 점심시간에 걸었으니, 그쪽도 점심시간인 것은 당연 것인데도 나는 허탈함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나의 소중한 점심시간의 일부를 허공에 날린데 대한 울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1시간 기다 다시 처음 똑같이 단계를 밟아 또다시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다. 이건 마치 스무고개 놀이를 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번의 기회 끝에 겨우 듣게 된 기계음이 아닌 사람의 반가운 목소리가 내게 해 준 말은  '그 업무는 본사 서비스센터가 아닌 다른 곳에서 대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의 황당함에는 관심이 없는 듯 평온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새로운 전화번호 하나를 툭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아니 이럴 수가!  나는 또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 무슨 미로 게임도 아니고 자꾸 어갔다 막히고 처음으로 돌아는 이 상황은 뭔가?  살짝 약이 오른다.  '내가 오늘 열일을 제쳐놓고라도 이 일을 해결리라.'  일단 큰 심호흡 한 번으로 열을 식히고 다시  새로운 번호로 연락을 취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스무고개 놀이 같은 알쏠달쏭한 메뉴 목록 중 하나를 선택하는 정을 거쳤지만 이젠 것도 계속하니 아주 능숙해진 느낌이 든다. 그렇게 마지막 단계에 다다르자  연결음이 들리는 것이다.

"귀하고 소중한 우리의 딸이 상담해 드릴 예정입니다."

살짝 열을 받은 상태의 나는 이 연결음에 격앙된 내 마음내려놓기로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동안 상담원들을 함부로 대했으면 이런 멘트가 나오게 되었을까 싶은 생각이 스치면서.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콜센터에 전화를 하는 순간부터 물건의 고장이나 서비스의 불만으로 머리 온도가 10~30℃쯤 올라간다. 특히 사용하던 물건의 고장이 반복적이거나 새 물건이라면 그 짜증 지수는 2배로 올라갈 것이다.
  또 전화를 걸면 통화 중이라 한참을 반복되는 기계이나 단조로운 음악을 들어가며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렇게 기다린 끝에 통화 신호음이 가더라도 아직 여러 단계를 거치는 통과의례가 기다린다. 그 과정을 놓치지 않고 열심히 따라가는데 정신 에너지를 쓰다 보면 예민 지수가 10~20℃ 더 상승할 수도 있다. 그렇게 겨우 듣게 된 상담원의 목소리가 반가운 것도 잠시, 상담 내용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하거나 기대와 다를 경우 앞서 상승한 예민 지수에 기름이 부어진다.  그리고 얼굴을 못 보는 상태에서  목소리만으로 상대에게 이 답답한 상황을 전달하는 과정에 말을 버벅거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감정과 표현의 한계가 인내심의 한계로 치환된다. 그렇게 나의 예민 지수가 100℃에 도달하게 된다면 소위 내 머리 뚜껑이 열리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그러면 전화 건 사람의 머리 온도를 높이는데 1℃도 기여하지 않은 우리의 '딸'같은 상담원이 그 뜨거운  물바가지를 맞게 되기도 하고 평범하고 싶었던 고객은 진상 고객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기도 한다.(물론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가 없는 진짜 진상고객은 논외로 한다.) 정작 기업은 그러한 상황을 방조하는지도 모른다.  무례한 고객에게 적절한 매뉴얼로 응대하는 방법을 상담원에게 숙지시키 사안에 따라 책임 있는 자리의 직원 상담으로 연결해 주기보다 기본 메뉴얼만 읊조리 상담원이 무조건 참고 순종적 응대를 하게 하면서 자신들의 서비스나 피드백 부재의 그늘을 가리는 것이다. 예를 들면, 회사 이익을 추구할 때는 고객에게 적극적으로 온갖 친절과 편의를 제공해 주 고객 현혹기 좋은 조건을 말하면서 정작 중요한 약정이나 에 대해서는 대략 얼버무린다. 나중에 고객이 그 계약을 해지하고자 할 때는 가입 시와 달리 복잡한 과정 거치게 하며 그 감함 상담원 깍듯한 친절함을 무기로 막는다. 그렇게 가입 초기 슬쩍 언급한 잡한 규정을 다 말한 것으로 퉁치 처음 가입할 때 안내 약정라며 고객의 무신경함을 탓하며 불한 상황을 만든다. 이에 대해 고객은 상담원 답답한 응대와 과도한 친절에 두 손을 들고 아무 잘못 없는 그들과 입씨름하는 진상고객이 되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규정을 숙지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전화기를 끊다.


  오늘은 사용자인 나(정확히 말하면 나의 엄마)의 실수가 분명한 일로 고장이 났고 내일 기사가 방문하여 해결해 준다니 감사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그래서 거는 동안 내가 겪은 시간적 손해와 그 과정의 삐걱거림은 눈 녹 듯 사라졌다.


   사실 나일종의 상담원이다. 그들과 유사한 정신노동에 시달리는.   이유는 매일 개성 넘치는 아이들의 민원 상담이 항상 폭주기 때문이다.

 " 선생님, 철수가 저를 밀었어요."

 " 아니에요. 영희가 먼저 저를 놀렸어요."

 " 아냐. 네가 먼저 밀었잖아."

 " 안 밀었어."

 이야기는 항상 꼬리에 꼬리를 물어 어디가 머리이고 어디가 꼬리인지 아는 것보다 뫼비우스의 띠의 안과 겉을 밝히는 게 더 쉬울 지경이다.  민원의 반은 잘잘못을 따져 판결을 내고, 나머지는 화해와 타협이라는 조정 결정을 내린다. 그들 중 일부는 나의 판결을 받아들이고 일부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그들도 나에게는 소중한 고객이면서, 동시에 일부는 진상 고객님이다.  나는 그들의 민원을 들으며 상담원의 고충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상고객을 만나면 나 또한 나만의 꼬여버린 매뉴얼을 반복하며 인내하다 결국 버벅다.


  이번 주는 학부모 상담 주간이었다. 십여 명의 학부모가 상담 신청을 했고 그중에 방문 상담이 반을 넘다.  일주일 오후 내내 이들의 방문을 받고, 중간중간 전화 상담을 하면서 정신적으로 녹초가 되었다. 학부모를 만나는 일은 언제나 조심스럽다.  개구쟁이 녀석들의 부모님께는 조심스럽게 아이의 문제를 말씀드린다. 그러면 부모님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나에게 도로 묻거나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 나를 당황스럽게 하기도 한다.  전문가인 듯 비전문가인 나는 내 나름의 경험을 총동원하여 해결책을 이야기해 본다. 부모님은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서 나 또한 죄송한 마음으로 바라본다.  얌전한 아이들의 부모님이 오시면 표현하지 않는 아이들의 속내를 나 또한 정확히 몰라 딱히 기초에 드릴 말이 많이 없어 그것이 학생을 제대로 이해 못한 교사의 무심함으로 보일까 또 전전긍긍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방법을 찾아본다. '타고난 본성이 숫기가 없는 것이니 그것을 바꾸려 하기보다 연스럽게 받아주되, 천히 자신을 표현할 기회를 만들어 주자'는 말이 되는 듯 안 되는 이야기로  그들이 시간 내어 찾아온 것이 아깝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본다. 다양한 요구를 가진 학부모께 아이들의 이야기를 세심하고 전문적으로 상담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그게 잘 되지 않을 때 나는 정신적 피로감이 밀려온다.


 가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버거울 때가 있다.  나의 진로 적성이 사회형이 아닌 탐구형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나는 사실 교사라는 직업이 맞지 않는 사람이 아닌가 우울하기도 했다.   가끔 사람을 상대하는 부담감이 싫어 사람과 관련 없는 일을 하면 더 잘할 수 있겠다는 의미 없는 생각도 해본다.  부끄럽게도 학창 시절 나는 적성보다 나의 상황에 따라 직업을 선택했다.  그 시절에는 진로와 적성에 대한 탐색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이다. 그래도 매일 아침 조그만 손으로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하는 고객님들의 미소와 "우리 아이가 선생님은 정말 천사 같대요."라는  학부모립서비스에 힘을 내 본다. 나를 비롯한 모든 상담원들 그리고 저의 고객님들 모두 행복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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