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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Oct 19. 2018

공부 방법의 자율성

 오늘도 부자의 대화는 2시간을 넘어가고 있다. 지독한 것들. 내가 필요한 대화만 하는 편이라면 이 둘은 정말 대화를 좋아한다. 언제부턴가 아들은 건성으로 대답하는 나를 빼고 아빠하고만 이야기하게 되었다. (덕분에 편해진 나는 섭섭한 마음이 40%라면, 고마운 마음이 60% 인건 안 비밀!)


 오늘의 끝장토론 주제는 reward 뒤에 about이 와도 되느냐, for만 올 수 있는가이다. 아들은 이번 중간고사 영어 시험에서 reward가 들어가는 영작에 about을 사용했는데, 남편은 about은 올 수 없다고 했다. 인터넷을 찾아보던 아들은  about이 들어가는 경우가 없다는 사실에 좌절하면서도 문맥 상 쓸 수도 있지 않느냐고 우기는 중이었다. 남편은 영어권 사람들의 언어 습관이라고 말해 보기도 하고, 뉘앙스가 다르다고도 이야기하고,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그렇게 안 쓴다는데 어쩌겠느냐로 이야기를 끝내려 했다. 하지만 이 둘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계속 이 논제로 돌고 돌더니만 남편은 뫼비우스의 띠를 빠져나갈 묘안인 듯 느닷없이 아들의 공부 방법을 점검하겠다고 나섰다. 그 첫 일성은 이랬다.

 " 너 이때까지 모의고사 친 것 오답노트 작성하고 있냐?"

 " 할 거예요."

 " 너 하는 거 본 적 없는데, 언제 할 건데."

 " 시간 되면 할 거예요."

 " 이때까지 한 적 없잖아?"

 "한 적 있어요. 1학년 때."

 "그때그때 해야지, 이번 중간고사 친 거 오답 노트해라."

 " 오늘은 도저히 못 하겠어. 시험 끝난 지 사흘밖에 안되었는데, 좀 쉬어야지."

 " 그럼 내가 해 줄게. 이때까지의 시험지 다 가져와."

 " 내가 알아서 할게. 그냥 놔둬."

  아이의 말에도 남편은 아이 방에서 그동안의 모의고사 시험지를 가져와 틀린 문제들을 가위로 잘라 공책에 붙이기 시작했다.

 " 내 공부는 내가 알아서 할 거라고. 이렇게 해 주는 거 싫어."

 " 난 정리만 해 줄게. 푸는 건 네가 하고 싶을 때 알아서 해."

하지만 아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항상 능글맞은 미소를 품고 있던 평소의 얼굴이 아니었다.

 나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진화에 나섰다.

 " 00아, 새 문제집을 사서 아는 유형의 문제를 반복해서 푸는 건 효율적이지 못해.  틀린 유형의 문제를 다시 풀어보고 확실히 하는 게 더 중요해."

 " 알겠어. 그것도 내가 알아서 할게. 나는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는 정말 하기 싫어. 다 만들어 준 걸 풀기만 하는 건  기분이 안 좋아. 그리고 1, 2학년 문제들은 수능 범위보다 좁아서 별 도움이 안돼. 3학년 모의고사 문제들만 오답 노트해도 된다니까."

 남편은 그제사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목소리에 힘을 빼고 말했다.

 " 알았어. 그럼 이건 그냥 기념으로 내가 들고 있을게. 내가 심심할 때 풀던가."

 " 말도 안 돼. 괜히 시간 낭비한 거잖아."

 둘의 대화는 그렇게 12시를 넘기고 있었고, 나는 듣는 것도 힘겨워져서 이불을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그냥 오늘 너희 둘이 여기서 자라. 나는 00이 침대에서 잘 테니."


 무슨 일이든 자율성이 중요하지만 공부는 정말 자율성이 중요하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잔소리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를 잘하는 아이가 우리 아이였으면 싶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너무 공부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 공부를 싫어하게 될 것이 걱정되어 아이가 스스로 공부에 흥미를 갖게 하기 위한 장치들로 은근한 공부 공세를 펼쳤다.  즉, 다양한 책을 사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거나 책을 많이 읽어 준다거나 책을 항상 아이 주변에 흩트려 놓고 자연스럽게 열어 보게 한다거나 하였다. 또 아이는 어릴 때 유독 달력과 같은 것에 있는 숫자에 흥미를 보였는데 나는 그걸 은연중에 학습능력과 연결시키고자 달력을 아이 가까이에 놓아 두고 칭찬과 사고에 도움이 될 만한 여러 질문들을 던졌다.

 " 00는 숫자 박사구나. 이번 주 수요일이 12이면 다음 달에 12일은 무슨 요일이지? "

아이는 다행히 즐겁게 따라왔고 나는 우리 아이가 영재인 것 같다는 착각을 잠시 하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사교육은 시키지 않았고, 그렇게 해도 잘 따라가는 아이에 대해 은근 자부심을 가졌다. 지금은 시험이 없어졌지만, 그때는 2학년 때부터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전과목 다 쳤는데, 아이에게 시험공부를 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달콤한 말로 꼬드기는 방법을 쓰며 아이가 스스로 공부를 즐기며 하는 것이라 믿었다.

 " 우리 00은 이 문제를 다 풀 수 있을까? 정말 궁금하네?"

순진한 아이는 열심히 풀었고, 나는 그것이 자율적인 공부라고 생각했다.

사실 아이는 항상 시간이 나면 게임을 하듯이 국어, 수학 문제집을 몇 시간씩 풀고는 했다.

나는 아이에게 공부가 재미있냐고 물었고, 아이는 재미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초등학교 6학년까지는.

나는 학원을 보내지 않으니 아이가 공부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일반화의 오류를 그때까지 믿있고 뿌듯해했다.

 그런데 정말 딱 거기까지였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는 자신의 성적이 생각보다 잘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그리고 불평을 하기 시작했다.

 " 공부 재미없어. 공부 안 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 초등학교 때 괜히 열심히 공부했어. 실컷 놀걸. 어차피 중학교 때부터 열심히 해도 되는데"

 아이는 초등학교 때 자신보다 공부를 잘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중학교 와서는 자신보다 잘 하거나 비슷하다는 사실에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무서운 중2병이.

 아들의 중2병은 조용하고 강력하게 왔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모습으로.

아들은 시험기간에도 하루 종일 소파에 누워서 휴대폰이나 컴퓨터 게임을 했다. 내가 소리치고 울고, 심지어 처음으로 때렸다. 그러면 아들은 그저 나지막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 미안해. 못난 아들이어서. 나도 내가 정말 싫어.  세상도 싫어."

나는 깨달았다. 이 시기를 이겨내는 것은 묵묵히 기다려 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하지만, 난 스스로에게 수없이 기다리자고 맹세하고도 일주일을 못 참고 다시 아이와 씨름을 벌였다. '제발 정신 차려라고. 차라리 반항하고 화를 내라고.'

 아들은 그저 죄인인양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역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2학년 딱 1년 동안.

그리고 받아 든 2학년 성적표는 본인에게도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렇게 3학년에 올라가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2학년 때와 같은 무기력함은 사라졌지만, 공부는 여전히 힘겨운 것이었다. 그저 해야 하는 일이니 꾹꾹 참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적은 조금씩 돌아왔지만, 크게 오르지는 않았다.


 그런 아이가 달라진 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이다. 아이는 고등학교 1학년을 시작하자마자 큰 결심을 한 듯 살인적인 학원 스케줄을 소화하며 노력했다. 자신도 잘 하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으므로. 하지만 즐겁지는 않았다. 항상 어깨를 늘어뜨리고 그저 고통을 견디고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와서 1시 넘어까지 학원 숙제와 학교 숙제를 해야 했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한계점에 다다른 듯 더 이상 오르지는 않았다. 아이도 나도 초조해졌다. 딱 여기까지가 이 아이의 능력인 건가 싶었다.

결국 2학년 올라가면서 모든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시간의 여유와 마음의 여유를 찾았고, 그 여유 시간을 이용하여 그날의 교과 수업 복습을 그날 야간자습 시간에 하고, 주말에는 인터넷 강의와 수학 문제집 풀기 중심으로 해 나갔다. 모르는 문제들은 인터넷 강의에 질문을 올리고 답을 듣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그리고 성적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확실히 안정적으로 올랐다. 그리고 이제 아들의 표정에 여유가 묻어나고, 지금의 시간이 너무 좋다고 말한다.  공부가 막 즐겁지는 않지만 힘들지도 않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즐기는 모습도 보이면서 나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나는 아이에게 공부를 많이 시키는 극성 엄마는 되기 싫으면서, 아이가 스스로 공부를 잘하게 만들겠다는 열성은 넘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으로 아이를 대하였다.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열심히 해왔던 자신의 실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에 공부와 자신에게 실망하고는 무기력을 동반한 심리적 고통을 겪지 않았나 한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아이가 스스로에 대한 혐오에 갇히지 않도록 나는 가식적인 잣대로 아이를 대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공부는 힘든 것이다' 라고 솔직하게 말하고 '그래도 참고해 보자' 라고 말해 버릴 것이다.

 

 이제 아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공부 방법과 공부 속도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모가 오답노트를 만들어서 풀어라고 건네주는 것과 같은 공부 방법이나 어디선가 알아온 방법을 알려주고 따르게 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의 자율성과 공부 의욕을 떨어뜨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 만들어 버리고 아이의 사고는  경직되어버린다. 이러한 나의 경험 이야기도 내 아이에게만 적용될 뿐, 어느 아이에게도 들어맞지 않을 수 있다. 모든 아이의 경험과 능력, 취향이 다르므로 나만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스스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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