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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구하는 실천가 Oct 26. 2018

사위와 며느리의 자리는?

 얼마 전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지인들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그날은 어떤 병원 앞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는데, 그 이유는 지인 중 한 명의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딸인 그녀가 병간호를 하기 위해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녀의 수고를 위로하며 여러 말들을 건네었다. 그녀는 나를 비롯한 다른 한 명을 가리키며 "너희나 나는 딸이 없어 이제 늙으면 큰일이다. 어떡하니?"라고 말했다.  또  " 좀 전에 올케가 왔는데 앉지도 않고 잠시 서 있다 갔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그럼, 사위는요?" 그러자, 그녀는 "에휴, 사위는 뭐 그렇지. "라고 말을 얼버무렸다.


 나는 주변에 편찮은 부모님을 돌보는 여자분들로부터 항상 이런 말을 듣는다.

"너는 딸이 없어 어떡하니."

그럼,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할 수 없죠. 늙으면 요양원 가야죠."라고 농담인 듯 웃으며 말한다.

사실 아직 현실로 와 닿지 않아서 딸이 없는 것이 그렇게 슬픈 일인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주위를 둘러보면 딸이 얼마나 늙은 부모에게 큰 힘이 되는지는 금방 알 수 있다.

나부터도 치매를 앓으시는 친정엄마를 내가 모시고 있고, 정작 남동생은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있으니까.


 나의 시아버지는 참 좋으신 분이셨다. 나이만 많고 철없는 내가 결혼해서 남편과 시아버지, 이렇게 셋이 25평 임대아파트에 살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나를 대단하게 또는 안쓰럽게 생각했다. 심지어, 남편은 결혼하고 3개월 후 10개월짜리 미국 어학연수를 떠나버려 나는 임신한 몸으로 시아버지와 둘이 살았다.  하지만 나는 2년 뒤 시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시아버지를 위해 밥을 차린 적이 손에 꼽을 정도로 불량며느리였다. 내 몸 하나도 건사하지 못해 아침을 굶고 나가기 일쑤였고, 그런  나를 붙잡고 이거라도 먹고 가라며 토마토를 갈아서 주셨분일 만큼 시아버지는 인자하셨다.  결혼 2년 만에 시아버지는 암 판정을 받으시고 하루하루 상황이 나빠져 갈 때, 사녀일남의 남편과 시누이는 돌아가며 병간호 순서를 만들었는데, 나는 어린 아기가 있었고 직장을 다녔기 때문에 주말 오전을 맡게 되었다. 나는 그 몇 시간도 수시로 환각과 환청을 겪으시는 아버님 모습이 무서워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그렇게 잘 해주셨음에도 나는 못난 며느리였다.)  하지만 시누이들은 평일 저녁 간호를 하지 않는 나에 대해 불만을 표현했고, 남편은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폭발했다. "그러는 사위들은 왜 들여다보지도 않는데?"  그 순간 내가 가장 좋아했던 둘째 시누이는 전화기 밖으로 소리가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 사위와 며느리가 같나!"

 전화기 밖으로 들리는 그 소리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말이 내 귀에 쟁쟁하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의문이 들었다. 왜 사위는 괜찮고 며느리는 안 되는 걸까? 정말 시아버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사위들은 거의 찾아오지 않았고 찾아왔을 도 손님처럼 잠시 들렀다 갈 뿐이었다. 돌아가시는 임종 때도 딸들과 아들, 그리고 며느리인 나만이 자리를 지켰다.


 도대체 며느리의 자리는 딸과 아들 그 사이 어디쯤이고, 사위의 자리는 가족과 지인 그 사이 어디쯤인걸까?  며느리와 사위의 자리가 어디쯤이면 며느리도, 아들도, 딸도 행복할 수 있을까?  없는 나의 노후는 걱정되고, 딸 있는 누군가의 노후는 든든한 것은 아들의 잘못인가? 며느리의 잘못인가?  아니면,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 것일까?  


 누구나 늙으면 병들고 죽는다는 점에서 세상은 슬프지만 공평하다.  늙으면 여러가지 어려움이 몸과 마음을 괴롭히지만, 무엇보다 큰 것은 내 마음을 알아주고 기댈 수 있는 가족과 애착관계가 무너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나마 그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딸의 존재가 크게 다가오는 것은 당연하다. 그 역할을 며느리가 하는 것은 딸의 고생과 비견할 수 없을 만큼 힘들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아들의 몫이다.

나는 기억한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덤덤해 보였던 남편이 어느 날 찡그린 얼굴로 불쑥 꺼낸 말을.

" 결혼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아버지 방에 거의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 마음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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