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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품여자 May 13. 2021

2. 몰타 적응기(2)

2-3. 여유와 외로움

오늘은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라 조식을 먹은 후 주변 산책을 나가기로 했다. 나가기 전, 쌀을 불려놓기 위해 주방에 내려가 적절한 냄비를 찾아왔다. 사실 난 요리엔 취미도 지식도 없는터라 냄비밥 하는 법을 엄마에게 여쭤봐야 했다. 엄마는 어차피 시집가면 다 하게 될 집안일이라며 굳이 내게 시키지도 않으셨다. 음식 솜씨 좋으신 엄마 덕분에 입맛만 고급이 되어갔을 뿐이다. 국이라도 끓일까 했는데 너무 복잡해 보여서 포기하고 일단 밥이라도 해놓자 싶었다.


어제 산 청포도와 주스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꽤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햇빛이 있는 곳은 괜찮았지만 그늘은 꽤 춥다.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옷을 여러 개 걸쳐 입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 선글라스를 꼈다.(이게 멋이 아니라 햇빛은 정말 뜨거워 필수였다.) 천천히 해안가를 따라 걸었다.



짙은 파랑의 바다가 날 반기는 것 같다. 나는 바다가 너무 좋다. 바다 내음도 색깔도 소리도... 모두 모두 좋아한다. 한국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가끔 바다에 가서 숨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오면 기분이 좋아졌다. 이곳 지중해 바다도 참 좋다. 특히 바다색이 청명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안에 기쁨과 설렘이 가득했다.


벤치에 앉아 가져온 청포도와 주스를 먹으며 바다와 함께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았다. 해안가를 따라 운동하는 사람, 관광객들, 낚시하는 사람들... 렇게 앉아 즐기는 여유로운 일상이 좋았다. 그러나 바람이 세게 불어 마냥 앉아있진 못하고 셀카를 찍으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리저리 구도를 잡고 잘 찍어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는데 운동복 차림의 젊은 여자가 내게 다가왔다.


"사진 찍어 줄까요?"

"네?"

"아까부터 보고 있었어요."

"아 그래요. 고마워요."


순간 거절할까 했지만(혹시 휴대폰을 훔쳐 갈까 싶어) 환한 미소를 보이며 호의를 보내는 그녀에게 난 휴대폰을 건넸다. 그녀는 센스 있게 사진 몇 장을 찍어주고 가던 길을 갔다.



시간이 지나니 유람선과 페리 영업이 시작되고, 관광객들은 더욱 모여들었다. 여러 상품들이 있었는데 길에 있는 몰타 지도를 보며 가고 싶은 곳들을 눈여겨보았다. 작은 섬이라고는 하나 내가 가고 싶은 곳들은 모두 버스로 1시간은 가야 했다. 그래서 학원 수업이 없는 주말에 가보기로 하고, 나머지 날들은 가까운 곳을 돌아보며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점심때가 되어 숙소로 돌아왔다. 미리 불려둔 쌀을 가지고 냄비밥을 했다. 생각보다 잘 되었다. 반찬은 한국에서 공수해간 장조림 캔, 고추장, 멸치. 엄마 김치도 싸주시려는 걸 극구 거부했었는데 오늘 유독 생각이 많이 났다.

타지에 나와있으니 고추장에 밥만 비벼도 맛있다. 오래간만에 먹은 한식이라 어찌나 반갑던지... 한 끼를 아주 잘 먹었다. 나머지 밥은 이따 또 데워먹어야지.


점심을 먹고 어딜 또 나갈까 하다 몸살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 방에서 쉬기로 했다. 몰타 이후 일정을 짜며 폭풍 검색과 함께 비행기 티켓과 숙소 예약을 했다. 사실 쓸 수 있는 예산과 일정이 한정적이라 발길 닿는 대로 하는 진짜 자유여행은 불가능했다. 어느 정도 계획을 세워 미리 비행기나 기차 티켓을 예매하거나 숙소를 예약하는 것이 비용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 이렇게 미리 계획해놓는 것이 내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근데 이렇게 하는 것 품이 많이 들었다. 미리 가고 싶은 곳이나 묵을 곳을 검색하고, 구체적인 길이나 대중교통도 알아봐야 하며 나라마다 다른 물가를 고려하여 예산도 짜야했다. 이럴 때 투어 가이드가 내 옆에 항상 같이 있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돈이 넘치도록 많아서 각 나라 교통의 요지에 있는 별 다섯 개짜리 호텔을 마음대로만 이용할 수 있어도 여행 계획 짜기가 훨씬 수월할 텐데... 괜히 한번 투덜거려본다. 그래도 내 평생 이런 경험을 언제 해 볼 수 있겠냐며 마음을 다잡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외로움이 혼자 있는 지금을 더 슬프게 했다. 이거 뭐야... 내내 괜찮다가 왜 이러는 거야... 나름 감수성이 풍부한 나는 여행 내내 가끔씩 터지는 이런 외로움들과 마주해야 했다. 한국에선 늘 곁에 있는 가족, 친구들 덕분에 몰랐던 감정. 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오롯이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이 이런 외로움과 겹쳐져 결혼을 결심하게 된 걸지도 모르겠다. 빨리 자야겠다. 슬픈 생각만 계속 드니까.






아침이 밝았다. 어제의 외로움은 또 다 날아간듯한 상쾌함. 조식 잘 먹고(이제 점점 토스트가 물린다.) 학원으로 향했다. 오늘 수업은 더 재미있었다. 선생님의 말도 좀 더 잘 들리는 것 같다. 전히 머릿속은 한번 해석해서 나가야 하는 수고로움으로 피곤했지만 조금씩 용감하게 말을 내뱉으려 노력했다. 계속해서 오후까지 이어지는 수업을 듣고 숙소로 왔다. 오늘 저녁은 어떻게 하지? 고민 고민하다 제 우연히 마주쳐서 카톡 아이디를 주고받았던 한국인 학생에게 연락해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저녁 메뉴는 비빔밥. 나를 포함해 4명이 모였다. 다들 20대 초반의 대학생이었다. 모두 서글서글한 인상에 친절하고 예뻤다. 갑자기 왕언니가 되어 버린 나는 조금 어색했지만 이내 평정심을 찾고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함께 저녁을 먹었다. 거웠다. 여러 가지 정보도 얻고, 오래간만에 수다다운 수다를 '한국어'로 하니 살 것 같았다. 가끔 밥친구를 하기로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일은 동생들이 알려준 대로 유심칩을 사러 가야겠다. 안 그래도 기숙사 와이파이가 너무 느려서 고민이 많았는데(한국 와이파이 만세!) 렴한 가격에 데이터를 쓸 수 있다고 하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그간 유심칩을 어디서 사서 어떻게 연결해야 하는지 몰라 손 놓고 있었다.)


'내일은 학원 다녀와서 뭐하지?'


이때까진 몰랐다. 이것이 매일 하게 될 행복한 고민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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