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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품여자 May 23. 2021

2. 몰타

2-8. 남자 친구 진품 남자

브런치 소개글처럼 난 결혼자금으로 모으고 있던 돈을 몽땅 유럽 여행에 투자했다. 명품백에는 전혀 관심 없고 그저 내면이 명품 같아지길 희망하는 나의 가장 최애 취미는 여행이었다. 그런 내게 내가 그간 벌었던 큰돈을 투자하는 장기 유럽여행은 내 자신에게 주는 가장 큰 선물이었다. 결혼 자금을 다 썼으니 이후에 결혼은 어떻게 했냐는 물음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 있다. 당연 모두 대출.(정확히 이야기하면 아빠가 대출... 아빠! 고맙고 죄송해요.)


당시 난 3년이 넘게 만나고 있는 남자 친구가 있었다. 그는 공무원 시험 준비에 여념이 없었는데 그 와중에도 오랜 꿈이었던 나의 유럽 여행을 물심양면 지지해 주었다. 그는 늘 성실했고, 한결같았다.


그러던 중 몰타에서 남자 친구의 공무원 합격 소식을 들었다. 말이지 너무 기뻤다. 당시 세인트 줄리 해변을 혼자서 산책하고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들은 난 너무 좋아서 바다를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며 바보처럼 웃고만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 그동안 너무 고생했다며 꼭 안아주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공부하는 자기를 두고 혼자 여행 간다고 했을 때 섭섭했단다. 그리고 합격 후 그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만나서 누리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오랜 꿈을 지지해 준 그에게 참 고맙고 미안했다.


남자 친구는 그런 사람이기에 여행 기간 동안 생각이 많이 났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좋은 풍경을 보면서도 함께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항상 했다. 그래서 시험 합격 후 내가 있는 유럽으로 와서 같이 여행하자고 했지만 언제 발령이 날지 모르는 상황이라 그러지 못 아쉬웠다.


후 난 본격적인 고민에 빠졌다. 한국에 돌아가면 왠지 남자 친구가 결혼 이야기를 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실제 그랬다.) 결혼은 막연히 미래에 하게 될 수도 있다는 가정만 하고 살다가 막상 이게 현실이 된다고 생각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결혼을 한다면 지금의 남자 친구와 하는 것엔 변함이 없었으나 과연 결혼이라는 걸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지금 이대로도 행복하고 만족스러운데 굳이 결혼을 해야 하는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알콩달콩 사는 것이 꿈이라 했던 그였기에 내 생각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도 몰랐다.


결혼을 하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까? 아이를 낳으면 내가 그만큼의 희생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를 낳고 경단녀가 되기엔 학창 시절 밤새가며 공부했던 지난날들이 아깝기도 했다. 돈의 여유도 없이 대출이자만 갚으며 겨우 살 것만 같았다. 한국의 며느리로서 해야만 할 것 같은 많은 일들도 자신이 없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는 며느리의 희생이 당연했기 때문에 그 사이에서 갈등이 있을게 뻔해 보였기 때문이다.(남자 친구가 종가의 장손이라 더 그랬던 것 같다. 다들 종가의 장손 만난다고 하면 '헉'하는 소리와 함께 너 감당할 수 있겠냐는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바다를 보면 생각이 좀 정리될까 싶어 해질녘 수도 발레타가 보이는 바다에 나갔다. 저녁노을에 비친 건물들과 반짝이는 푸른 바다가 너무 아름다웠다. 한껏 숨을 들이켜고 내쉬었다. 맑은 공기가 내 몸을 구석구석까지 들어왔다 나가는 것 같다.



저녁노을이 지는 이 순간, 내가 바라보는 지금 이 풍경이 몰타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이것을 보러 이곳에 왔다. 이 순간만큼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냥 남자 친구한테 연애만 쭉 하자고 하면 안 될까? 그건 너무 이기적인가? 그럼 내 인생은? 아니 이 남자를 믿고 결혼을 해도 되는 거야?


깜깜한 밤이 되어도 도무지 답이 안 나온다. 혼자 의자에 걸터앉아 음악을 들으며 그냥 멍하니 바다만 바라보았다. 원래부터 신중하고 조심성 많은 난 결혼이라는 거대한 산 앞에서 자꾸 고민하고 헤매고 있었다.


'그래... 한국에 돌아갈 때쯤엔 답을 찾겠지. 천천히 잘 생각해보자.'




"꺄아~~~~ 아~~~~."


아침부터 둘째(2살)의 외침이 들린다. 자기도 슬라임을 가지고 놀고 싶단다. 무엇이든 곧장 입으로 가져가는 시기라 제지하면 어김없이 외치는 비명에 가까운 소리. 매우 간절해 보이지만 들어줄 수가 없다.


"안돼! 이건 내 거야. 엄마~ 슬라임 가지고 같이 놀아요."

"응 그러자."


동생에게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며 아직도 엄마와 함께 노는걸 제일 좋아하는 첫째(4살)의 요구에 난 쏜살같이 응한다. 혹여 동생에게 질투라도 할까 봐 난 첫째의 눈치를 살살 살펴본다.


첫째와 놀아주려고 슬라임을 손에 쥔 그때, 갑자기 둘째가 앉아서 힘을 준다. 똥을 싼 것이다. 온몸으로 힘주느라 머리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난 첫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신속히 일어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엉덩이를 씻기러 화장실로 갔다.


"엄마~ 똥 누고 싶어요."

"응~ 그래 그럼 바지랑 팬티 내리고 아기 변기에 앉으면 돼."

"혼자 못 벗겠어요."


배를 움켜쥐며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첫째. 한 달 전 기저귀를 뗀 첫째는 바지와 팬티를 내리는 걸 아직까지 어려워한다. 나는 혹여라도 팬티에 쌀까 둘째를 씻기다 말고 품에 안은 채로 첫째가 용변을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둘째를 다시 씻긴다. 이미 내 옷은 물과 땀으로 흠뻑 젖었다.


둘째를 씻겨서 닦은 다음 기저귀를 채우려는데 어찌나 발버둥을 치는지 힘으로 제압하며 기저귀와 바지를 겨우 입혔다. 첫째는 다 쌌다며 엉덩이를 닦아달란다. 전용 변기에 가까이 가서 보니 사방이 오줌이다. 아무래도 급해서 제대로 못 앉은 듯했다. 동생처럼 물로도 씻겨 달란다. 알았다고 하고 첫째와 화장실로 들어가려는데 둘째가 변기를 향해 돌진한다.


"아악! 안돼!"


혹시라도 오줌을 손에 묻힐까 싶어 둘째를 번쩍 들어서 바운서에 태웠는데 타기 싫다며 엉엉 운다. 둘째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첫째를 황급히 씻기고, 변기도 세척했다. 엉망이 된 바닥도 걸레로 닦는다. 첫째는 팬티도 바지도 내가 골라준 건 싫다며 이걸 입을까 저걸 입을까 하며 장난을 친다. 소리소리 지르며 울고 있는 둘째를 바운서에서 내리니 첫째가 괜히 한번 둘째를 민다. 뒤로 발라당 넘어진 둘째는 대성통곡. 첫째에게 큰 소리 내며 한마디 했더니 옷도 안 입은 채 울먹울먹. 둘을 품에 안고 다독이니 곡소리가 절로 난다. 이미 내 옷은 아이들의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고, 머리는 산발, 세수는 당연히 못해서 꼬질꼬질 그 자체다. 벌써 체력이 바닥난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한바탕 난리를 치렀는데 아직 오전 8시. 하아... 남편이 퇴근하는 저녁 7시까지 아직도 11시간이나 남았네. 어쩌지?


몰타의 그 여유 있던 밤. 음악을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너... 6년 후엔 '여유'라는 것을 손톱의 때만큼도 찾을 수가 없을 만큼 바쁘고 힘들 테니 지금을 충분히, 아주 충분히 즐겨. 그런데 말이야... 너무너무 바쁘고 힘들어도 말이야... 너... 아주 많이 많이 행복할 거야. 그러니 결혼에 대해 고민 많이 하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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