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치 못한 방향으로요.
2층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린다. 백호는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힐 소리, 여자다. 몸무게는 대략 50kg 내외. 보폭을 볼 때 165cm 정도 될 거 같다. 백호는 자신의 예상이 맞을지 궁금했다. 철로 된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여자였다. 몸무게나 키는 많이 틀린 것 같다. 백호는 예전에 본 셜록 홈스 드라마를 흉내 낸 자신이 살짝 부끄러웠다.
백호는 늘 이렇게 문 건너 사람을 예상하곤 했다. 백호의 예상은 잘 맞는 편이었다. 백호가 있는 사무실에 찾아오는 사람은 절대다수가 여성이었으니 잘 맞을 수밖에 없었다. 백호는 혼자서 사무실을 운영했다. 서울 외곽의 허름한 3층 건물. 2층에 백호의 사무실이 있었다. 업체명은 ‘딜리트(Delete)’. 백호 혼자 일하는 1인기업이다.
백호는 인터넷에 올라온 리벤지 포르노 피해자들의 의뢰를 받아, 그 영상을 삭제해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지만 이 일은 수십 년이 넘은 전통의 산업이다. 일반인의 불법 촬영 영상이슈는 스마트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VHS 기반의 핸디캠 시절부터 비디오테이프 불법복제로 유통되던 것이, 인터넷 시대를 맞이하며 대 폭발한 것뿐이다. 놀라운 점은 아직도 그때의 영상들이 가끔 인터넷에 올라온다는 것이다. 동물의 사체를 박제하면 영원히 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각종 화학약품 처리를 한 박제도 시간이 가면 가죽과 털에 변화가 생긴다. 그러나 디지털로 변화된 불법촬영 영상은 0과 1이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 심지어 품질의 변화도 없다. 가끔 용량을 변경하느라 해상도가 낮아진 버전이 돌아다니는 경우는 있어도, 파일로 존재하는 한 영원하다.
그래서 불법 촬영 피해자의 고통도 영원했다. 백호는 자신에게까지 찾아온 여성들의 사연을 듣고 있으면 자신이 정신과 의사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오늘 찾아온 여성도 그랬다. 대부분의 케이스는 뻔하다. 남자친구와 합의하에 찍었고 지운 줄 알았는데 헤어진 뒤 유포되어 괴롭다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나쁜 새끼들이 참 많다.
“네, 고객님. 사정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아이고.. 전화로 해도 되는 것을 직접 찾아오고 그러세요. 여러 모로 힘드실 텐데..”
결국 찾아온 여성은 울음을 터트렸다. 백호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티슈를 뽑아주었다. 대부분 비대면으로 상담 후 결제를 했으나 반 정도는 직접 방문했다. 사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디지털 성범죄 대응센터가 있었고 여기서도 접수 및 처리를 했으나 처리건수에 한계가 있었다. 또 왜 세금으로 이런 것을 운영하느냐는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빠르고 조용히 처리를 원하는 많은 고객들이 백호의 업체를 찾았다.
“흑.. 잘 부탁드립니다.. 가격은 어떻게 될까요?”
“네 저희는 국내사이트 삭제는 건당 20만 원, 해외는 30만 원씩입니다. 3개월간 국내외 500개 사이트를 모니터링하고요. 하지만 시간이 많이 흐른 후 다시 업로드되는 경우가 있으니 그때는 다시 의뢰해 주세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호는 여자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디지털 성범죄는 영구삭제가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습니다. 개개인이 다운로드하여 보관하고 있던 것을 모두 삭제하는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래도 저희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여자는 연신 잘 부탁드린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갔다. 백호는 예약스케줄을 확인했다. 한 30분은 여유가 있었다. 백호는 사무실을 나가 밖에서 문을 닫았고 ‘자리 비웁니다’ 푯말을 걸었다. 그리고 계단을 걸어 3층으로 올라갔다. 3층에는 ‘웹 4 컨설팅’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백호는 번호키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중충한 계단과 달리 내부는 깔끔한 부동산 사무실 같았다. 한가운데 소파에 백호가 앉자 맞은편 책상에서 모니터 3개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남자의 뒤에는 수많은 서버가 반짝이고 있었다.
“백호형, 오늘 그 여자 왔었어?”
“그래 적호야. 맞더라. CCTV로 확인했지? 영상 하고는 좀 다르던데? 진짜 그 멍멍 모텔 유출녀 영상 주인공 맞아?”
적호는 백호의 친동생이었다. 서백호, 서적호. 둘은 어릴 때부터 컴퓨터를 정말 잘했다. 서글서글하고 사람들과 잘 지내는 형 백호와 달리 적호는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람과 어울릴 시간에 프로그래밍을 하는 걸 더 좋아했다.
컴퓨터를 좋아하고 잘했지만 공부에는 흥미가 없었던 두 형제는 부모님의 성화로 겨우 지방 사립대를 졸업했다. 취업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자 둘은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고 각자 법인을 만들었다. 형인 백호는 디지털 장의사 업체인 ‘딜리트’를, 동생인 적호는 ‘웹 4 컨설팅’을 세웠다. 웹 4 컨설팅은 경영컨설팅으로 업종을 신고하고 사무실만 잡아 둔 상태였다. 몇 년째 아무 매출도 발생하지 않아서 적호는 늘 세금을 돌려받았다. 반면 백호는 갈수록 사업이 잘 되고 있었다.
백호의 ‘딜리트’는 디지털 장의사 업계에서 엄청나게 유명했다. 정부기관에서 운영하는 디지털 성폭력 지원센터에 신청하면 몇 개월은 걸렸을 건도 딜리트를 통하면 1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그 어떤 디지털 장의사업체보다도 빠르게 대부분의 성인물 사이트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백호는 TV에도 출연하며 서비스의 우수성을 강조했고 그 덕에 사업은 날로 커졌다. 서글서글한 얼굴로 사람들을 잘 설득하는 백호의 언변 덕에 딜리트의 명성은 높아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사업이 잘 된 건 아니었다. 백호의 사업이 잘 될 수 있었던 건 국내 불법 성인물 사이트 대부분을 동생인 적호가 제작,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인터넷을 접한 초등학교 시절부터, 국내 인터넷 사이트의 음성적이고 기형적인 부분을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아이디어를 낸 건 백호였다.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불법 촬영 사건이 많아질 것이었다. 이 수요는 분명 돈이 될 것 같았다. 합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서는 병 주고 약 주고 가 필요했다. 백호는 기존의 성인물 공유 사이트의 사업모델을 철저히 분석했다. 야동 때문에 발생하는 트래픽에서 도박, 마약 등 불법 사이트 배너를 걸고 돈을 버는 모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대부분 검거되었던 것도 경찰이 업체 간 돈거래를 추적했기 때문이었다.
백호의 아이디어를 받아 적호는 서버를 외국에 두고 국내 최대의 성인물 사이트를 여러 개를 만들었다. 엄청난 트래픽이 몰렸지만 백호와 적호는 어떤 광고도 걸지 않았다. 신규 영상은 국내외 여러 사이트의 신규 영상을 자동화 툴을 이용해 복사해서 올렸다.
백호에게 삭제 의뢰가 들어오면 적호는 자신이 관리하는 여러 사이트 전체에서 해당 영상을 가렸다. 제휴관계를 맺은 유명 해외 사이트에는 약간의 비트코인을 송금하고 영상을 내려줄 것을 요청했다. 삭제 전/후 비교 화면을 고객에게 제공하면 고객은 매우 고마워했다. 약속한 3개월이 지나고 나면 슬쩍 다시 영상을 올렸다. 고객은 다시 딜리트에 돈을 내고 삭제를 의뢰할 수밖에 없었다.
감기를 걸리게 하고 감기약을 판다.
그렇다고 감기가 영원히 안 걸리는 것은 아니다.
감기는 주기적으로 걸릴 수밖에 없고 약국은 영원히 돈을 번다.
이것이 백호와 적호의 생각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잘 되었던 것은 아니다. 체포의 위험도 걱정되었지만 그보다는 피해 여성들에게 인간적인 미안함이 들었던 것이다. 흔들리는 적호를 백호가 다잡았다.
“세상 모든 기업이 다 이런 식으로 돈을 벌고 있어. 우리만 고고한 척하지 말자”
“무슨 개소리야 형, 누가 이렇게 돈을 벌어!”
“야, 전자제품 만드는 회사가 영원불멸하게 고장이 안나는 제품을 만들 것 같아? 걔들도 일부러 시간 지나면 고장 나게 만들어. 거기다 말 같지도 않은 각종 ‘구독 서비스’는 또 뭐냐? 매달 얼마씩 뜯어가려고 혈안이 되어 있잖아 그렇지? 걔들이나 우리나 똑같다니깐? 나쁜 새끼들은 영상을 직접 찍는 놈들이지. 우리 없다고 영상 만드는 놈들이 없어지겠어? 그러니까 우리는 돈 버는데 집중하자 적호야. 응?”
사무실 소파에 누워 백호는 옛 생각에 잠겼다.
멍멍 모텔 유출본 주인공이 맞냐는 백호의 질문에 동생 적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 여자 맞다니깐. 지난달에 전 남친이 다크웹에 업로드해서 완전 난리였어. 미친 새끼. 리벤지를 이딴 식으로 하냐. 뭐 어떻게 헤어졌길래”
“뭔 상관이냐 우리는 돈만 벌면 되지.. 하아..”
백호는 소파 위에 늘어져서 말을 이었다. 이때 적호가 일어나서 커피를 들고 오며 백호에게 말했다.
“형, 그나저나 우리 언제까지 이러고 살 순 없잖아. 내가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적호는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형 백호는 다소 능글능글한 외모라면 적호는 도서관에서 볼 수 있는 공대남 이미지였다.
“지금 딥페이크 때문에 난리난 거 알지? 중고딩들이 지인 사진 가지고 성인물이랑 합성해서 야짤 만드는 거 말이야. 심각한 문제야. 우리로선 일 많아질 것 같고 말이지.”
백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딥페이크는 원래 기계학습을 의미하는 Deep Learning과 FAKE의 합성어로 인간 이미지 합성을 통칭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일반 여성의 사진을 야한 동영상과 합상하는 범죄가 기승을 부리며 딥페이크라는 단어는 대한민국에서 성범죄의 대명사가 되었다.
“맞아. AI 능력이 올라가니 이런 부작용이 생기네. 이제 얼굴만 있으면 전 세계 누구든 알몸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세상이지.”
“형, 사람들은 딥페이크 때문에 성인물이 더 범람하는 사회를 걱정하고 있어. 단순히 생각하면 그럴 거 같지. 실제로 단기적으로 그렇게 될 거야. 근데 이후에 대해서는 내 생각은 좀 달라. “
적호는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따랐다. 뜨거운 김이 올라왔다.
“딥페이크는 이제 막을 수 없어. 인공지능 생성 소프트웨어가 점점 고성능이 되면서 가정집 PC에서도 엄청난 결과물을 내고 있어. 사람들이 워드나 엑셀 쓰듯 집에서 딥페이크 사진과 영상을 만들게 될 거야. 이걸 정부에서 막으면… 인공지능 기술발전을 막는다고 정부가 욕을 먹겠지. 여자 얼굴에 야한 몸을 붙이는 거나 사진 배경 조작하는 거나.. 기술적으로는 차이가 없거든. 법 제도로 막을 수 없어.
가장 좋은 건 텔레그램 같은 메신저를 규제하고 경찰 수사가 잘 되도록 만드는 건데 과연 이게 잘 될까 싶어. 어디 머나먼 아프리카 제3 국에 서버 두고 사설 메신저 돌리면 그걸 언제 다 잡을 건데… 암튼 우리 일거리는 마구 늘어나겠지.”
백호는 적호가 건네준 커피를 받았다.
“형, 그런데 말이야. 앞으로 어떻게 굴러갈지 생각을 해 보면, 우리 일하는 것도 바꿔야 할 것 같아. 의뢰를 받아서 불법 촬영물을 지우는 것도 영원히 반복되거든. 끝이 없어. 우리야 그걸로 돈을 벌긴 하지만 난 늘 우리 일이 찜찜해. 이렇게 돈 버는 게 싫어. 영상 찍는 놈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도 나쁜 놈이잖아.”
백호는 뭐라고 말하려다 참았다. 그동안 입이 아프게 이야기했는데 또 동생이 저러는구나 싶었다.
“우리 일하는 방식을 바꾸자. 내가 생각한 게 있어. 피해자 여성분의 요청이 들어오면, 우리가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서 뿌리자. “
백호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영상을 삭제하고 돈을 받고 있는데, 영상을 더 만들어 뿌리자고?
“피해자 여성분이 나온 영상 원본을 조작해서 얼굴이 많이 다른 영상을 여러 개 만들어서 여러 사이트에 유통시키는 거야. 그리고 일부러 AI가 실수한 흔적을 넣어두는 거지. 왜 AI가 그린 그림에 사람 손가락이 6~7개여서 말 많았던 것 기억하지? AI를 이용해서 얼굴을 바꾼 딥페이크 영상을 원본 영상보다 더 유통되게 하는 거야. 여성분이 인식되지 않게 말이야”
백호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동생의 말은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야동의 영원한 삭제가 불가능하다면 얼굴을 바꿔서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영상을 다수 만들어서 배포하면 피해자 보호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유통되고 있는 영상 다수를 딥페이크 얼굴 영상으로 하면 원본 유통 자체를 줄일 수 있어 보였다.
“이른바,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전략이구나?”
“그렇지. 그거.”
형제는 마주 앉아 새로운 방식에 대해 토의했다. 그날 들어온 멍멍 모텔 피해자 여성건부터 그렇게 해 보자고 했다. 적호는 피해자의 얼굴과 매우 다른 영상을 제작했다. 영상 속 여성과 남성은 모두 손가락이 6개로 만들었다. 모텔 TV는 거꾸로 세워놓았다.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AI가 만든 페이크 영상임을 알아챌 수 있게 영상을 조작했다. 목소리도 원본 목소리를 바꿔서 새롭게 입혔다.
피해자 여성에게 이 방법을 설명하는 것은 백호가 맡았다. 백호는 피해 여성에게 찾아가서 ‘나무를 숲에 숨기는 전략’을 설명했다. 여성은 주저했다. 본인이 원하는 것은 인터넷상에서 완벽히 사라지는 것인데 유사한 영상이 확대되는 건 너무 이상하다고 했다. 백호는 완벽한 삭제는 영원히 불가능함을 거듭 설득했다. 2001년 유포된 B 양 비디오 파일이 23년이 지난 2024년 현재도 유통됨을 직접 사이트를 열어 보여주자 여성은 납득했다. 백호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거듭 약속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났다. 적호가 제안한 이 작전은 놀라울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성인물 사이트 여러 곳에 조금씩 다른 버전이 뿌려졌다. 이 세상에 없는 얼굴을 한, 손가락 6개를 가진 여성의 영상은 다양한 명칭으로 유통되었다. 백호와 적호가 넣은 인공지능 흔적은 곧바로 유저들에게 발견되었다. 유저들은 이 영상에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AI로 만든 영상이니 재미가 없다는 것이었다.
적호는 아예 여기서 더 나아가 기존의 모든 영상들에 동일한 작업을 해 나갔다. 거대한 유통망을 가지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 적호야, 근데 계속 이러면 우리는 뭘로 먹고살지? 이거… 시장 자체를 우리 스스로 부수고 있는 건 아닐까?”
백호의 말에 적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 그게 맞는데.. 우리가 돈 좀 못 벌거나 설령 망하면 어때. 불쌍한 여자들 더는 안 생기면 좋잖아. 우리야 다른 일 하면 되지. 흥신소 같은 걸 할까?”
백호는 겨우 끊은 담배를 태우고 싶어 졌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아.. 진짜 이게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정말…”
‘딜리트’의 새로운 방법은 경쟁업체에도 알려졌다. 디지털 장의사 업계 전반이, 직접 삭제보다 가짜 딥페이크 영상을 확산하는 전략을 시작하면서 불법 촬영 영상물 유통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불법 영상을 찾아보는 유저들 사이에 ‘불신’이 일반화된 것이다.
일반인의 영상이란 점에서 성적인 흥분을 하던 유저들은, AI가 만들어 낸 영상임을 안 순간 흥미를 잃었다. 실명이 공개되어도 진위여부에 대해서 믿을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AI는 실제로 다양한 야한 영상을 만들어 냈다. 실제인지 가짜인지 분간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백호나 적호가 만들어 내지 않더라도 AI를 통한 야동이 온라인에 넘치기 시작했다.
백호는 어릴 때 본 다큐멘터리를 떠올렸다. 성형시술에 사용되어 널리 알려진 보톡스는 실은 보툴리누스 균이 만들어내는 보툴리눔 독소가 원료다. 이 독소는 사실 독성이 엄청난 물질이다. 100g만 으로도 전 인류를 죽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형시술에 사용되면서 인류에게 혜택을 주었다. 백호는 AI 성인물이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자 과거와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예전에는 얼굴이 알려지고 신분까지 노출되면 자살까지 생각해야 할 정도로 여성의 삶이 파괴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불법 촬영 피해를 당해도 여성들은 당당하게 말했다. “나 아닌데? AI 가지고 누가 장난한 것 같은데?”라고.
불법 촬영 영상을 돌려보는 범죄자들도 이제 현실세계에서 어떤 여성인지 찾는 것을 포기했다. 영상의 진위를 넘어 디지털 세계에서 접할 수 있는 음성, 음악, 사진, 기사.. 모든 정보가 의심받는 세상이 왔기 때문이다. 초거대 AI를 활용하면 청와대가 무너지는 영상, 대한민국이 대지진으로 소멸하는 영상까지 완벽히 현실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제 무엇도 믿을 수 없었다.
불법 촬영 영상 유통 시장은 점점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AI가 만드는 딥페이크 영상이 장악했다. 이 세상에 없는 얼굴을 한 여성의 섹스영상이 전 지구상에서 초단위로 만들어졌다. 누구의 인권도 침범하지 않는 성인물의 등장이었다.
백호와 적호는 어찌 보면 불법 촬영 영상의 피해 여성들을 구한 셈이 되었다. 누구도 몰라주지만 말이다. 백호는 더 이상 자신의 사무실로 찾아오지 않는 여성들을 보며 간판을 내리고 폐업을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매출이 없어서 백호가 세금을 돌려받고 있었다. 반면 적호는 AI가 생성하는 성인물 시장에 뛰어들어 급성장하고 있었다. 미리 AI를 이용한 성인물 제작을 실전에 응용해 왔기에 시장을 선점할 수 있었던 것이다. AI 성인물이 합법인 미국과 일본에 자회사를 두고 자신의 기술력으로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무엇보다 백호와 적호 모두 더 이상 ‘병 주고 약 주고’를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좋았다.
이렇게 딥페이크는 전 세계에 ‘불신’을 전파해서, 세상을 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