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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까 Nov 21. 2019

2015년 일기장에서

올해 한해는 어땠었나요. 


여러 가지 좋은 일도 많았어요. 한국에 신청한 여러 기금도 성공적으로 따냈고 맘조리며 준비하던 학기도 잘 끝났고 사람들과 싸우지 않고 나름 둥글둥글 잘 지냈던 것 같아요. 제가 한 일이 인정을 받았는지, 나라에서 제가 하는 활동에 지원을 하겠다며 재정적 도움을 약속했고, 또 꽤 큰 돈을 받을 수 있는 일에 뽑히기도 했어요. 그래서 올해 초는 가을 내내 뼈빠지게 일하고 나면 크리스마스 즈음해서 춥지 않은 어딘가로 여행을 갈 꿈에 부풀어 있었죠.


안 좋은 일도 많았어요. 전혀 예상치 못한 큰 병에 걸려 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 2016년이 오자마자 바로 병원에 다시 검진을 받으러 가야돼요. 아직 나이가 젊으니 그 병이 두 번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나름 철옹성이라고 믿고 있던 내 젊음과 몸뚱아리에 대한 믿음이 순식간에 우루루 넘어져 버리는 충격이 더욱 컸어요. 


연말이 되면 사람들이 모두 구차해져서 일년간 있던 일들을 곱씹어보기 마련인지라, 올해 저도 소피아 구석진 거리 호텔에 자리 잡은 방에서 이번 해의 일들을 고민해보게 되었네요. 혼자 고민고민해보니, 결과적으론 좋은 일도 좋은 일이 아니었고, 나쁜 일도 나쁜 일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올해 초에 쏟아져왔던 좋은 소식들은 아직 소식에만 그칠 뿐 내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주지는 않았고, 오히려 반대로 주머니가 화수분처럼 변해서 모든 것들이 숭숭 빠져나가는 것 같아요, 그 좋은 소식들과 들뜬 기분들이 내 마음과 주머니에 숭숭 구멍만 뚫어놨나 봐요. 그 좋은 소식들은 고생과 힘든 기다림만 선사해줬을 뿐 결과적으로 제 생활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준 것 같지는 않아요. 마치 작년 요르단에 갔을 때 들어가 보았던 사해바다 같아요. 딱 5분만 즐거웠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입안이 매캐하고 눈이 따갑고 살갗이 따가워지기만 했었거든요. 


그것은 아팠던 기억도 마찬가지에요. 누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만한 큰 병을 진단받고는 잠깐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오금이 저리긴 했는데, 사실 이제 와서 보니 제 건강에 대한 무절제하고 비논리적인 믿음을 억제하고 좀 더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내 삶을 바라보게 해주었던 기회가 되었어요. 그 병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2016년이 제 인생이 마지막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본다면, 그 병의 판정은 어찌 보면 굉장히 좋은 소식이었는지도 모르죠.


사랑이 설렘도 몇 번 왔다가 사라졌고, 제 인생 앞 레드카펫처럼 놓인 아름다운 고독은 더 윤이 나고 부드러워졌어요. 쓰레기더미처럼 쌓여있던 감정과 기억들을 정리하니 가장 밑바닥에는 정말 지리산 계곡물처럼 반짝이는 융단이 드러나더군요. 하지만 여전히 치워야할 것이 많습니다. 조만간 치울 수 있을 것 같은 기억도 아니고, 레드카펫을 아예 통째로 들어내지 않으면 없애지 못할 것들도 있는 것 같아요. 그냥 다른 헝겊조각으로 안 보이게 슬쩍 덮어놓았을 뿐이죠. 


저는 그래서 지인들에게 새해에는 무조건 행복하고 좋은 일만 생기라는 희망은 빌지 않으렵니다. 적당히 행복하지만 적당히 힘들어서 적당히 마음의 근육을 쓰는 일이 잦아져서, 결과적으로 좋은 일은 더 좋은 일로 슬픈 일은 기쁜 일로 어려운 일은 즐거운 추억으로 기억하게 되는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2016년도 견디기 쉬운 날만 있게 되지는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만큼은 행복해집시다. 올해 한 해 동안 제 곁에 있어주셔서 모두 감사드립니다.



2015년 마지막 날. 불가리아 릴라 수도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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