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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까 Sep 08. 2021

빌뉴스에 가던 날

바르샤바에서 빌뉴스에 처음 가던 날이야. 와, 벌써 30년 전이구나. 


가난한 학생이니 비행기는 못 타고 버스를 탔지. 버스로 10시간 정도 걸리던 여정이야. 

문화과학궁전 앞 정류장에서 짐을 모아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며칠 전에 표를 예매해 둔 버스가 도착했어. 일정보다 많이 늦게 말이야.


오래 기다린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 


허허.....


그런데 버스운전사가 뻔뻔하게도 자리가 없다네. 표도 미리 사놓지 않은 사람들만 버스 안에 바글바글했어. 그 전에 출발해야했던 다른 버스가 고장이 나서 같은 차에 사람들을 채워 넣었다는 것 같애. 


버스운전사는 나랑 같은 처지에 놓은 사람들과 말다툼을 하고 있었어.  나처럼 꼭 그 버스를 타고 빌뉴스에 가야 하는 사람들은 버스운전사에게 자리를 내놓으라며 으름장을 놓았고 버스운전사는 배를 째라며 손을 내저었지.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 한 명이 버스에서 내려 봉지에 담긴 뭔가를 수돗가로 가져가 주섬주섬 씻기 시작했어. 아마 밤새 먼길을 떠나며 먹으려고 준비한 과일을 씻고 있던 것 같아. 

어른들과 함께 길을 떠난 아이들이 바람을 쐬며 꺄르륵 꺄르륵 웃고 있었어. 또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 몹시 즐거웠던 모양이야. 그리고 어정쩡하게 서있는 동양인을 잠시 신기한 듯 쳐다보더니 자기들 세계로 다시 빠져들었지.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여행객들은 어쩔 수 없이 그 버스를 타고 빌뉴스로 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어. 

우리들은 버스 한가운데 복도에 자리를 잡고 앉았어. 왜 빌뉴스에 가려고 하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대여 섯 명이 복도에 빙 둘러앉아 달리는 밤버스 안에서 폴란드어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 나도 그 속에 앉아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말 없이 듣고 있었지 


테니스공처럼 머리를 물들인 짧은 머리 아가씨는 자기가 치과의사라고 했는데, 할머니 기일 때문에 가족을 만나러 가는 거라고 했어.


몸집이 커다란 수염 난 아저씨는 목소리가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지만 결혼식 준비 때문에 신부 친적들이랑 만날 일이 있다는 것 같았어. 


머리가 좀 벗겨지고 얼굴이 유독 하얀 청년은 호숫가 마을에 배를 고치러 가는 중이라 했어. 


구석에 있던 한 사람은 그늘 때문에 얼굴이 잘 안 보이긴 했는데, 리투아니아의 있던 한 성당에 미사를 집전하러 간다고 말했어. 


각자 자기의 이야기를 마친 사람들은 마치 순서라도 정해진 것처럼 이제 내가 이야기할 차례라는 듯 동시에 나를 빤히 쳐다보았어. 버스에 오르기 전 버스운전사한테 따지는 것을 보고 내가 폴란드어를 하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거든. 희끄무레한 버스 조명 밑에서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길 기다리며 빤히 쳐다보던 그들의  모습이 여전히 기억 나.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 자리도 없는 밤버스를 타고 빌뉴스에 가는 이유가 궁금했던 모양이지. 그때는 참으로 보기 드문 풍경이었을 테니까.....


빌뉴스에는 리투아니아어를 배우러 간다고 했었어. 바로 며칠 뒤에 수업이 시작했으니까. 


누군가 리투아니아어를 왜 배우냐고 물어봤던 게 기억 나. 그런데 내가 뭐라고 대답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 

그리고 나서 나를 신기해하던 아이들의 틈 속에 겨우 자리를 잡고 졸다가 육중한 국경을 건넜고 버스는 새벽안개가 자욱했던 빌뉴스 버스정류장에 나를 덩그러니 내려주고 떠나버렸어. 나는 누군가 마중나올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안개 속 버스정류장에서 한참을 서 있었지. 


무작정 국경을 향해 달리던 깜깜한 밤버스 안에서 나는 리투아니아어를 배우는 이유에 대해서 뭐라 말했었을까. 그 버스 안에서 들었던 다양한 이야기들이 다 머리 속에 들어있는데 그때 내가 한 말만 기억이 안 나. 나는 도대체 리투아니아어가 왜 배우고 싶었던 것일까. 그때 거기 있던 사람들은 내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보다 중요한 건 


난 지금도 모르겠어. 


내가 이 버스에 왜 타고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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