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트비아에 살 때 이야기야.
소비에트 시절에 지어진 실내장식이 아주 화려한 극장이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가는 곳이었어, 여느 때처럼 그 극장에 갔고 영화 시작까지 마침 시간이 남아 커피를 좀 마시려고 지하 바로 내려갔지. 그 바엔 나랑 카운터에서 일하는 아가씨 둘 뿐이었어, 블랙커피를 시키고 내가 자리에 가 앉았는데 카운터에 전화벨이 울렸어. 전화를 받은 카운터 아가씨는 러시아어로 뭐라고 뭐라고 이야기를 하더니 나를 불렀어. 나는 내 주변에 누가 또 있나 싶어서 주의를 둘러보았지.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카운터 아가씨는 수화기를 내밀고 얼른 받으라며 손짓을 했어. 나는 다시 한번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정말이냐고 확인했고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화기를 내 쪽으로 내밀고 기다리고 있었어. 이런 장난 같은 일이 있나. 난 우선 전화를 받기로 했어. 전화를 받고 상대편이 뭔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는데 거기서 먼저 러시아어로 여보세요 라고 이야기하더군. 그리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러시아어로 뭔가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는 아가씨를 쳐다보면서 난 러시아어를 못한다고 말했지. 그런데 그 아가씨는 연신 손짓을 하며 계속 전화를 받아보라고 재촉했어.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다시 수화기를 든 내 귀에 한국어 비슷한 것이 들렸어, 여자 목소리였고 분명 한국어였어. 러시아어 악센트가 강하게 들어간 한국어였지. 고려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상대방은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여보세요 하고 말했어, 난 약간은 놀란 목소리로 네, 안녕하세요 라고 격식을 갖추어 이야기했지. 라트비아 같은 낯선 땅에서 내게 전활 걸어 한국말로 이야기하고 있는 이 사람은 대체 누군걸까. 난 그 상대가 한국말을 얼마나 잘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쪽에서 말을 먼저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었어. 약간 침묵이 흐르더니 그 상대방은 나에게 이렇게 물었어.
- 저...... 김치 팔아요?
- 네?
- 네, 김치 팝니까?
그 얘길 들은 내 기분이 어땠는지 다들 상상이 갈 거야. 난데 없이 전화를 걸어서 김치를 찾다니. 한국사람이면 전부 김치장사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난 안 판다고 이야기했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순간 또 말을 걸었어.
- 그럼, 어디서.. 팔아요?
고려인이라 김치가 몹시 먹고 싶은가 보다 생각했지. 하지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니 미안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어버렸어. 카운터 아가씨는 나를 재미있다는 눈으로 빤히 쳐다보고 있었어, 대화가 어떻게 이어져 갔는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말이야.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라 잠자코 있었더니 아가씨가 말을 이어갔어.
- 나 그 여자 여기서 자주 봤어요, 그쪽이 여기 극장이 올 때마다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이에요. 그쪽이 맘에 들었던 모양인데 말을 못 붙이겠는 모양이더라구요, 영어도 못하고 라트비아말도 못하고 한국어는 더더욱 못하니 망설이고 있다가 오늘 끝내 용기를 낸 모양이에요. 그래서 이곳으로 전화를 걸어서 바꿔 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었으면 뭔가 다른 이야기를 좀 할 것이지 김치를 파느냐니.....내가 마음에 들었으며 그래서 용기를 냈던 거라면 들어와서 나한테 제대로 말을 걸거나 했을 것이지 왜 쓸데 없이 그딴 방식으로 내게 다가와서.....
얼굴도 모르는 그 고려인이 요즘도 가끔은 생각 나. 용기를 내었으면 마저 끝까지 냈었어야지. 용기가 장난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