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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발트해의 붉은 숲 9

by 자까

수업이 끝난다. 나타샤는 구내식당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제안한다. 미소가 아리따운 아가씨가 가지고 온 커피를 무심코 들이키자 먼지 같은 것이 목 안으로 넘어온다. 강은 성급히 잔을 내려놓는다. 커피잔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커피 가루들이 물과 섞이기를 거부하며 떠돌아다니는 것이 보인다. 원두를 그대로 갈아 물에 탄 모양이다. 나타샤가 입을 연다.


“오늘 수업은 어떠셨어요?”

“아주 재밌었어요. 어린 시절 생각이 나기도 하고... ...”

“한국에서도 수업시간은 우리와 비슷한가 보죠?”


어린 시절 겪은 빨갱이에 대한 경험은 이야기해도 모를 것이다. 약간 마른 듯한 얼굴의 나타샤는 미소를 머금은 입술에 다시 커피잔을 가져다 댄다.


“아까 듣자 하니까 나타샤 씨도 라트비아어를 잘 하신다고 하던데. 러시아분이 아니신가요?”

“부모님은 러시아에서 이주해오셨는데, 저는 여기에서 태어났어요. 주변에 라트비아 친구가 많아서 어린 시절 라트비아어를 자연스럽게 배웠답니다. 우리 남편도 라트비아어 잘 해요.”

“그래요?”


언제나 말이 없어 보이는 알료샤에게 고개를 돌리며 반문했지만, 알료샤는 여전히 입을 열지 않는다. 나타샤가 그를 흘낏 보더니 다시 입을 연다.


“이 사람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냈죠. 저나 남편이나 어린 시절부터 라트비아어를 하는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라트비아어는 별 무리 없이 구사할 수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러시아 사람들도 아니군요.”

“라트비아가 소련에 통합된 것은 2차 대전 직후입니다. 그래서 저희 세대는 그 이후 바로 라트비아로 건너온 러시아 1세대들의 후손들이에요. 태어난 곳으로만 따지면, 저희도 라트비아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강은 옆으로 밀어두었던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맛을 본다. 맛이 한결 나아졌다. 물과 동화되지 못한 커피알갱이들이 끝내 동화를 포기하고 바닥으로 가라앉은 탓인가.

“사실 우리들도 한때는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답니다. 라트비아가 독립 투쟁을 벌이던 때에는 우리도 소련 침공의 부당함을 알리는 싸움에 참가를 했었지요. 저희 고향도 바로 여기거든요. 저희는 라트비아가 독립을 하면 이전에 있던 편견과 차별은 전부 사라지고, 완전한 라트비아의 국민이 될 거라고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달랐죠. 라트비아를 위해 싸운 우리들에게 국적을 얻으려면 시험을 보라고 하는 거예요. 시험쯤이야 보면 끝이라고 생각할 만큼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린 이전에 우리가 같이 살았던 라트비아 친구들과 똑같이 그냥 라트비아 시민이 되기를 바랐던 거죠.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다른 러시아인들과 똑같이 취급을 했습니다.”


자기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그 땅 어디에서도 소속감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강도 잘 안다. 강이 고민에 빠져 말 없이 커피와 물의 동화가 진행되고 있는 커피잔만 바라보고 있자 나타샤는 잠시 알료샤의 얼굴을 쳐다본다. 뭔가 그에게서 동의를 바라는 눈치다. 알료샤가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자 나타샤는 작정한 듯 말한다.


“남편은 아프간 전쟁에 참전을 했었어요. 그 전쟁에서 팔을 잃었죠.”


그는 아무런 대답을 않고 창문 너머 희끗희끗 눈이 덮인 도시를 지나가는 전차를 바라보는 듯 시선이 밖으로만 향해있다.


“아프간 전쟁에 다녀온 다음부터 소련에 대항하는 활동에 더욱 열심히 참여하기 시작했어요. 그것 때문에 감옥에도 다녀왔었으니까요.” 지금은 반 라트비아. 이전에는 반 소련. 상황이 바뀌어도 언제나 이방인처럼 살아야하는 존재. 참으로 이상한 나라다, 이 나라. 흰 토끼들이 복도에 모여 동양인을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그 토끼들이 수업에 가야하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린다.


“아, 죄송해요, 제가 수업에 들어가 봐야 돼서요.”


나타샤는 강에게 인사를 건네고 알료샤에게 러시아어로 무언가 당부를 하면서 살포시 남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다. 왼손으로 아내의 손을 부드럽게 감아쥐는 알료샤. 얼굴에 피어나는 편안함이 보기 좋다. 나타샤의 구두 굽 소리가 복도 아래쪽으로 사라지자 알료샤가 입을 연다.


“학교 취재가 웬만큼 되었으면 시내에 한번 나가보시겠어요?”


알료샤는 언제나 한 두 마디 이상 말을 이어가는 법이 없다. 언제나 짧고 명확하게 필요한 말만 할 뿐, 날씨가 어떤지 기분이 어떤지 등 개인적인 이야기 따위는 전혀 하지 않는 것 같다. 할 말이 없는 것인지, 말을 하기를 별로 좋아하질 않는 것인지.


러시아 인권운동을 벌이고 있는 또 다른 친구 집에서의 방문 인터뷰, 그 후 나타샤와 다시 만나 저녁식사가 이어진다. 저녁을 먹는 내내 아들 미샤와 딸 디나가 얼마나 말썽을 피워대고 김 선배의 처 빅토리아랑 어떻게 친하게 되었는지 등 웃고 떠드는 대화가 이어진다. 물론 대화는 주로 나와 나타샤 사이에서만 주고 받을 뿐이다. 알료샤가 어떻게 팔을 잃게 되었는지는 듣지 못하고 호텔로 돌아온다.


***


다음 날 아침 여덟 시가 조금 안된 시간, 핸드폰이 울린다. 강은 술 취한 듯 비틀거리며 일어나 의자 위 대충 내던져진 바지를 뒤적여 전화를 받는다. 김 선배다.


“라트비아는 재밌어?”


그렇게 대뜸 묻는 김 선배의 목소리에는 강의 라트비아 출장이 부러워 미치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제 전화를 한다고 해놓곤 깜박 잊었네, 너무 재미있게 여기저기 다니느라 바빠서.”


강은 눈을 비비며 대충 의미 없는 대답을 던진다.

“그래, 내일까지 잘 놀고 잘 구경하고 잘 지내다 와라, 오늘 행사 있는 거 알지?”

“어, 알어, 알료샤 씨가 친절하게 잘 해주더라고, 그래서 오늘 별 어려움 없이 취재할 수 있을 것 같아.”

혼자 떠난 강의 출장이 염려가 되어서 안부전화를 한 건가 궁금해질 무렵 김 선배는 뜬금없이 알료샤의 이야기를 꺼낸다.

“빅토리아가 그러는데, 알료샤가 팔이 하나가 없다며.”

“아. 그렇더라구, 부인이 그러는데 아프간 전쟁에 나갔다가 팔을 잃었대.”

“그래? 빅토리아 말이 맞았군 그래. 조만간 소련 아프간 전쟁 30주년이 되잖아, 국제부에서 그에 관한 특집기사를 또 하나 준비하는 것 같은데, 그 사람이랑 이야기 좀 하고 와봐, 이야기가 재미있으면 기획에 참조가 될 것 같으니까. 요즘 또 미국-아프간 전쟁이랑 연계되어서 좋은 반응도 얻을 수 있을 거고.”


상황이 그렇다면 강이 알료샤에게 아프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묻기를 주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그런데 알료샤가 말을 잘 안 해, 주로 그 사람 부인 나타샤랑만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 기회를 봐서 한번 물어보지 뭐.”

“그래, 부탁 좀 할게. 빅토리아가 그러는데, 오늘 그 행사가 아주 대단하다네. 아직 히틀러의 군대를 위해서 꽃을 헌화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룬다니 말이야.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와서 회의하면서 하자고. 박 국장 말야, 뭐 특종기사가 들어선다고 내 기사를 갑자기 줄이래. 젠장, 지면 부담 덜한 인터넷 신문사로 가던가 해야지..... 어, 국장님! 나중에 통화하자.”


김 선배가 허둥지둥 전화기를 놓는 소리가 들린다.


문득 어머니가 궁금해진다. 전화기를 다시 들어 집 전화번호를 누른다. 한국 시간으로는 두 시 무렵일 텐데 어머니는 어디에 가신 것인지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어머니는 핸드폰을 사용하지 않으신다. 한 대 사드리긴 했지만, 그대로 서랍 안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강은 그대로 통화정지 버튼을 누르고 잠시 샤워를 하고는 호텔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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