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공사 중

발트해의 붉은 숲 10

by 자까

여기 저기 보이는 철제 바리케이드, 분주히 오가는 경찰들. 시가지 풍경은 어제와 사뭇 다르다. 강은 자유의 여신상 앞으로 방향을 잡는다. 리가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이 여신상은 라트비아의 자유와 독립을 상징하는 밀다라는 이름의 여신이 별을 들고 서있는 기념물이라 했다. 예상대로 그곳의 경비가 가장 삼엄하다. 이미 누군가 헌화를 시도하러 왔다가 실패를 한 모양인지 철제구조물 여기저기 붉은 꽃송이들이 꽂혀있다. 강은 아무것도 모르는 관광객인양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경찰에게 다가가 묻는다.


“여기 왜 봉쇄가 된 것이죠?”


경찰은 영어를 잘 못하는 듯하다. 강이 하는 말에 별로 신경을 안 쓰는지도 모른다. 그냥 대뜸 ‘공사 중’이라는 단어 하나만 던져주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자기 갈 길을 간다.


원하는 곳에 들어가지 못하고 웅성거리고 있는 관광객들이 강 말고도 많이 눈에 들어온다. 경찰들은 그들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해주지 못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라트비아의 상황을 잘 모르는 이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정보를 짜 맞추며 나름대로 열심히 고민을 해볼 것이다. 어떤 이들에게 라트비아는 그런 고민의 시간도 아까울 만큼 별 볼일 없는 나라일 수도 있다. 그냥 힘들게 찾아온 관광의 기회를 놓치는 것 때문에 안타까워하는지도 모른다.


알료샤와 만나기로 약속한 한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미사가 진행 중인 성당 앞에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커다란 카메라를 든 기자들, 군복을 입은 노인, 반 나치 구호가 담긴 피켓을 들고 서있는 청년들, 꽃다발을 들고 누군가 나오기를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 모두 그 성당 앞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밖으로 터져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큰 카메라를 든 알료샤가 보인다. 무거운 표정으로 성당 안을 지켜보고 있다. 몇 발짝 가까이 다가가 보아도 강을 쳐다보지 않는다. 오른팔 소매를 툭툭 당겨본다. 그제야 고개를 돌려 강을 쳐다본다. 왠지 미안하다.


“곧 행사가 시작하나요?”

“예, 이 미사가 끝나면 사람들이 행진을 시작할 거예요, 아마 다들 한꺼번에 자유의 여신상 쪽으로 가려고 시도하겠죠.”

“보니까 보안이 철통 같던데요.”


알료샤는 잠시 미사 광경을 지켜보다가 말을 한다.


“미사를 허락한 성당의 주교가 의심스럽습니다. 어떻게 나치 신봉자들에게 성당을 내어줄 수 있는 건지.”

나치 신봉자들에게 성당을 쓰게 해준 주교도 그렇지만, 알료샤가 묻지 않은 말에 이야기를 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 그것이 더 신기하다. 강 옆에서 꽃을 들고 서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무척 초조해 보인다.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진다. 성당 안에서 걸어 나오는 군복 입은 노익장들. 주변 사람들은 성당 입구로 모여들면서 더욱 혼잡스럽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터져 나오는 노래. 라트비아 국가인 모양이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알료샤의 손이 바빠졌다. 한쪽 팔로만 그 큰 카메라를 지탱하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신기해 보일 정도이다. 난 옆에 서있던 할머니와 무언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지만, 국가제창이 끝난 후 다시 그쪽을 보니 군중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없다. 알료샤도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


미사를 마친 친위부대 참전군인들의 후손들과 가족들이 꽃을 한 송이씩 들고 거리에 나타난다. 불필요한 충돌을 막기 위해 행진을 저지하는 경찰들과 그에 아랑곳 않고 앞으로 행진하려는 꽃을 든 이들, 그들에 맞서는 러시아인들, 세 무리가 한 데 뒤엉켜 중세의 도시는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된다. 예상되는 동선에 맞추어 쳐놓은 바리케이드로 인해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는 곳은 아주 제한적이다. 경찰들은 강이 마주 보이는 구시가지 구석 작은 광장으로 사람들을 몰아간다.


군중 틈 속에는 나이든 어른들이 많이 보인다. 거동을 제대로 할 수 없어 보이는 노파들도 적지 않다.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눈길을 돌리다 광장 한 구석 힘없이 앉아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헌화를 하려는 양인지 백합 한 송이가 손에 들려있다. 할머니의 눈에도 저 삼엄한 경비를 뚫고 자유의 여신상에 헌화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이 어둡게 들어 앉아 있었지만, 꽃을 든 주름진 손에는 힘이 들어가 보인다.


알료샤도 여기 어딘가에 있을 것 같은데 이런 군중 속에서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나 혼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모습과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을 담는 수밖에 없다.


광장 중간쯤에서 수 십 명의 경찰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아무도 통과할 수 없도록 철통수비하고 있다. 경찰들이 서 있는 앞쪽으로 러시아어로 나치를 반대한다는 구호가 적힌 붉은 티를 입은 모여드는 청년들이 나타나서 경찰과 같은 대오를 만들어 군중을 막아선다. 그들의 등장에 군중들과 언쟁이 높아진다. 라트비아어와 러시아어로 주고받는 그들의 언쟁은 금세 소리가 높아졌고, 양쪽의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구호 소리만이 광장을 가득 채운다.


“나치!”

“침략자들!”

“나치!”

“침략자들!”


러시아인들의 모습을 더 가까이에서 카메라에 잡으려면 강은 그들 앞으로 더 가까이 가야 할 것 같다. 대치하고 있는 그들의 눈매가 나름 매섭다. 경찰의 대오에 섞여 내 앞에 서있는 한 청년의 입에 마이크를 가져다 댄다.


“영어 할 줄 알아요?”


청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야기를 좀 해주세요.”


그는 서툰 영어로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리는 라트비아에서 퍼지고 있는 파시즘을 반대하기 위해서 여기 나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조국에 나치즘이 창궐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 말이 끝나자 강 뒤쪽에서 거친 구둣발이 나타나 말하는 이를 걷어차려 한다. 강은 나치추종자의 발이 귀에 닿을 것 같아 흠칫 놀랐다. 그러나 러시아 청년을 해하지는 못한다. 인터뷰를 녹음하고 있던 애꿎은 녹음기가 넘어오는 발을 피하려고 고개를 젖히는 러시아 청년의 머리에 맞아 경찰들이 만들어 놓은 인간 방패 너머로 훌쩍 넘어가 버린다. 강을 지켜보고 있던 경찰은 강이 아닌 그 누구라도 그곳을 통과하게 허락할 수는 없다는 무심한 눈길을 보내온다. 걱정 되는 마음에 카메라를 더 강하게 움켜잡는다.


옆으로 자리를 피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강은 이미 나아가고자 하는 자들과 막고자 하는 자들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것을 깨닫는다. 곧 격한 움직임이 이어진다. 자신의 이웃을 나치라 부르는 러시아인들. 자신의 이웃을 침략자라 소리 지르는 라트비아인들. 경찰을 사이에 둔 몸싸움. 경찰에 연행되어 끌려가는 사람들. 사람들의 모습을 담느라 여력이 없는 전 세계에서 몰려든 취재진들. 이런 와중에 카메라가 심하게 부서진 듯 난감하게 서있는 외신기자들.


빨갱이, 간첩, 북한놈, 파시스트, 침략자, 소련군, 나치추종자……. 강의 의지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던, 강이 선택한 것이 아닌 이념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부유하던 강의 어린 시절. 낯선 이방인인 강은 작용과 반작용의 사이에서 힘 없이 부유한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강 건너 강이 묵고 있는 호텔 뒤로 태양이 떨어질 무렵에야 경찰들의 대오가 풀린다. 그제야 문득 잃어버린 녹음기 생각이 난다. 그 자리에 찾아가 보니 녹음기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아까 백합꽃을 들고 있던 할머니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그 할머니는 손녀인 듯한 젊은 여자와 함께 벤치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강은 젊은 여자에게 다가가 영어를 하는지 묻는다. 아가씨의 이름은 운디네, 할머니의 이름은 마리야다. 운디네는 예상대로 마리야 할머니의 손녀였고, 대학교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고 한다. 할머니의 남편 아이바르스, 즉 여학생의 할아버지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1945년 라트비아 서부전선 전투에 징용되어 떠났었다.


운디네는 할머니의 말을 고개까지 끄덕이며 유심히 듣다가 강에게 몇 마디씩 통역을 해준다. 할머니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통역을 시작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듯하다.


“우리 할아버지는, 리에파야라는 라트비아 서부 해안도시에 살았는데, 마침 그곳은 유럽 전체에서도 나치 독일군대가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전선 중 하나예요. 우리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그 전쟁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어요.”


할머니는 운디네의 입을 빌어 아이바르스와 헤어졌던 크리스마스 무렵 눈 내리는 적송숲 마을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흰눈이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

임신한 부인을 두고 떠나는 남편.........

바람소리에 휩쓸려 사라지는 마지막 눈물의 키스........

겨울 내내 총소리가 멈추지 않는 적송숲........

숲에 흩뿌려진 꾸덕꾸덕한 피 속에서 남편의 향기를 애타게 찾는 여인의 흐느낌.......

눈바람을 헤치고 적송 숲으로 뛰어들어간 이를 기다리는 듯 광장 한 구석 벤치에서 망연히 앉아있는 두 여인......

책임질 수 없는 역사에 대항하지도 못하면서 그 자리에 나와 주변을 살피는 그들.......

내후년에도 자기들을 나치라 부르는 군중들을 무심하게 바라볼 여인들의 손에서 하늘거릴 하얀 백합꽃.

아...... 서석대의 노을을 뚫고 돌아올 아버지를 기다리는 우리 가족. 벚꽃놀이의 붉은 기억.....

옆에 있던 할머니가 손녀에게 뭐라고 말을 한다. 아마 그들의 대화 내용을 알아듣고 무슨 말을 덧붙이려는 모양이다.


“우리 할아버지는 나치가 아니었어요. 나치라면 치를 떨던 분이었어요. 유대인을 죽이지도 않았어요.”


다시 할머니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계시지도 않은 분인데, 나치건 붉은군대건 무슨 상관이 있어요. 단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희생하신 우린 할아버지를 위해서 이 꽃을 헌화하려는 것 뿐인데…….”


여학생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진다. 그런 얼굴을 본 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건다.


“자유의 여신상이 아직 철제구조물로 가로막혀 있지만 할머니가 그 철창에라도 꽃을 꼽는 모습을 사진에 담고 싶어요.”


할머니와 손녀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수줍게 허락을 해준다. 사람들은 물러갔지만 여전히 광장을 둘러 안은 분리의 선. 바리케이드에 다가가는 손녀와 할머니. 떨리는 야윈 손으로 철제구조물 틈 사이로 밀어 넣는 백합꽃 줄기.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뻗은 자유의 여신상을 말없이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 그 속에 비치는 푸른색의 마돈나. 이념과 역사적 판단을 넘어선, 오직 사랑하는 이를 그리워하여 붉게 물드는 푸른 눈동자.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 악몽 같았던 도덕시간을 마치고 돌아온 날, 어린 강의 울음 섞인 푸념을 듣고 난 어머니의 눈동자가 떠오른다. 어머니 역시 그날 이 여인처럼 망연히 앉아 눈물만 흘렸다. 할머니의 눈동자가 담긴 사진을 보면 적어도 강의 어머니는, 아니, 광주에서 남편을 잃은 여인이라면 누구라도 남편을 여읜 이 푸른 눈의 여인과 슬픔을 나눌 수 있을지 모른다. 강은 그들에게 다가가 한국에서 가져온 조그마한 선물을 건넨다. 할머니가 살며시 웃으며 강의 목을 포옹해 준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커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