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해의 붉은 숲 11
그 후 알료샤가 대표로 일하고 있는 러시아인 연대사무소로 향한다. 만나기로 약속을 한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가면 알료샤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무실 한 구석에 앉아있던 나타샤가 반갑게 웃으며 일어선다.
“은철 씨, 아닌 게 아니라 이곳으로 오실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오늘 알료샤가 챙겨드리지 못했다면서요.”
“예, 워낙 난리가 아니었죠, 오늘이......”
“네, 남편도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지금 알료샤는 잠시 방송인터뷰 차 나갔는데 곧 돌아올 거예요, 잠시 차라도 한잔 드시면서 기다리시겠어요?”
나타샤는 구석에 가서 분주하게 움직이더니 어제 학교에서 맛보았던 커피를 내온다. 벌써 익숙해진 탓인가, 강은 커피 알갱이들이 물과 타협하기를 기다린다. 나타샤는 다시 자기 책상으로 나가 앉더니 모니터를 주의 깊게 쳐다본다.
사무실을 둘러본다. 러시아어로 적힌 여러 가지 문구들, 책들, 깃발들. 한 곳에 집중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쳐다보고 있는 강에게 나타샤가 말을 건넨다.
“오늘 사진은 많이 찍으셨어요? 뭐 어려운 일은 없었구요?”
인간 바리케이드를 만들었던 러시아 청년들과 인터뷰를 할 때의 이야기를 해준다. 나타샤가 놀란 표정으로 말한다.
“어머, 큰일 날 뻔 하셨네요. 안 다치신 게 다행이에요.”
강의 이야기를 넉살 좋게 받아주는 것은 고맙지만, 왠지 백합꽃을 든 할머니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나탸사가 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돌린다.
“어찌 보면 이상하게 들리거나 좀 기분이 나쁜 질문일 수도 있는데요…….”
미소를 지으며 눈빛으로 경청한다는 신호를 보낸다.
“오늘 보니, 두 민족 사이에 골이 상당히 깊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마치 서로 미워하도록 교육 받은 사람들처럼…….” 나타샤는 말이 없다. 그냥 입술에 미소를 머금고는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다.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나 보다. 문득 알료샤의 팔이 떠오른다.
“저, 빅토리아 남편 미스터 킴 말입니다. 알료샤 씨가 아프간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이야기를 기사에 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지금 기회가 된 김에 그 이야기를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강은 그냥 김 선배의 말을 전했을 뿐인데, 사소한 실수로 큰 비밀을 들켜 버린 것처럼 무안해진다. 나타샤는 강의 속마음을 알아차린 듯 대답 대신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책상 옆 책꽂이로 뚜벅뚜벅 걸어가더니 주간지보다 조금 두꺼운 책을 한 권 건네주면서 내 앞에 앉는다.
“제가 길게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이것을 보시는 게 더 좋을 거예요, 알료샤가 아프간에 참전해서 팔을 잃은 다음에 아프간 전쟁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에도 참가했었는데, 그때 외부에 알리기 위해서 영자로 발간했던 책이거든요. 여기에 알료샤의 수기가 실려 있어요.”
나타샤가 열어서 보여준 책 속에는 다음과 같은 영어제목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소련은 내게 아프간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제목 아래로는 지금보다 20여 살은 어려보이는 알료샤의 사진이 찍혀있다. 대략 6페이지 정도 분량에 작은 글씨로 빼곡하게 적힌 수기. 맨 첫장을 보니 이런 글이 보인다.
‘나는 라트비아의 수도에서 멀지 않은 시굴다에서 태어났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하게 된 것은 18살이 되었을 때였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79년 5월 9일, 나는 입대를 명받고 우즈베키스탄 페르가나 훈련소로 향했다…….’
기사 곳곳에는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찍은 것처럼 보이는 사진이 몇 장 보인다. 친구처럼 보이는 사람과 어깨동무를 하고 민둥산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 장갑차 앞에서 찍은 사진. 사진 속 인물은 동일인인 것 같은데, 고양이가 번데기를 벗고 표범이 된 듯 더 강인해져 보인다.
강은 책을 덮는다. 그리고는 피곤한 어깨를 주무르며 나타샤에게 말한다.
“알료샤가 좀 늦는 모양이에요.”
나타샤는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며 대답한다.
“그러게 말이에요. 올 때가 지났는데…….”
강은 일어나려고 가방을 챙기며 말한다.
“죄송하지만,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먼저 호텔에 들어가 있겠습니다. 혹시 알료샤가 오면 호텔로 전화를 좀 해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이 책 가져가도 될까요?”
나타샤가 큰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와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와 다우가바 강을 건너 호텔로 향한다. 이미 어둑어둑해진 거리는, 대낮에 있던 일들을 까맣게 잊은 듯 고요하다. 다시 이것저것 둘러볼 수 있는 자유를 되찾은 관광객들은 리가의 야경을 즐기며 연신 즐거워하고 있다.
강은 호텔방에 들어서자마자 가방을 열어 나타샤에게서 받은 그 책을 꺼내본다.
....... 나는 18살이 되던 해 페르가나에 있는 훈련소에 들어가서 낙하산 훈련병 교육을 받았다. 나는 당시에는 낙하산 교육이 왜 필요한 것인지 잘 알지 못했다. 그냥 군대에서 요구하는 것이 그것이었으므로 두말없이 열심히 훈련에 임했다. 막연히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불가리아 어딘가에 있는 소련 부대에 파견근무를 나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이다. 평생을 라트비아의 시골에서만 살던 나는, 우즈베크에 이어 불가리아로 이어지는 인생의 긴 항로를 꿈꾸며 꿈에 잠겼다.
나는 학교에서도 콤소몰 단원으로 열성적으로 활동하면서 완벽한 공산주의자의 이상을 꿈꾸었으며, 학교에서 공부하는 사회주의의 이념이 언젠가는 꽃피우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던 청년이었다.
12월 24일 우리는 모두 페르가나 군용비행장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어디로 가는지 말해주는 이는 없었다. 그 비행기는 우즈베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내렸다. 착륙한 곳은 불가리아도 루마니아도 아닌,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곤 돌산 밖에 없는 황량한 사막이었다.
우리들은 공항 인근에 있는 막사로 이동해서야 어디에 도착을 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를 마중 나온 체격 좋은 대위는 장병들을 보자마자 이렇게 외쳤다.
“아프가니스탄에 온 것을 환영한다. 우리는 이 사막에 진정한 사회주의 정부를 건설하는데 일조하기 위해서 이곳에 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