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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발트해의 붉은 숲 12

by 자까

알료샤는 다시 하늘을 메운 말벌들이 갈기갈기 찢겨진 자기의 몸을 들고 지평선 너머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비명과 함께 꿈에서 깬 그는 습관처럼 오른팔을 들어 몸을 더듬었다.


그런데 몸을 만질 수가 없었다. 아무리 팔을 휘저어도 마치 몸이 사라져 버린 듯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아……. 그는 천국에 온 것이 분명했다. 다른 이들을 데려간 그 죽음의 천사가 마침내 그를 찾아와 주었구나 하는 기쁨에 눈물이 흘러나올 뻔 했다.


잠시 후 천국과는 거리가 먼 것 같은 비명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린 그는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주변엔 누런 돌산도 퀘퀘한 천막도 아닌, 정갈하게 정돈된 침대과 깨끗한 시트가 보였다. 아. 죽음의 천사여, 당신은 내 오른팔만 구원해주셨군요.


울디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군의관은 알료사는 마침 그곳을 지나던 다른 소대원들에 의해서 구조되었다고 했지만, 울디스에 대해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몇 달 후 회복이 되어서 고향인 시굴다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너르고 푸른 숲과 붉은 투라이다 성이 눈에 들어왔다. 가족들은 그 성곽과 떡갈나무처럼 의연하게 전쟁에서 돌아오는 기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알아보지 못하고 소스라치게 비명을 질러냈다.


물론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시간은 알료샤를 많이 변하게 했다.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눈빛도 변했고 이글거리는 사막의 태양은 피부도 검게 물들였다. 게다가 팔도 하나를 잃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한품에 안아주지 못하고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만 있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분명 네가 전사했다고 통보가 왔는데…….”


어머니는 그 통보를 받고 며칠 사이에 머리마저 하얗게 세고 말았다. 알료샤의 식구들은 조만간 그의 시신이 운구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 준비도 미루고 있었다. 그가 돌아왔을 때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서서히 소련 전체에 알려지고 있는 때였다.


며칠 후 울디스의 부모들이 찾아왔다. 울디스에 대한 안부를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그의 어머니는 알료샤를 끌어안고 내내 울기만 하다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울디스가 우리집에 오기 전.........

..........그러니까 하지가 지나고 난 뒤였어요.....

.......난 치즈를 만들 때 쓸 우유를 가지고 오던 길이었지요...........

........동네 앞 떡갈나무 앞에 우람한 뿔을 가진 사슴 한 마리가......

.........저를 쳐다보고 있는 거에요.......

.......얼마나 늠름하고 멋지던지........

.....혹시 사냥꾼이 그 멋진 사슴을 해하면 어쩌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 다행히 아무도 없었어요......

......사슴과 저 혼자 눈을 마주보고 한동안 서있었죠......

.......사슴이 절 불렀어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절 부른다는 걸 알 수 있었죠.......

..........다가가서 목을 쓰다듬어주고 뿔을 만져주었어요......

.......사슴도 그걸 기다렸던 것 같아요..........

.........저에게 몸을 맡기고 가만히 있었거든요.......

.......그런데 왜 그리 눈물이 나는지.........

........울디스랑 꼭 닮은 동그랗고 촉촉한 눈동자로 나를 쳐다보면서.......

.............뭔가 말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사슴한테 아들이 좋아하던 치즈라도 먹이려고 집에 갔다 와보니......

........이미 사라지고 없었어요......

.......떡갈나무 앞에 앉아 한없이 울기만 했어요......

......우리 어머니가 불러주던 노래에 나오는 가사처럼,

.........전쟁에 나간 우리 아들이 사슴이 되어 돌아온 줄 알았어요.....

.....그런데 치즈 한 점 먹여 돌려보내지 못했어요.

.............아, 그런데.......정말로.....

... 우리 울디스가 돌아왔어요.....

......아, 가엾은 우리 울디스.......

......그렇게 착한 아이가.......

울디스가 돌아온 날, 마지막 아들의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에 관을 열어봤다가 실신을 한 어머니는 며칠간 병석에 누워있었다고 했다. 어머니가 말을 잇지 못하자 남편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울디스의 귀 한쪽이 잘라져 있더군요. 군인들은 아프가니스탄 병사들이 시신을 발견하면 귀를 잘라간다고 하던데, 그 말이 사실인가요?”


알료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울디스의 아버지는 무언가 안심이 된 듯 한숨을 쉬었다.


“한쪽 귀가 없으니, 장례식날 울디스는 바로 눕히지 못하고 옆으로 뉘었답니다. 아들 녀석 모습을 완전히 보여줄 수는 없었지만, 관 뚜껑 위에 뚫려 있는 작은 유리창으로 옆으로 누워있는 울디스의 얼굴을 살짝만 보여주었어요. 약하고 겁이 많은 아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많이 변한 모습이었어요. 너무 변해서 알아볼 수가 없었어요.”


정황을 보아하니 울디스는 소련이 매설한 지뢰를 밟은 것이었다. 소련군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울디스의 귀를 잘라 게릴라들에 의해서 죽은 것처럼 위장했다. 바위 밑에 숨어 있다가 기절한 알료샤는 다행히 목숨을 구했지만, 영혼들의 총상으로 다친 팔은 절단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낯선 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스체니친 대위의 부인이라고 소개한 그 여자는 남편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는지 묻고 있었다. 나는 그저 부대에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는, 부인도 들어서 알고 있는 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며칠 후 동네 선술집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자리에서는 누군가 시끄럽게 떠들며 이야기를 해대고 있었다. 듣자하니 아프간에서 근무한 낙하산 부대원이었던 모양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경험담을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낙하한 후 어떻게 무자헤딘 기지에 침투했는지, 하늘에서 보는 산지형이 어땠는지, 그때 참여한 군인들의 사기가 어땠는지, 지상에 낙하해서 무자헤딘 몇 명을 소탕을 했는지 등, 그가 떠벌리는 무용담들을 주변인들은 넋 놓고 듣고만 있었다. 모두 거짓말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지형구조상 낙하산을 타는 것은 자살행위였으니까. 화가 치밀어 오른 나는 당장 일어나 거기서 낙하산을 타고 내려오면 어떻게 되는지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러자 어디선가 사복경찰이 나타나 나를 포위해 끌고 가더니 곧 국가기밀 누설죄로 수감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지 불과 다섯 달 뒤였다.


강은 무엇에 홀린 듯 그 수기를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마지막 페이지를 읽고 나서 시간을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시간을 보상해 주기에 이야기는 너무 싱겁게 끝난다. 그 다음엔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왠지 허둥지둥 끝마친 것 같은 그의 수기. 난 책을 덮어 침대 위에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기며 기록되지 못한 그의 이야기를 완성해본다.


충격으로 실어증에라도 걸렸을까.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 소련. 그 틈을 이용해 소련의 압제를 끝마치고 독립을 얻으려는 투쟁을 시작한 라트비아. 자유와 평화를 위해서 친구들과 인간띠를 만들어 함께 서있는 알료샤와 나타샤. 마침내 라트비아의 독립이 승인되자 그는 친구들과 함께 샴페인을 마셨을 것이다. 알료샤는 명목 없는 사회주의 건설 위해서 자신의 팔을 앗아간 소련의 붕괴에 기뻤고, 해방된 라트비아가 그에게 전해줄 새로운 기대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현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십 여 년 전 울디스 같은 젊은이들을 전장으로 끌고 간 소련의 후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라트비아의 독립은, 그에게 또 다른 투쟁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다른 이야기도 읽어보려고 책자를 잠시 들추어보다가 이내 책을 덮고 아예 드러눕는다. 배가 고프다. 아직 저녁도 먹지 않았다. 순간 전화벨이 울린다. 난데없는 공습을 받은 소련 병사처럼 벌떡 일어난다. 수류탄을 던지듯 수화기를 움켜쥔다. 느릿느릿한 영어 대화가 전화기를 타고 스며 나온다.


“아, 미안해요, 은철 씨. 오늘 일이 너무 많았어요. 나타샤가 그러는데 오래 기다렸다고.”

아, 알료샤....

“괜찮아요, 오늘 나름대로 다니면서 사진도 많이 찍고 인터뷰도 많이 하고…….”


그리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린다. 알료샤는 또 말이 없다. 갑자기 그가 답답하게 느껴진다. 이 침묵을 어떻게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강이 먼저 입을 연다.


“나타샤한테서 책을 하나 받았어요. 알료샤가 쓴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기가 실려 있는 소책자에요. 미스터 킴이 알료샤의 아프가니스탄 참전 시절 이야기를 궁금해 하던데, 전해줘도 되겠지요?”

“아. 그러세요......”


알료샤의 말끝이 떨린다.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대략 감이 오는 것 같다. 그 어색한 감정. 시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그 끈질긴 존재의 어색함.

강은 그의 마음을 불식시키려는 듯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서 말한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저희 신문사에서 아프가니스탄 종전 기념 특집 기사를 준비하고 있는데, 그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다시 어색한 침묵만이 흐른다. 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어색한 숨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운다. 강도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저녁 햇볕이 물들고 있을 무등산이건 영혼들이 드글드글한 바위산이건 아무데건 도망을 가버리고 싶다.


“조금 참조만 할게요. 아마 지금 국제부에서도 다른 이야기들을 모으고 있을 거예요.”


알료샤가 난데 없이 저녁식사를 했는지 묻는다. 강은 그냥 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알료샤는 시간에 맞추어 공항에 배웅을 나오겠다고 말한다. 강은 몇 번을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이 공항대기실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한다. 피곤하다. 정말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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