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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사람

발트해이 붉은 숲 - 마지막

by 자까

사람이 아무도 없는 텅 빈 리가 시가지. 꺼진 가로등. 신비로운 불빛으로 환하게 빛나는 안개로 덮인 도시. 다우가바 강의 검푸른 물결이 하늘로 솟구치고 붉은 여명의 노을이 땅으로 쏟아져 섞인 아주 붉은 자주색.


그 가운데 하얀 길 위에 강이 서있다. 그 길 위로 나타나는 세 명의 그림자. 그 속에서 나는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본다. 눈송이처럼 내리는 자주색 벚꽃잎. 독일 군복을 입은 병사와 소련군복을 입은 두 남자가 그 옆에 서있다. 그들은 무언가에 대해서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 같다.


강은 짙은 붉은 안개를 휘저어 그들에게 다가간다. 그러나 도저히 다가갈 수 없다. 강은 분명 버려져 있다. 그들이 강를 버린 것이 아니다. 그냥 누군가에 의해서 이 낯선 거리에 내동댕이쳐져 있다. 강의 앞 멀찌감치에서 이야기를 하며 산책을 하는 그들은, 강을 보지도 인식하지도 못한다. 그들은 쫓는 것은 단지 강 한 명이다. 그들은 그냥 저 멀리 무심히 걸어가기만 할 뿐이다.


“거기 서요!”

“........”

“서보라고요!”

“.......”


강은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을 거리에 서있는 그들을 향해 목청껏 외쳐본다. 그의 목소리는 벚꽃잎처럼 붉은 안개 속에서 소용돌이칠 뿐이다.


“제발, 거기 좀 서봐요. 물어볼 것이 있다구요!”


그들은 여전히 요동도 하지 않는다.


“제발, 아버지. 우리 어머니는... 나는.... 알료샤는....어떻게 하라구요. 그렇게 가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하라구요.”


그러나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처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걸어갈 뿐이다. 강은 끝내 그들을 뒤쫓기를 포기한다.

다시 하늘과 땅으로 분리되는 붉은 자주색. 검붉은 적송숲을 어스름하게 비추는 하얀 달빛. 걸음을 멈추지 않는 세 사람. 그저 망연히 앞으로 걸어가기만 하는 검붉은 그림자.


........적송숲.......


공항 내 커피숍. 거기에서는 물과 동화를 거부하는 알갱이들이 배회하는 커피는 팔지 않는다. 검게 볶은 원두를 갈아 짜낸 원액에 물을 섞은 커피의 향기가 좋다.

알료샤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천천히 묻는다.


“취재는 마음에 드셨나요?”

“네, 저도 여기서 많은 것을 공부하게 되어서 좋았어요.”


그리고 다시 흐르는 어색한 침묵.


“나타샤한테는 작별인사를 못하고 가게 되네요. 안부라도 전해 주세요.”

“나타샤도 그 말을 하더군요. 오늘 수업이 있어서……. 기사가 나오면 보내주세요.”

강은 그에게 미소로 대답하고 잠시 말없이 커피를 마신다. 커피 한잔을 다 비우고 나서 알료샤에게 말한다.

“전 솔직히 이 기사를 어떻게 써야할지 모르겠어요.”


말 없이 나를 쳐다보는 알료샤.


“김 선배와 빅토리아에게서 듣던 이야기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어제 행사를 주관한 사람들을 한마디로 무어라 규정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워 보여요. 아프가니스탄에서 돌아온 후에는 반소련 운동에 앞섰지만, 지금은 정작 그 반대의 일을 하고 있는 당신의 경우처럼요.”


그리고 또 말이 없는 알료샤. 어렵게 말을 뗀다.


“은철 씨는 ..... 여기서............. 무엇을 보셨나요?”


강 역시 할 말을 잃는다.


사실 강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냥 그들이 한자리에 엉켜서 서로 험담을 하고 욕하는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녹음기 앞에서 라트비아 시위단을 욕하던 그 러시아 청년도 오늘은 어딘가에서 라트비아 친구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트비아 사람들에게 적대감을 내비치며 격앙된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그 학생은 오늘 라트비아 동네 친구들과 모여서 축구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알료샤가 그냥 가만히 강을 지켜보고 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알료샤의 나이 또래쯤 되셨을텐데……. 어제 꿈 속에서 보았던 세 명 중 한명은 과연 아버지였을까…….


알료샤 역시 강처럼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생각하느라 말이 없는 것일까? 강이 무슨 말이라도 먼저 꺼내주길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일까? 그가 내뱉은 의미 없는 말이 누군가의 목숨을 앗아가기라도 한 것일까? 그래서 괜히 사람들을 동요하지 않도록 말을 아끼는 것일까?


강은 웃으며 그에게 왼손을 내밀었다. 왜냐면 그에겐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료샤, 건강하고, 잘 있어요, 정말 고마웠어요.”


오른팔을 아프간에서 잃은 알료샤는 내 왼손을 힘껏 잡는다.


“그래요. 미스터 킴에게도 꼭 안부 전해주시구요, 나중에라도 다시 오시게 되면 꼭 연락 주세요.”

그리고 강은 출국장으로 들어간다. 그리 넓지 않는 공항 내부를 잠시 둘러본다. 어머니에게 드리기 위해 호박이 달린 장신구를 몇 개 고른다. 호박은, 한때 발트해 지역에 울창하게 형성되어있던 침엽수림이 갑작스런 지각변동으로 땅으로 가라앉으면서 송진이 굳어서 생긴 보석이란다. 급격한 에너지와 열을 받으면 침엽수 같은 나무도 이렇게 보석이 될 수 있다니. 여러 사람들이 섞여 살고 있는 이 사회가 호박처럼 영롱한 보석처럼 부활하려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와 지각 변동이 필요할까.


강은 대기하고 있는 비행기에 오른다. 이륙을 준비하는 비행기의 엔진 돌아가는 소리. 50명 정도 앉는 작은 프로펠러 비행기라 그런지 창가에 앉은 강의 귀에 소음이 무척이나 시끄럽게 들린다. 스튜어디스들이 복도에 나란히 서서 안전교육을 준비하고 있다.


다양한 사연들이 부유하는 공간을 떠나려는 듯 비행기가 꿈틀댄다. 공항 건물 앞쪽에는 유난히 붉은 적색의 깃발이 펄럭인다. 영원히 섞일 것 같지 않은 유난히 붉은 그 적색과 흰색. 그 너머 보이는 눈 덮인 적송숲이 유난히 더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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