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는 넓게, 40대는 깊게

무수한 만남의 계절은 끝나고, 오래 함께할 이들이 남았다

by 유트루


20대와 30대의 나는 늘 사람 속에 있었다.

직업이 곧 관계를 결정지었다. PR담당자, 마케터, 창업가로 살았던 시절,

하루를 살아낸다는 건 곧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는 일이었다.


PR 일을 할 때는 특히 더 그랬다.

브랜드별로 관리해야 할 기자만 백 명이 넘었다.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TV까지 매체는 끝이 없었고, 그 속에서 수십 명의 기자와 관계를 이어가야 했다.

하루의 점심은 늘 미팅으로 채워졌다. 기자 미팅 아니면 클라이언트 미팅. 클라이언트도 보통 세 개 정도 맡았는데, 한 클라이언트만 해도 담당자가 다섯 명 이상은 됐다. 그러니 한 달이면 백 명 가까운 사람들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 받아야 했던 셈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메시지와 이메일 확인으로 하루가 시작됐고, 밤늦게까지 전화와 보고서가 이어졌다.

그렇게 얽히고설킨 관계들은, 사실 일이 아니었다면 결코 맺어지지 않았을 인연들이었다. 회사의 이름으로, 브랜드의 필요로 인해 만나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일로만난 관계라 해서 가볍기만 했던 건 아니다. 그 안에서도 배움이 있었다.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제각각이고, 목표도 다른 사람들과 맞춰가는 법을 배웠다. 때론 의견이 부딪혀 속이 상하기도 했지만, 끝내 프로젝트를 완수했을 때는 또 묘한 동지애가 생겼다. 지금의 내가 조금 더 유연해지고,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게 된 건 바로 그 수많은 관계 속에서 단련된 결과다.


그러나 회사에서 나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명함집을 빽빽하게 채웠던 무수한 이름들이, 내 삶에서 후루룩 빠져나갔다. 연락은 뚝 끊겼고, 회자되던 대화방은 금세 조용해졌다.


처음에는 홀가분했다. ‘이제는 나만의 시간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자유로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서운함과 서글픔이 따라왔다. 그렇게 자주 전화하던 사람들은 왜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까? 내가 그토록 열심히 맺어왔던 관계들이 결국 일이라는 매개가 사라지자 허망하게 흩어져 버렸다는 사실이, 어쩐지 허무했다.


30대의 나는 여전히 사람을 붙잡으려 했다. 관계가 끊기면 내가 실패한 것 같았다. ‘인맥을 넓혀야 한다’는 말이 정답인 줄 알고, 내 이름과 명함을 더 많은 곳에 남기려 애썼다. 관계는 내 자산이자 안전망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만큼 공허함도 커졌다. 화려한 모임과 무수한 이름 속에서, 정작 내 마음을 편히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40대가 된 지금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지게 된다.


“누구와 오래 갈 수 있을까?”

이제는 사람을 많이 아는 것이 자산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를 줄여가며, 진짜로 내 곁에 남는 얼굴들이 무엇인지 확인하는 과정이 더 소중하다.


남은 사람들의 얼굴은 선명하다.

- 자주 만나지 않아도 내 소식을 궁금해해 주는 사람

- 내가 힘들다고 말했을 때 조용히 들어주는 사람

- 오랜만에 만나도 어제 이어서 대화하는 것처럼 편안한 사람

- 숫자는 줄었지만, 밀도는 훨씬 더 깊어졌다.

관계의 폭은 좁아졌는데, 내 삶은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돌이켜보면 30대의 넓음이 있었기에 지금의 깊이를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수많은 만남 속에서 배우고 부딪혔기에, 지금 내게 꼭 필요한 사람들을 구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계절처럼 관계에도 주기가 있는 것 같다. 화려하게 피어나는 봄이 있으면, 잎을 떨구고 가지를 단단히 하는 겨울도 있다. 30대의 나는 봄을 지나며 꽃을 피웠고, 40대의 나는 겨울을 지나며 뿌리를 굳히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관계가 줄어드는 게 아니다. 관계가 더 단단해지는 과정이다. 20대와 30대의 나는 수를 세며 살았다. 명함의 개수, 전화번호부의 이름, 모임의 횟수를 자산이라 여겼다. 하지만 40대가 된 지금은 마음이 편안해지는 몇 명의 얼굴만 떠올린다. 그거면 충분하다.


이제 나는 숫자가 아니라 깊이를 세며 산다. 그 깊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 단단해지고, 삶의 무게와 함께 관계의 무게도 더해진다. 그것이 바로 지금 내가 배운 30대는 넓게, 40대는 깊게 라는 말의 진짜 의미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