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파마머리가 트레이드마크인 김정운 교수의 문화심리학 책을 즐겨 보곤 하였다. 그중의 하나인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에서는인간이 하는 후회에 대한 이야기가나오는데, 그의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그는 책에서 말하기를사람은 어떤 행동을 하던지 안 하던지 '후회'를 하게 되어 있는데, 그 방식은 크게 다르다고 하였다.해본 것에 대해서는 자기 합리화를 통해 금방 잊고 후회나 슬픔의 정도가 적은데 비해, 안 해본 것은 미련이 생겨서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나.
이 말은 내 경우에도 딱 들어맞았다. 어떤 일을 하고 나서 후회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은데, 망설이며 미루다가하지 않아서 후회한 일은많이 생각난다.이런 경험들은 결국 할까 말까 고민되는 일이 있을 땐, 무조건 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교훈을 내게 안겨주었다.
수년 전 제주도 서귀포시에서는 신혼여행 사진전을 공모한 적이 있었다. 코로나 전이라서 신혼여행을 대부분 해외로 나갈 때였기에, 아름다운 서귀포를 적극 홍보하는 차원이었을 것이다. 나는왠지 마음이 강하게 동해서,서울에 있는 남편에게 부탁하여앨범에 고이 간직해오던 제주도 신혼여행 사진들을 제주도로 공수해 온 적이 있다.
공모전 참가자는 나처럼 해외 신혼여행이 유행하기 전에 결혼한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었다.지금처럼 전문 사진작가가 동행할 때라 아니라서 사진도 대부분 아마추어 수준일 테니,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것으로여겨져자신감까지 생겼다.나는 서귀포임을 입증할 수 있는 사진 중에서 구도가 잘 잡히고 포즈가 좋은 사진들을 몇 장 추렸다. 그중에서정방폭포 아래섶섬이 보이는바위에걸터앉아남편 옆에서 머리를 쓸어 올리는 사진은 제법 그럴싸하여 회심의 미소까지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결국응모를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공모전이 귀찮고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그 당시 관계를 확장해 나가던 올레 아카데미 동기들과 올레길을 돌고 실험예술과 김백기 감독을 만나 매주 공연장을 쫒아다니며 노는 일에 정신이 팔리면서,공모전은 자연스레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다.그야말로나는 매사가 용두사미였다.
그렇게 공모전을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동네 산책을 나갔다가 서귀포시에서 운영하는 북카페 <소라의 성>에 들렀는데, 아뿔싸 2층에서 신혼여행 사진전시회가 열리고있는 게 아닌가? 불안한마음으로계단을 올라 수상작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순간,나는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보기에도 나의 사진이 충분히 경쟁력이 있었던 것이다.대상까지는 모르겠지만 금상이나 은상 정도는 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쓰라린 감정이 가슴을 훑고지나면서 순식간에 온몸을 덮쳐 다리까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후회가 막급하여 마음이 어찌나 쓰리고 아프던지,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안타까움이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다.
수상자들에겐 소정의 상금과 서귀포 숙박권, 신혼여행 사진이 찍힌 장소에서 같은 포즈로 사진을 찍어주는 이벤트가 주어졌다.이미 제주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상품이크게 탐나진 않았지만, 빛나던 젊은 날의 추억을반추하며인생의 한 페이지에 또 하나의재미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설사 응모를 했다가 떨어졌다 하더라도 이렇게 미련이 남아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내가 제주에서 민화를 시작하게 된 배경엔 이런 후회의 경험이 한몫을 했다.
지난여름 나는 남편과 함께 서귀포에서 열리고 있는 민화 전시회를 간 적이 있다. 제주에서 활동을 시작한 손혜정 작가의 첫 전시였는데, 우리는 거기서 마음에 드는 작품을 만났다. 그 작품은 손 작가의 대표작으로 제주 곶자왈을 소재로 그린 <욕망의 숲>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남편은 중앙에 그려진 사슴을 나로, 주변 풀 숲에 숨어있는 곤충들을 나의 욕망으로 해석하며 대뜸 그림을 사주겠다고 하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그림을 사는 것이 로망이었던 남편은바로 그림 값을 지불했다.그리곤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작품을 배송받아 서울 집 거실에 걸어 놓았다.
남편덕분에 집에서그림을 매일 감상하니 마음이 흡족했다.한지에 스며든 물감의 색감이 수채화나 유화와는 다르게깊고 차분한 느낌으로 나를 사로잡았다.급기야는나도 나의 인생 숲이 되어준 제주를 민화로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꾸준히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나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꿈을 꾸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동안 호기심을 안고 시도했다가 끝을 보지 못하고 중단한 수많은 취미들이 나를 비웃는 것만 같았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해야만 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감이 위축되며,그림을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가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나는 잠시망설였다. 다시 새로운 길을 가려고 기웃거리기 전에 좀더 신중해지자고 나를 다독거렸다. 하지만 고개를 쳐드는 마음을 누르면 누를수록욕망은 더세차게 꿈틀거리는 것이 아닌가.
나는 할 수 없이 친구에게 상담을 요청하였다. 미술을 전공하고 현대 민화 대전에서 대상을 받은 적이 있는 대단한친구였다. 친구는 가만히 나의 고민을 듣더니 주저하지 않고 바로 해보라며, 내가 꼼꼼하니 잘할 수 있을 거라는 덕담까지 건넸다. 나는 친구의 진심 어린 응원에 큰 힘을 얻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나의 열망을점검해야만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새로운 길 앞에서 두려움이 몰려와가느냐 마느냐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될 때, 나는 10년 후 아니면 더 멀리 인생의 종착역인 죽는 순간을 떠올린다. 이번에는타임머신을 타고 훌쩍 10년 후로 날아가 보았다. 그리고 지금 어떤 선택을 해야 후회하지 않을 것인가를 진지하게 물었다. 답은 자명했다.
뭘 망설이는가? 지금 당장 시작하라
인생에서 늦은 때란 없는 법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에서 가르쳐준 대로,인생은 언제나 자신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가 이끄는 대로 걸어가는 것이 정답이다.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북소리를 외면하고억누르며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포기하고 만다면,구제받을 수 없는 후회 속에서 인생을 마감할 것이 뻔한 것이다. 또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의 북소리를 따라가다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서 불행에 허덕이는가?
매주 일요일 오전, 나는 화구를 챙겨 들고 서귀포 보목의 바닷가에 위치한 아뜰리에로 향한다.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가는 그 길엔 언제나 기대와 설렘이가득하다. 그렇게 당도한 화실은 제주에서 성공한 젊은 작가, 지금은 나의 민화 선생님이 된 루씨쏜이 운영하는 카페 겸 갤러리이자 민화를 배우고 작업하는 공간이다. 나로 하여금민화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한그림 <욕망의 숲>을 처음 만났던 인연의 장소이며,이제는 나의 꿈도 함께 자라나고 있는 곳이다.
나는 한지에 먹선을 뜨고 물감으로 색을 입히다가 뒷목이 살짝 뻐근해지면,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본다.화실 건너편 소천지로 들어서는 숲길 입구엔 우람한 해송들이 군락을이루며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서쪽 푸른 바다는 문섬과 범섬을 배경으로 제주 햇살이 선사한 윤슬을한 아름 품고 있다. 이토록 완벽한 풍경 속에서 그림을 배우고 있는 나의 가슴은 매번 행복으로 벅차오른다.이런 멋진 화실이 서귀포 집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축복을 받은 것인데, 실력 있는 선생님의 지도까지 받을 수 있다니 행운이 내게 덩굴째 굴러온 것이리라.민화를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은 내가 새삼 대견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