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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an 15. 2022

먹선 긋기

마음을 느긋이 비우는 시간



례행사로 연말연초를 서울 집에서 보내게 되었다. 서울에 올 때마다 매번 마음 제주에 두고 오니, 이런저런 일로 체류 기간이 길어지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온이 좀 오른다고 지난주처럼 미세먼지가 하늘을 뒤덮어 북한산마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면, 답답함은 극에 달하게 된다.


서울에선 그림을 그리기 쉽지 않다. 민화는 더더욱 어렵다. 화구가 모두 제주 집에 있기 때문이다.  애완견 호두까지 곁에 있으니 가족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한가로이 그림에 집중하기가 힘들. 하지만 이건 모두 핑계일 뿐, 나는 다시 마음을 다잡 본다.


서울서도 민화를 그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궁리를 하다가 묘안을 찾았다. 바로 먹선 긋기 연습이다. 먹물과 세붓만 있으면 되니 간단하다. 채색에 필요한 여러 도구가 없어도 되고, 신문지를 활용하니까 한지도 굳이 필요 없다. 먹선 긋기는 민화 기초 중의 기초가 아닌가. 민화 수업 첫날 나는 선 긋기를 한 시간 정도 연습하고 나서 바로 호작도(까치와 호랑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든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법인데, 기초가 부족해도 한참이나 부족한 것이다. 제주서는 진도 나가느라 선 긋기 연습할 시간었는데, 서울서는 시간이 남아도니 참으로 잘 된 일이다.




요즘 아침에 일어나면 먹선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하지만 나는 집안을 정리하며 청소부터 한다. 관까지 걸레질을 하고 변을 정돈해서 마음이 개운해져만, 내 할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습성 때문이다. 다시 오전 일상의 시그널이 되어 버린 모닝커피 마신 후 식탁에 앉는다. 연말에 오래 정들었던 4인 식탁을 당근 마켓에서 나눔 하고, 케아의 6인 식탁으로 교체했더니 품이 한결 넉넉하다. 이제 식탁은  차지가 되었다.


하얀 식탁 위에 하얀 담요를 고 남편이 방금 읽고 접어 놓은 따끈따끈한 신문 다. 왕이면 림보다는 글자가 가득한 면을 고른다. 신문의 활자를 따라 선을 그으면 훨씬 편하기 때문이다. 음악도 준비한다. 가능하면 명상음악이나 자연의 소리, 이루마의 피아노 연주처럼 잔잔한 것으로. 가끔은 책을 읽어주는 유튜브를 틀기도 한다. 오디오가 준비되면 하얀 접시에 먹물을 따르고 물을 섞은 후 세붓에 묻히고 숨을 고른다.


선을 긋는 일은 아주 단순한 작업이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지만, 막상 그려보면 만만하지 않는 걸 깨닫게 된다. 을 긋는 도중에 숨을 쉬게 되면 손이 흔들리기 십상이다. 내공이 필요하다. 선을 긋기 전에 숨을 크게 들이쉬고 한 번에 죽 내달려야 한다. 을 그을 때마다 마음을 집중해서 심호흡을 하, 선이 종점에 닿  내쉬어야 한다. 렇게 윗선과 간격을 맞추 아랫선을 고르게 그었을 , 작은 기쁨이 솟아난다.


신문 한 면 가득 가로선을 다 긋고 나면 이번엔 세로에 도전한다. 로선은 가로선보다 난이도가 높다. 처음부터 부들부들 손이 떨다. 할 수 없이 마음속으로 나는 할 수 있다주문을 외워본다. 그리 붓을 쥔 손과 손목을 함께 아래로 서서히 움직인다. 온 마음을 선에 집중해야 한다. 잠시 딴생각을 하면 금세 손도 따라 흔들린다. 눈도 잠깐 옆선을 보는 사이 선이 또 삐뚤어진다.


삐뚤빼뚤 흔들린 선을 보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매번 과 함께 눈과 생각 하나로 모아야 한다. 그렇게 한 줄 한 줄 세로선이 쌓이면 신문 한 면 가득 가로선과 만 격자무늬가 완성된다. 시간은 어느새 두세 시간이 훌쩍 지나 있다. 목과 어깨 뻐근진다. 지만 생각이 끊긴 자리엔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까지 워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마치 명상을 한 것처럼  충만해진다.




처음  긋기를 시작할 땐, 이 나 손목을 종이에 붙이소심하게 붓을 잡은 손만 움직이며 선을 그었다. 그러자 오른쪽과 아래쪽으로 손의 방향을 진행할수록 붓이 누우면서 선의 굵기가 두꺼워졌다. 계속 연습하자 자신이 조금씩 다. 감하손목도 함께 움직일 수 있게 되면서 선의 굵기라서 고르게 그어졌다. 조선의 명필가 한석봉의 어머니는 밤에 호롱불을 끄고도 떡을 고르게 썰어 실력이 부족한 자식 훈했다던데, 그런 득도의 경지얼마나 많은 연습이 필요한 것일까?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모든 길은 한 걸음부터 시작된다. <딱 한걸음의 힘>이라는 책에서 저자 미리암 융계는 "세상 모든 일은 첫걸음으로 시작되고, 그 걸음은 우리 생각보다 크지 않다."라고 말하였다. 래서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티끌 같은 일상의 작은 습관이 하루하루 쌓여 태산처럼 큰 일을 이룬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나는 신문지 한 면을 먹선으로 가득 채울 때마다 빨간색 펜으로 번호를 매겨 보았다. 그 어느덧 30장을 넘지난 종이를 들춰보,  날이 갈수록 선이 달라지는 걸 또렷이 느낄 수 있다. ①번은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선이 삐뚤거리는데, 점점 가지런해지는 게 보다. 켜켜이 쌓이는 연습 시간만큼 금씩 실력이 늘고 있는 걸 알겠더라. 어쨌든 하겠다고 칼을 뽑 들었으니, 이제는 칼이 녹슬지 않게 꾸준히 휘두르는 사람으거듭겠다고 다짐해본다.



먹선으로 채워가는 나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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