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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Apr 03. 2022

책가도

민화 초급반의 깔딱 고개



결국 시간은 간다.  민화의 시계도 째깍째깍 흘러서 나는 드디어 초급반의 마지막 단계에 도달하였다. 아무리 천천히 걸을지라도 걸음을 멈추지만 않는다면 언젠가는 그 길의 끝에 다다르기 마련이다. 으로 어야 할 길 너무나 까마득에, 멀리 내다보 조급해하  한숨을 쉬는 대신 그저 한 걸음만 챙기려 노력하였다. 자꾸 끝을 헤아리 욕심을 내다보면 쉽게 친다는 것을 살면서 터득했기 때문이다.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 비록  길이었지만 회가 새다. 그때는 시작이 많이 늦었다고 걱정는데, 역시 늦었다고 생각 때가 가장 빠르 피부에 와닿는다. 


초급반의 마지막 작품은 이름하여 책가도, 우리말로는 책거리라고도 한다. 책을 비롯한 도자기, 문방구, 향로, 청동기 등이 책가 안에 놓인 그림이다. 18세기 후반 책을 통해 문치(文治)를 하려는 정조의 구상에 의해 화원이 제작한 것이 시초일 것으로 추정된. 책가도는 책을 유난히 사랑하던 정조가 가장 좋아하던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즘은 서양에서도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어째 별로 마음이 가질 않았다. 아마도 그림은 자연 풍경을 담는 것을 제일로 쳐 오던 습성 때문일 것이다.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서재 풍경을 그린다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도저히 이해가 되질 않았다. 더구나 나의 사랑 연화도를 이제 막 끝낸 직후였다.

 

하지만 어쩌랴. 책가도는 민화에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통과의례와도 같은 작품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 그림으로라도 소장하고픈 조상들의 열망을 헤아리니, 그나마 그림을 시작하기가 조금은 수월해졌다. 나는 선생님이 제시한 도안 중에 하나를 골라야 했다. 그러나 그림에 대한 부담이 다 보니 별로 탐탁지 않은 마음으로 대충 른 것이 화근이었다. 그리는 내내 다른 수강생이 고른 도안에 마음이 끌렸다. 과 부채, 꽃무늬가 그려진 주전자에 마음을 뺏긴 것이다. 이래저래 이렇게 어설프게 시작한 이 과정이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당신이라면 어느 걸 고르시겠어요?


책가도는 본을 뜨는데 긴 자가 필요했다. 그림에 직선이 많아서 길게 홈이 패인 50cm 자에 쇠봉을 끼어 세붓과 함께 잡고 선을 그어야 했다. 그렇게 하면 자와 붓의 간격이 생겨 먹물이 자 밑으로 흘러들어 종이가 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우리 조상님들은 감탄스럽게도 으로 별 걸 다 고안해서 그림을 그렸다. 나는 연습지에 자로 몇 번 직선 연습을 하고 나서 마음을 가다듬은 후 선을 그어 내려갔다. 그림을 그린다기보다는 설계도를 그리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암튼 뭔가 새롭긴 했는데 도안이 세밀해서 애를 먹었다. 요즘 들어 시력이  나빠졌기 때문이다.  모란도와 연화도를 그릴 때만 해도 맨 눈으로 그리는 게 수월했는데, 요즘은 어른거려서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다. 돋보기로 교정을 다시 했지만 시원찮다. 원인은 아마도 스마트폰이겠지. 하지만 그림도 무시할 순 없을 것이다. 오랜 시간 가까운 물체만 바라보며 눈을 혹사시킨 이다.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나빠질까 봐 걱정이 되었다.


 눈이 좋아진다는 유튜브 동영상을 보며 눈 운동을 시작했다. 서울에 갈 때마다 주기적으로 안과에 들러 각종 검사를 , 황반 변성을 막아준다는 루테인 다시 챙겨 먹 시작했다. 최근에는 휴롬을 구입하여 당근즙을 집에서 만들어  마시고, 눈에 그렇게 좋다 메리골드 꽃 차 아침저녁으로 끓여서 마시고 있다. 하지만 눈을 안 쓰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림을 멈추고 싶지 않은데 어쩌. 모네는 말년에 거의 장님이 되어가면서도 그림을 그렸다. 야외에서 강한 햇빛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느라 백내장이 심해졌던 것이다. 눈이 침침해져 그림을 그리기 힘든 상황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 요즘은 의학이 발달하여 백내장은 물론 근시든 원시든 수술로 시력을 복원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책가도 진행 과정


책가도를 그리는 동안  실수를 했다. 그중 하나 면을 칠하는 과정에서 물감이 번져나가 애를 먹었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물감 농도를 조절하고 안쪽부터 칠한 후 마르길 기다려 경계 부분을 칠니 번짐이 멈췄다. 민화를 배우면서 앞서간 스승의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매번 실감한다.  색을 칠할 때는 좀 더 신중해야 했다. 먼저 칠한 색이 맘에 들지 않아 덧칠을 하면 색이 두껍고 진해져 본이 보이 않았다. 이것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가장 큰 실수는 색칠을 하다가 을 손에서 놓쳐 그림 여기저기 물감묻혀놓은 것이다. 돌리며 고쳐 잡다가 종이 위에 떨어뜨려 얼룩만들었다. 붓을 잡고 돌릴 때 집중하지 않아 손 힘이 빠진 탓이다. 두세 번 같은 실수가 반복되자 거의 그림을 망친 것 같이 지저분해졌다. 엉 울고 싶었다. 바림붓에 물을 묻혀 닦지만 원래대로 깨끗하게 돌려놓을 순 없었다. 더구나 먹물은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종이를 오려 붙이고 싶을 정도였다. 거의 완성된 그림을 한 번의 실수로 버려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아찔해졌다.


결국 은 정신집중이었다. 나는 이후로 붓을 돌릴 때마다 의으로 손에 힘을 꽉 주거나 그림과 떨어진 곳에서 돌리곤 했다. 그림 위에 여분지를 덮고 색하기도 했다. 다행히 같은 실수가 발생하지 않았다. 한 번일지라도 실수는 지울 수 없다. 다만 실수를 통해 배울 뿐이다.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안타까워하시며 처방을 내려주셨다. 나의 그림이 현대적인 느낌이 많난다며 바탕을 칠해도 좋겠다고 조언하셨다. 아, 나의 오점을 가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리오! 스승은 가장 암담한 순간에 답을 던져 주는 구세다.


가만 보니 책가도는 민화 초급반의 깔딱 고개가 틀림없다. 제주시에서 3년 한 넘어 민화를 배우러 오는 선배 이 단계에서 수강생많이 포기한다고 귀띔해 주었다. 진도는 더디고 눈도 아프고 실수까지 연발하다 보니, 그림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도 이쯤에서 손을 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림을 완성하고 보니 꽃을 그릴 때와는 사뭇 다른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 같았다.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깔딱 고개를 하나 넘으니 한 단계 성장한 느낌이 든다. 이제 내 앞엔 중급반 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나는 또 묵묵히 가련다. 그냥 한 걸음씩.


완성된 책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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