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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04. 2022

민화 중급반, 화조도

암컷의 변신은 무죄



수업의 난이도가 갑자기 높아졌다.

초급반의 마지막 과정이었던 책가도를 깔딱 고개 넘듯이 어렵사리 끝내, 곧바로 중급반의 첫 작품을 선택해야 했다. 도안이 한층 세밀해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본 중에서 인쇄가 또렷한 두  집어 들었다. 하나는 화조도요, 다른 하나는 화접도였다. 택을 위해 잠시 망설이는 동안, 나비 떼가 현란하게 날아오르는 화접도 마음을 아당겼다. 그러나 곧 아침 산책길 정모시 공원에서 늘 만나는 오리 한 쌍이 려져 있는 화조도로 마음이 .


신혼 초 는 침대 머리맡에 목각으로 만든 오리 한 쌍을 두고 살았다. 마도 사이가 좋다고 알려진 원앙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샀는지 아니면 누가 선물로 준 건지도 까마득하지만, 나는 오리 우리 부부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한동안 여행을 다니며 오리 인형을 컬렉션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어디로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면서 남편과 서로 무심해지고 관계가 느슨해지면서, 덩달아 오리도 관심에서 멀어지게 된 것이리라.


어느 날 신문에서 원앙이 해로하는 새가 아니라는 기사를 보 되었다. 허탈한 기분이 들었다. 감쪽 같이 속았다는 생각에 괘씸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진리를 배우고 나선, 모든 관계의 변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표현대로, 비록 순간일지라도 서로에게 100%의 존재로 몰입할 수 있었다면 그걸로 족한 것이다. 경리 작가는 인간을 표류도라고 표현하였다. 우리는 각자의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떠다니다가 잠시 다른 섬(인간)을 만나 가까이 존재하지만, 언젠가는 다시 홀로 표류하게 되는 섬인 것이다.


오늘 아침 정모시 공원 산책에서 한동안 보이지 않던 오리 떼를 만났다. 한국에서 청둥오리 본래 겨울철새였으나, 현재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텃새화 되었다고 한다. 유심히 살펴 한 마리만 수컷이었다. 의아했지만 쌍쌍이 아니면 또 어떤가 싶었다. 요즘은 오리도 인간의 세태를 닮고 있는가 싶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결혼도 비혼도  선택이요, 홀로 살든 친구들과 셰어 하며 어울려 살든, 다양성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서로의 인연이 다할 때까지 함께 사이좋게 어울리면 그만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림은 그림이다. 내가 아직도 선입견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미학적인 관점에선 오리가 쌍을 이루며 유유히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보기가 좋다. 사랑의 감정이 전해지는 달콤한 분위기가 그림을 한층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이다. 나는 화조도의 본을 받아 들고, 잠시 시간 여행을 하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러다  년에 선뜻 민화 한 점 사준 남편에게 이번에는 내가 그린 그림을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긴 남편 방엔 책가도를 거는 게 더 어울릴 텐데, 화조도는 어차피 안방에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화조도 원본




민화의 중급 과정은 먹선을 뜰 때부터 달랐다. 초급은 먹물을 한 가지 농도로 만들어 그렸는데, 중급은 세 가지 농도를 준비해야 했다. 선생님은 사물의 크기와 중요도에 따라 먹선의 굵기와 농도를 다르게 표현하라고 주문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림을 쏘아보다가 바위는 굵고 진하게, 오리나뭇가지는 중간 선과 중간 농도로, 꽃과 새는 가늘고 연한 선으로 그려야겠다고 생각하며 붓을 집어 들었다. 


그런데 아뿔싸 나의 실수가 다시 시작되었다. 순지에 먹선을 뜨다가 힘없이 손이 풀리면서 붓을 놓치 말았다. 하얀 여백에 먹물이 묻었으니  흠이 너무 또렷해서 순지를 새로 갈아야 할 판이다. 하긴 밑그림이 너무 세밀해서 오랜만에 그리느라 많이 펐는데, 오히려 잘 된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면서 다시 차분하게 그려나갔다. 조금 자신이 생다. 가늘고 연한 매화와 잎 시작 마지막 바위를 힘주어 굵게 그려냈다.


좋아요


선생님께서는 내 그림을 보고 먹선이 깔끔하다고 칭찬하셨다. 선생님은 수강생을 개인 지도하면서 가끔씩 마음에 드실 때는 좋아요,라고 말씀하신다.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칭찬의 말에 긴장했던 마음순식간에 말랑거다. 채색을 시작하면서는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에 의지가 불타올랐다. 호분(흰색)과 황토로 밑 색을 칠하고, 그 위에 본 색을 입혀나갔다.


중급에서는 튜브 물감 대신에 분채를 사용다. 작은 유리병에 담긴 색색의 분채는 흙을 이용해 분말을 만들 색을 입힌 물감이다. 작은 접시에 덜어서 아교를 넣고 으깬 후, 다시 덜어서 물을 섞어 칠한다. 바위에 밑 색을 하면서 황토를 써보니까 튜브 물감보다 분채의 색감이 훨씬 다. 그림의 단계가 올라갈수록 편리한 물감을 뒤로하고, 분채나 석채 봉채 등을 사용하며 굳이 시간과 공을 들이는 이유를  것 다.


 나무와 새까지 칠하고 나자 드디어 오리 차례가 돌아왔다. 오리는 화조도의 주인공이다. 그림에는 매화나무 가지에 참새 한 쌍이 앉아 있지만 조연일 뿐이고, 꽃과 바위는 모배경으로 밀려난. 런데 도안 속의 오리는 암수 구별이 없어서 심심했다.  되겠. 청둥오리신을 시켜야겠. 나는 수컷 군청과 청록, 대자(고동색)를 사용해 그런대로 실물처럼 그리고 나서 한숨을 돌렸다. 그런데 암컷을 칠하려니 뭔가 답답한 생각이 들었다.  암컷의 미모는 언제나 수컷보다 열등 것인가.  도발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렸다. 아무렴, 내 그림이 아닌가? 


암컷의 변신은 무죄다


나는 암컷 오리가 사랑하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었다. 핑크가 어울릴 것 같았다.  그림 속 오리는 평소엔 갈색의 무표정한 암컷이지만, 사랑을 할 때큼은 깃털의 색이 변하는 오리인 것이다. 갈색에서 핑크로 변해가는 순간, 그 진행 과정에서 자줏빛 깃털이 탄생했다. 하얀 얼굴은 조금씩 발그스레 핑크 빛으로 물들어다. 암컷 오리를 칠하는 동안 나는 감정이 이입되며 가슴이 으로 물들었다. 뇌세포에 통쾌한 전율이 다. 나의 정신은 알을 깨고 나와 그림이라는 덩굴을 타고 오르해방되었다. 


사랑을 나누는 오리 한 쌍


그림은 여행을 닮았다.

우리행을 할 때, 쩌다 하게 되는 실수는 처음의 야심 찬 계획을 마구 흔들어 놓는다. 낯선 세상에서 계획이 틀어면, 눈앞이 깜깜해지 낭패감으로 좌절하 된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는 경우도 많다. 뜻밖의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플랜 B로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되어 더 만족할 수도 있으며, 최소한 잊지 못할 추억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획대로 진행되는 여행이 과연 훌륭한 여행일까?


그림도 실수가 그 여정을 바꿔 놓는다.

실수는 아직 초보자라는 사실을 반증하지만, 이젠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는 대신 묘안을 궁리하는 여유가 생겼다. 원래 여백이었던 화조도의 배경도 실수 때 채색을 하게 되었다. 오리 노니는 물은 오리를 칠하는 과정에서 감이 번져 주변이 지저분해졌고, 이를 기 위해 게 되었다. 나는 돈내코의 원앙폭포를 떠올리며 에메랄드 빛 물색을 만들어 아주 연하게 칠했다. 그러나 초보의 붓질로 얼이 생 이 감추려 다시 한번 칠했다가, 색이 너무 진해지 실수를 또 하게 다.


선생님과 상의 끝에 그림의 전체적인 조화를 위해서 하늘도 칠해 결론이 났다. 그러나 하늘을 파랗게 칠하려니 선뜻 손이 움직이질 않았다. 물색에 이어 하늘까지 온통 푸른색 투성이 그림 너무 지루하 않겠는가. 나는 오렌지 컬러 꺼내 들었다. 랑을 섞고 물을 많이 넣어서 대한 연하게 였다. 다행히 무거웠던 느낌  덜어다. 끝으로 이왕지사 하늘을 오렌지로 물들였으니, 좀 더 과감하게 붉은색을 가미하여 바림으로 노을 표현하였다.


 화조도는 드디어 종착역에 도착했다. 실수가 없었다면 결코 다다르지 못했을 목적지에 도달 것이다. 늘이 온통 오렌지 빛으로 물든 황혼 녘, 오리 한 쌍이 사랑을 노래하는 그림 완성되었다. 인간은 실수를 딛고 성장한다. 나의 그림도 실수를 통해 더 많은 걸 배워나가고 있다. 렇다고 실수를 미화고 싶지는 않다. 수를 남발하는 우를 범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어쩔 수 없는 실수로 가던 길을  기하 말며, 그저 실수의 문턱을 가볍게 넘는 재치와 용기를 양손에 고, 나는 내일꾸준히 한 발을 내디디리라 다짐해본다.


완성된 화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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