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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19. 2022

전각, 나를 마중하는 길

민화 중급반 과정



지난주 내내 나는 돌과 씨름을 했다.  

민화 수업에서 전각을 배우면서 일어난 일이다. 전각은 일종의 인장(도장)을 제작하는 예술이다. 민화나 서예 작품에는 작가를 증명하는 낙관을 찍는데, 바로 이 낙관을 만드는 행위가 전각인 것이다. 본래 낙관은 그림이나 글을 짓고 난 뒤에 여백이나 귀퉁이에 쓰는 글씨와 도장을 총칭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도장을 찍는 의미만 강하게 남았다. 그동안 낙관이 찍힌 작품을 보면서 저히 넘사벽을 느끼곤 했었는데, 이제 나도 낙관을 갖게 다니!


 전각 수업을 받기 전에 미리 예습을 다.

글씨체를 찾아보고 이름자로 도안도 여러 개 구상해 보았다. 보통 성명인은 음각으로 새기고 호는 양각으로 새긴다고 다. 개인 도장은 주로 음각을 많이 썼으나, 간간이 양각과 음각을 섞어 쓴 것들도 있었다. 나는 두 가지 방법을 연습하고 싶어서 성은 양각으로 이름은 음각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예습은 수업의 이해도를 높이고 진도를 이끌었다.


돌을 새기는 일은 난생처음이었다.

초등시절 고무판화를 파본 이래 조각은 처음이다. 하지만 천리길도 한걸음부터다. 나는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서 먼저 돌의 표면을 거친 사포로 간 후 다시 고운 사포로 다듬었다. 낙관을 새길 돌에 주먹(주황색 먹)을 칠한 후, 먹물을 묻힌 세필붓으디자인된 글씨를 그려 넣었다. 이제 먹색 부분 칼로 도려내면 주먹 색 부분이 남아 인주가 찍히는 것이다. 이처럼 먼저 글자를 쓴 후 새기기 때문에 전각이라도 있다.


왼손 엄지로 칼을 받치며 오른손 장지에 힘을 주어 칼을 밀었다. 조심스럽게 밀어도 힘이 넘치면 아차 하는 순간에 칼이 밖으로 밀려난다. 흠을 없애려 사포질을 하면 다시 칼질을 해야 된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기본적이면서도 중요한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종이에 그린 도안을 돌에 옮겨 그릴 때, 먼저 그림의 좌우를 바꿔야 하는 일이다. 예전에는 거울을 이용했다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의 카메라 기능을 활용하면 된다. 나는 이 과정을 깜빡하고 진행했다가 좌우가 바뀐 도장을 . 짙게 음각된 이름을 작은 돌에 새기다가 내 가슴을 쫀 것처럼 쓰라린 경험이었다.


좌우가 바뀐 낙관


나는 전각을 하는 동안 간간이 미켈란젤로를 떠올렸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피에타를 마주했을 때, 감동으로 벅차오르던 순간과 함께. 단지 25살의 나이에 자식을 잃은 어미의 비통한 슬픔을 저토록 섬세하고도 숭고하게 완벽한 구도로 표현해내다니!  대리석 안에 들어있는 형상을 끌로 찾아냈을 뿐이라고 말했다는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미켈란젤로가 대리석에서 피에타를 꺼냈듯이, 나는 천재의 마음닮으 노력하였다.


작고 차가운 안에는 나의 소중한 이름과 함께 내가 좋아하는 필체와 내가 꿈꾸는 세상이 고이 담겨 있었다. 조각도를 타고 단단한 돌의 껍질을 헤치고 들어가며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처음이라 그런지 더디고 어설프고 실수투성이였다. 하지만 박제된 나를 꺼내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은 충분히 설레고 뿌듯하고 의미있고도 행복한 시간이었. 전각은 나를 기쁘게 마중하는 길이었다.


나는 어릴 적 이름을 작가명으로 쓰고 있다. 아버지께서 성명학을 공부하시고 오랜 날 고심 끝에 사랑으 만들어주신 이름이다. 그러나 나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할아버지께서 호적에 올리신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때 맞닥뜨린 낯선 세상은 나를 잃고 방황하던 황량한 오지기억된다. 나는 첫 번째 각을 하며 기억 속에 홀로 남겨진 내면 아이를 만나 끌어안았다. 아이는 팔을 벌렸, 나는 이름과도 기쁘게 해후하였다.


작은 낙관에는 내 취향의 영문 이름을 그려보았다.  성의 이니셜인 Y를 와인잔으로 그리고, 휘파람새가 날아와 앉아 쉬고 있는 모습이다. 잔에는 와인 대신 물을 담아 매일 아침 나를 위해 노래하 새의 마른 목을 축여주고 싶었다. 원래 연습용이었던  손이 근질거려서 그냥  없었다. 연습한 흔적을 사포로 갈아 대충 지우고, 이름자로 내가 꿈꾸는 세상을 디자인했. 서귀포 바다 위로 태양이 힘차게 떠오르고 새가 퍼드 날아오르자, 음각으로 새긴 이름에 붉은 새살이 돋아나왔다.


완성된 세 개의 낙관 옆면에는 그림 새겨 넣었다. 튤립과 청나비로 봄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고, 몬스테라 잎과 달과 별을 그리며 자연을 향한 애모의 마음을 보탰다. 섶섬 위에는 보름달을 떠올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을 낭만으로 채웠다. 고차원의 전각 예술은 고아한 운치를 감상할 수 있는 맛을 불러일으킨다. 초보의 전각은 한없이 서툴고 소박할 뿐이다. 하지만 그럴듯하게 찍어낸 기계 도장엔 없는 애정가득 담겨있다.  나에겐 둘도 없는 분신같이 소중한 낙관들이다.


결국 나의 오른손 장지에는 굳은살이 배기고 물집까지 잡혔다. 마치 훈장처럼...


완성된 세 개의 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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