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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l 04. 2020

꿈꾸는 나의 설계 노트

작을수록 커지는 행복



백세시대 인생에서 쉰 살은 삶이 전환되는 나이다.


인도에서는 50세를 '숲으로 들어가는 나이'라고 말한다. 사회와 가정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을 찾아가는 나이'라는 뜻이다. 나는 나이가 50을 넘자 퍼뜩 인생이 너무 짧게 느껴졌고, 도시 사막의 거친 모래 바람을 피해 '나의 숲'을 찾아 쉬고 싶었다. 더 늦기 전에 내가 원하는 삶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야겠다는 일념으로, 30년의 세월을 바친 직장에 명퇴서를 제출하였고, 늘 꿈꾸던 제주도에서 인생 2막을 시작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대망의 2014년, 

그때는 하필 전국을 휩쓸던 제주이민의 열풍과 중국 거대 자본의 유입으로 제주도에 부동산 광풍이 몰아치던 광란의 시대였다. 나는 그 거대한 물살에 휩쓸리면서 중간에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아우성치며 그로부터 2년간 길고도 고달픈 여정에 들게 되었다. 그러다 결국 크게 넘어졌고, 이듬해 봄이 오고 나서 겨우 추스르고 일어나 다시 꿈을 향한 항해를 시작하였다.






우리 부부는 참 많이 다르다.

특히 전원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는, 조상 대대로 서울 토박이인 남편은 욕구가 전혀 없는 반면에 나는 타샤 튜더가 인생의 롤모델이었으,  편차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 전원생활이라면 나는 언제나 발벗고 나섰고, 남편은 끝까지 소극적인 자세를 견지하며 마지못해 나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먼저 서귀포 시내에 작은 둥지를 틀고, 천천히 시골집을 사서 고쳐 보기로 하였다.

이런 일이 너무나 귀찮은 남편은  모든 나에게 미루었지만, 아랑곳하지 않는 나는 돌집이나 과수원 창고를 사서 뜯어고칠 생각에 마냥 신이 났다. 날마다 새벽까지 인터넷을 뒤졌고, 아침이면 부동산에 전화해 지번을 받아 들고는 혼자서 씩씩하게 새로운 동네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한여름의 열기와 뒤범벅된 제주 부동산에 불어닥친 싹쓸바람으로 돈을 다발로 싸들고 몰려드는 매수인들 때문에 맘에 드는 집은 바로바로 팔려 나갔고, 초가을이 되자 남아 있던 매물도 순식간에 동이 나고 말았다. 마음이 다급해진 나는 오기가 발동했다.


"차라리 내 집을 짓고야 말겠어."


한창 솟구치던 의욕의 정점에서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나는 무모하게도 다들 뜯어말리는 제주 집 짓기에 동참하기로 결심하고, 호기롭게 주변에 선포하였다.






집 대신 땅을 찾아 제주도 순례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집이 없는 땅은 너무나 어려웠다. 토지용도부터 알아야 했고, 맹지나 축사 근처는 절대로 피해야 했으며, 지하수 개발을 할 수 없는 제주도에서는 반드시 상수도관이 지나가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게다가 연일 땅값은 가파르게 올라갔고, 맘에 드는 땅은 다시 거둬지거나 눈앞에서 남에게 빼앗기길 반복했다. 그때는 다들 그러해서 게서 도망가는 땅을 붙잡으러 미친 듯이 뛰어다니느라 몸과 마음이 끝없이 지쳐 갔다.


"널려 있는 게 땅인데 굳이 소유해야만 해?"

"글쎄.... 하지만,,,,  나는 정말이지 진정으로 나만의 정원을 가꾸고 싶은 걸."


을 보러 나갔다가 허탕을 치고 돌아올 때면, 나는 자신에게 수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아무리 자신을 타일러도 결론은 똑같았다. 하루라도 빨리 아파트를 벗어나 마당과 텃밭이 딸린 시골집에서 살고 싶은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나는 매일 시야를 가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다. 제주 서쪽의 한림에서 시작해 애월과 조천을 거친 후, 날이 추워지면서 따뜻한 남쪽 서귀포로 넘어와 남원과 표선을 거쳐 성산으로까지 영역을 넓혀 갔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도록 땅과 인연이 닿지를 않았다.

마지막으로 성산 쪽을 보러 가기로 했는데, 제주도 오지에 해당하는 중산간 마을 난산리는 너무 멀었다. 그냥 포기할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그날따라 하늘이 유난히 예뻐서 여행 삼아 길을 나섰다. 아무런 기대 없이 마주한 땅은 뜻밖에도 늦가을의 따사로운 햇살 아래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고즈넉한 평화로움을 가득 안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맨 것이 바로 이런 평화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순간 스쳐 지나갔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서쪽으로 멀리 한라산이 보였고, 동쪽으로는 파랗게 먼바다도 보였다.


아, 드디어 내가 찾던  운명의 땅을 만난 것이다.



너는 내 운명, 난산리 땅



집 짓다가 10년 늙는다, 라는 말이 있다.

가뜩이나 느린 섬 제주에서 건축의 풍이 불던 그 당시의 집 짓기는 10년의 노화가 아니라 어쩌면 목숨과 바꾸어야 할지도 모르는 거대한 산이었다. 제주라는 느린 섬에서 시간과의 싸움은 길고도 지난했다. 설계를 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고, 건축허가를 받는 데도 6개월이 걸렸다. 달력은 벌써 한 해를 건너뛰었고, 측량 성토는 다음 해로 미뤄졌다. 나는 기다림 속에서 지루함을 견디는 나만방법을 터득하였다. 서점과 도서관을 뒤지며 닥치는 대로 건축 도서를 찾아 읽었고, 집짓기 카페를 들락거리며 새롭게 알게 된 정보나 건축용어노트에 깨알같이 메모를 하였다.


한편으론 살고 싶은 집을 공상하며 노트에 끄적이고 그리며 시간을 보냈다. 

파트에 살며 찍어낸 공간에만 익숙하다가 꿈이 담긴 낯선 공간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이토록 재밌는 줄은 미처 몰랐다. 노트와 자,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누워 있다가도 불현듯 일어나 앉아 고, 맘에 들지 않으면 지우개로 지우고 다시 또 . 평면을 그리다가 입면이 궁금하면 집을 일으켜 세웠, 혹여 궁금해지면 색연필로 마당초록을 입다. 그러면 공간이 마술처럼 살아났고, 나는 어느새 소꿉놀이하는 여자애처럼 뒷짐 지고  안을 거닐곤 하였다. 


 년 열두 달, 하루하루 나의 설계 노트엔 전원생활의 꿈 차곡차곡 쌓여갔다.


제가 살고 싶은 집은요,

하며 설계사와 몇 번의 이메일을 주고받은 후에 우리 집 설계도를 처음으로 받아 든 날은 날아갈 듯 너무너무 기쁜 나머지, 당장 박스와 스티로폼을 구해다가 앉은자리에서 뚝딱 집을 두 채나 만들기도 하였다.



꿈이 담긴 설계노트와 내가 만든 집



이렇게 기다림은 느린 시간 속에서 그나마 견딜 만했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고대하던 첫 삽 시공을 앞두고 날아온 견적서가 처음 예상보다 2배로 늘어나 있다. 이건 뭐, 한 마디로 집을 지을 수 없다는 선고였다. 사방팔방 다른 건축사무실을 수소문했지만, 다들 너무 바빴다. 설상가상으로 성토를 관리하던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고 쓰러져 입원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청천벽력같이 하늘이 무너져 내리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총 맞은 것처럼 구멍 난 가슴으로 꿈이 흐르고 또 흘러넘쳤다.


나는 겨우내 어두운 터널 속으로 파고들었다.

남편은 다행히 건강을 되찾았지만, 나는 꿈이 산산 조각나는 두려움으로 크게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어둠 속에서 조금씩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꿈보다 더 큰 꿈에 대한 집착이 보이기 시작했다. 시공비가 두 배로 불어나기까지 나도 모르게 부풀려진 욕망과 탐욕, 더께가 낀 체면과 허영이 허울 좋게 꿈으로 포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염원이었집 짓기의 실패는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그토록 힘들게 만든 완벽주의와 욕심을 하나 둘 벗겨내었다.


그러자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갈망하던 집은 어느새 사라지고 덩그러니 당만 남았다. 게 전원생활의 본질은 마당인 셈이었다.






새 봄이 왔다.

 마음속에도 아지랑이가 꿈틀거렸다. 나는 다시 꾸고 싶었다. 타샤 튜더처럼 아흔이 넘은 나이에도 손에 흙을 묻히며 사시사철 꽃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면, 츠바타 슈이치 부부처럼 건강한 키친 정원을 가꿀 수만 있다면, 나는 다시 일어나 행복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집이 없으면 어떠랴.

나는 난산리 땅에 나만의 비밀 정원라도 가꾸고 싶어졌다. 부지런히 서귀포와 난산리를 오가며 한라봉과 각종 과일, 꽃나무를 심고 해마다 수국을 삽목 하여 꽃을 피워냈다. 나는 흙을 만지면 잡다한 잡념이 사라졌고, 마음은 고요히 평화 속에 머물게 되었다. 정원을 손수 만들었다는 헤세처럼 나에게도 ‘영혼의 평화를 지키는 장소’가 생긴 것이 너무나 감사했다. 남편도 귀촌 교육을 받은 후, 텃밭에 조금씩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노동은 어느덧 놀이가 되었고, 언젠가는 숲이 우거질 거라는 희망으로 오름도 올레길도 잊고 땀을 흘렸다.


나는 작은 농부가 되어 에너지 제로의 삶을 실현해보기로 하였다.

로의 오두막보다도 작은 컨테이너를 들이고, 마당엔 태양광을 이용해 솔라 등을 켜고, 화장실은 순환식으로 만들어 모아서 거름으로 다. 맑은 날엔 모닥불을 피우고 캠핑을 하며 별을 헤아렸다. 그러다 밤이 깊어 한 뼘 공간에 몸을 뉘이면 궁중 대궐이 하나도 부럽지 않았다. 나는 소박하고 간소해짐으로써 오히려 전원생활의 본질에 다가서게 되는 정신적인 충만감에 나날이 고무되었다.


이제 덜 소유하고 더 풍요로운 난산리 삶을 기록하는 나의 정원 설계 노트엔 작을수록 행복해지는 꿈이 담겼.






영국에는 ‘내가 누구냐 물으면 내 정원을 보여 주겠다’는 속담이 있다고 한다.


누군가 나를 물어오면, 이제는 나도 나의 정원을 나직이 들려주고 싶다.

겨울엔 제주 수선화가 새초롬이 얼굴을 내밀고, 봄이 오면 양귀비와 샤스타데이지가 사이좋게 어우러지며 소곤대는 기쁨의 소리를. 또 6월이면 수국이 탐스럽게 마당을 수놓다가도, 한여름 뜨거운 햇살 아래 능소화가 자태를 뽐내며 흐드러지게 웃어젖히는 나의 비밀정원을...




나의 꿈이 영글어 가는 난산리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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