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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l 23. 2020

바람이 분다

제주 화가, 변시지 화백



바람이 분다.                                                                                                                

제주에는 늘상 바람이 분다.


제주 중산간 오름엔 김영갑의 바람이 불고
제주 바닷가엔 변시지 화백의 바람이 분다.

그러나 같은 제주바람이라도 느낌이 사뭇 다르다.
김영갑의 바람이 은빛 억새 물결이라면, 변시지의 바람은 온통 황토색 바다 물결이다.






요즘 서귀포는 통째로 습기에 갇혀버렸다.

연일 습도가 100까지 치솟으며 섶섬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아침에 자구리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가  순도 100% 습기로 짠 머플러가 온몸을 칭칭 휘어 감는 것으로도 모자라 악착같이 발바닥까지 파고드는 바람에 진이 다 빠져버렸다. 이런 날은 차라리 태풍이라도 왔으면 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변시지 화백(1926~2013)의 그림이 그리워졌다. 폭풍이 몰아치는 황토색 닷가로 걸어 들어가 제주의 거센 바람 앞에 서고 싶었다.


변시지 화백의 그림은 서귀포 기당미술관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기당미술관은 변시지 화백의 외사촌 형인 재일교포 사업가 강구범 선생의 기증으로 건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시립미술관이다. 삼매봉 자락 야트막한 언덕 위 서귀포 예술의 전당과 삼매봉도서관 사이에 위치한 미술관은 제주에서만 볼 수 있는 `눌’(낱가리)을 형상화한 원통 모양의 독특한 건물로 언제나 한가로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서자 기념품 샵에는 전에 보지 못하던 묵직한 화집이 눈에 띄었다. 찬찬히 들쳐보니 20대의 일본 시절과 30, 40대의 서울 시절, 그리고 50대 이후의 제주 시절까지 망라한 180여 점의 작품들이 그의 생애 순서대로 수록되어 있었다. 전시장은 천창에서 내려오는 자연채광이 실내를 아늑하게 밝다. 나는 나선형의 동선으로 이어지는 다른 작가의 작품을 뒤로 , 왼편 계단으로 성큼 올라섰다. 계단 위에 마련된 전시실에서 변시지 화백의 크고 작은 그림 25점이 나를 반겼다.


전시실 뜨겁게 작열하는 남도의 태양과 바람을 품고 있는 제주바다가 가득 펼쳐졌다. 조각배 한 척과 바람에 휘어진 소나무, 돌집과 조랑말 만나는 작품마다 어김없이 등장한다. 육지에서와 달리 제주에선 길조로 여겨지는 까마귀도 간간이 그림 속을 난다. 제주가 고향인 화백은 어린 날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일본으로 떠나며 가슴 깊이 간직해 두었던 제주의 원형들을 원 없이 토해놓았다.



                                                                   



그림 속 사내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리운 가족도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도 없다. 오로지 교감을 나누는 조랑말 한 마리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에만 매달렸다. 아열대의 태양빛을 받아 제주가 온통 누렇게 변하는 현상을 좇아가며 제주의 색을 창조하였다. 황토색 바탕에 먹색 선으로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서양의 기법 동양적인 화풍 조화를 이루며 자신만의 '제주화'를 그려나갔다.


가끔씩 그의 가슴에 바람이 다. 처음에는 파도가 일렁이고 나무가 휘청이며 바람이 몰아치다가 급기야는 거센 폭풍을 동반하며 태풍까지 덮쳐왔다. 커다란 화폭의 그림 속에서 등이 굽은 한 남자가 고개를 숙이고 회한에 차서 고뇌하는 모습으로 배회한다. 바람이 거세지자 지팡이와 조랑말에 의지한 채 간신히 버티고 있다. 그의 존재는 풍전등화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외롭다.
쓸쓸하다.
애타게 그립다.  



그의 고독은 너무도 절절하여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젊은 날 일본의 일전과 광풍 회전에서 최연소 최고상을 휩쓸며 일본 화단에 혜성같이 데뷔한 자신감은 온데간데없다. 전쟁 후 고국에서 제안한 서울대 교수직 제의로 시작된 서울생활에도 그는 안주하지 않았다. 비원파(비원에서 한옥과 고궁의 지붕과 기와의 섬세하고 소박한 곡선미에 빠져 극세밀화를 그림)를 거치며 한국화단에서 동양의 전통미를 되찾고자 하였으나, 서양화풍만을 좇는 거대한 흐름을 막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인생의 모든 화려함을 뒤로하고 자신만의 화풍을 찾아 홀로 고향 제주로 돌아온 나이가 50세, 그는 자신이 선택한 길 위의 화폭에 묵묵히 제주를 담았다. 그러나 철저하게 고립된 섬에서의 고독, 그 죽일 놈의 고독은 떨어지질 않는다. 그놈을 떨쳐내려 애를 쓰며 `그리운 바다 성산포’의 작가 이생진 시인은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을 털어 넣었다지만, 제주바람의 화가 변시지는 홀로 틀어 박혀 화폭에 붓질만 한다. 하지만 술은 아무리 마셔도 바다만 취하고, 그림은 밤을 새워 그릴수록 바람만 거세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에게 기다림과 외로움은 일상이 되고 말았다. 그리움은 뼛속까지 사무치며 껌딱지처럼 덕지덕지 온몸에 들러붙는다. 지천명, 하늘의 뜻을 알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야 할 나이 자발적 유배자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에게는 생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바람이 그토록 불었나 보다.



                                                                   

'태풍', 점점 거세지는 바람



하지만 그러한 시간들은 헛되지 않았다. 그는 2007년부터 10년간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작품 2점이 상설 전시되면서, 제주의 화가에서 일약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다. 가장 지방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 라는 말은 자고로 진리듯하다. 그는 결국 해내고 말았다. 나는 그의 작품 속에서 한 길만 고집하는 김영갑의 열정을 느끼다가도, 성산포 바다에서 절규하는 시인 이 생진의 고독을 만났고, 유배지에서의 처절한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김정희의 기개를 느꼈다. 아주 가끔은 짙은 황톳빛에서 고흐의 광기까지 감지되었다. 그에게 화풍은 형식이요, 내용은 인간의 심상이었던 것이다. 그는 토속적인 화풍 속에서 인간 본연의 내면을 꿰뚫으며 실존과 마주하였다.

                                                            

전시실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생전 그의 서홍동 화실이 옮겨왔다. 못난이 인형이 tv위에서 웃고 있었다.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인형으로 대체했던가 보다. 나는 사진 속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나지막이 이젠 평안하신가요,라고 묻고 싶어 졌다. 말년에 이르러 그는 그림에서 대상을 계속 덜어냈다. 자신의 분신이었던 사내마저 사라지고 바다와 하늘만 남은 자리에 조각배 하나를 점으로 띄워놓았다. 바다도 한결 잔잔해졌다. 자신의 작품이 흩어지는 것을 염려하여 500점의 작품을 서귀포에 기증한 그는 모든 것을 비우고 떠날 채비를 하셨던 것 같다.


최근 서귀포는 생전 그의 바람대로 예향이 되어가는 모습이다. 예술의 전당이 건립되어 시민들이 공연과 전시 문화를 즐기게 되었고, 작가의 산책길과 유토피아로에는 40여 점의 설치미술이 일상에 지친 시민을 위로한다. 각종 시비가 발길을 붙잡는 칠십리  공원과 가까운 기당미술관에서는 언제든 변시지 화백이 들려주는 바람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전시장에서 시지 화백의 바람을 흠뻑 맞고 밖으로 나오니, 삼매봉 자락을 타고 한 줌 축축한 바람이 훅하고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바람이 분다.                                                                                                                제주에는 늘상 바람이 분다.

내 마음에도 덩달아 바람이 분다.




스미소니언에 전시된 작품, 난무(좌)와 이대로 가는 길(우)
극히 단순화된 말년의 그림





































이제
평화와 안식은 찾으셨나요?










처절한 고독 속에 꽃 핀 예술혼 가득한
전시장을 선뜻 떠나지 못하고
먹먹한 가슴을 부여안고 서성대며 거닐다가 나는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거리는 여전히 언제나 그랬듯이
삼매봉 자락을 타고 한 줌의 뜨거운 바람이 훅~하고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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