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수로 꼭 20년 전의 일이다. 유럽을 다녀온 친구들이 모여서 농담 삼아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라를 하나씩 골랐다. 그러니까 어느 나라가 제일 맘에 들었냐는 질문의 다른 말이었다. 나는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프랑스를 외쳤다. 여기서 프랑스란 고작 파리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길을 걸을 때마다 발에 걸릴 정도로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센 강변에 늘어선 우아한 다리와 고풍스러운 건축물은 온통 나의 마음을 훔쳤다.그때 만난 파리는 도시 전체가 총체적인 멋과 낭만 그리고 아름다움 그 자체였기에.
그 후 서울로 돌아와 종로와 세종로를 걸을 때면, 착잡한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세계적인 도시로 거듭난 서울이 600년의 장구한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정권의 개발시대를 거치면서 과거를 모두 시멘트로 갈아엎은 모습은 가슴이 쓰릴 정도로 회한이 되었다. 고층 아파트로 도배된 한강을 지날 때는, 센강 주변의 야트막한 스카이라인을 떠올리며 통탄해마지 않았다. 성장만을 최고의 가치로 추앙하는 저급한 논리에 진저리가 났다. 파리 못지않은 관광대국의 기회를 날린 것만 같아서분하고 억울했다.
다시 파리로 떠나는 여행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저녁의 도착 시간에 맞춰 출발 시간이 두어 시간 앞당겨지긴 했다. 세계경제를 진흙탕에 처박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최단 거리인 러시아 상공을 날지 못해 비행시간이 늘어난 것이다. 유류 값도 치솟는데 주행 거리마저 늘어나서 항공료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뛰었다. 날로 환율이 상승하는 데다가 코로나도 다시 유행이라니, 이래저래 여행하기엔 부적절한 시기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짐을 꾸리고 공항을 찾았다. 다들 낯선 곳에서 그동안 코로나로 잃어버린 자신을 꼭 되찾고 오고야 말겠어!라는 단호한 발걸음이었다. 그나마 인천 국제공항은 그런대로 한산했지만, 유럽의 공항들(내가 거쳐간 파리, 바르셀로나, 마요르카, 프랑크푸르트)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인간은 끊임없이 여행을 갈망한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이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 (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한 것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러나 아직은 코로나 시대임을 감안할 때, 여행 인구는 오히려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동안 꾹꾹 눌러 가둬 둔 욕구가 참을 수 있는 인내의 게이지를 훌쩍 넘기며, 그 압력이한꺼번에 분출된 탓이리라.
비행도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국적기라 기내식도 입에 잘 맞았고, 영화도 2편이나 보았으며, 그 와중에 잠시 독서도 즐겼고, 짬짬이 잠도 자두었다. 새삼 내가 여행 체질인가 싶을 정도로 14시간의 비행이 크게 지루하지 않았다. 직항이라별 걱정은 안 했지만, 짐도 분실되는 일 없이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 관문인 호텔행은 딸아이의의견을 따라 택시로 내달렸다. 퇴근 시간이라 길이 밀린 것을 제외하면, 요금이 정액제(파리 6구역, 58€)여서 미터기에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도 없었다.
숙소는 파리가 태동한 센 강의 시테 섬 바로 앞에 위치했다. 딸아이가 그토록 소원하던 호텔에 짐을 내리고, 우리는 일몰이 시작되는 센 강변으로다시 나왔다. 일방통행의 3차선과 자전거 길이 나란히 사이좋게 달리는 도로엔 사람 눈높이의 작은 신호등이 다정하게 깜박거렸다. 인파를 헤치고 길을 건너자, 강변 따라 늘어선 키 큰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낙엽을 뚝뚝 떨어뜨리며벌써 가을을 센티멘탈하게 연출하고 있었다.
우리는 시테 섬을 연결하는 퐁네프 다리로 들어섰다. 퐁네프는 영화 <퐁네프의 연인>으로도 이미 익숙한 다리다. 노숙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라니, 가장 프랑스다운 영화가 아니었나 싶다. 퐁네프는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될 정도로 아름답다. 다리 곳곳에 반원형의 돌 벤치를 만들어 더욱 우아했다.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임에도, 축조될 당시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여 퐁(다리) 네프(새로운)라 불리며 시간의 아이러니를 품게 되었다.
제법 선선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한국보다 빠른 계절의 변화가 감지되었다. 기분 좋은 이국의 날씨였다. 다리 아래로는 유람선이 바쁘게 오갔다. 서쪽 하늘이 붉게 타오르며 강물까지 물들이기 시작하자, 센 강변의 유적에 하나 둘 조명이 켜지며 밤의 여인들처럼 그 자태가 드러났다. 이 순간은 센 강을 유람하기에 최적의 시간일 터였다. 커플로 또는 삼삼오오 강변으로 모여든 젊은이들은 강둑에 앉아 와인잔을 기울이며 일몰을 즐겼다. 파리의 낭만은 센 강에서 비롯되는 듯하였다. 숙소를 정하는 과정에서 잠시 딸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며, 센 강을 한낱 개천에 비유했던 망언을 얼른 주워 담고 싶었다. 그것이 파리에 대한 예의일것이다.
퐁네프의 서편 루브르 박물관 앞으로 철과 나무로 만든 퐁데자르(예술의 다리)가 건너다 보였다. 보행자 전용인 이 다리는 퐁네프와 함께 나의 주 산책길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센 강변을 달리는부지런한 파리지엥과 함께 파리의 아침을 여는 여행자가 되어 볼 참이다. 다리와 강변을 이어주는 계단 아래로 센 강변의 긴 산책로가 보였다. 키가 훤칠한 흰 기둥의 나무는 너무도쉽게 변하는 인간들이 변치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앞다투어 그 징표로서 파낸 문신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그럼에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의연하게 쭉쭉 가지를 뻗어나가는 모습은무척 담대해 보였다.
센 강변의 호텔과 산책로
센 강으로 어둠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았다.
날씨가 변덕스러운 파리에서 멋진 일몰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여행자의 행운이었다. 앞으로 파리에 머무는 일주일은어떤 의무감도 없이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루를 살면 될 것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도 미래에 대한 불안도 모두 내려놓고, 오로지 설레는 가슴 안고 현재의 순간에 머물며, 길 위에서 충만하게 행복으로 이끄는 여정을 즐길 것이다. 이제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고 두 눈을 감는다면, 7시간(서머타임)의 시차가 나를 새벽형 인간으로 둔갑시킬 것이 틀림없었다.
"여행이란 한마디로 ‘길 위에(on the road) 있음’이며, 때론 번거롭고 위험하기도 한 그 모든 과정이 바로 여행 그 자체다. 좋은 여행자는 단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만을 목표로 하지 않으며, 길 위에서 보낸 모든 시간을 자신의 여행으로 수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