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도 험난한 귀로

2022 유럽여행 에필로그

by Lara 유현정


여행이란 어차피 집으로 향하는 길이니까


세계적인 여행작가 빌 브라이슨은 끝날 것 같지 않던 여행을 이스탄불에서 정리하며, 그의 저서 <빌 브라이슨 발칙한 유럽산책>의 마지막 페이지 문장으로 마무리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빌 브라이슨처럼 지구를 돌고 돌아 결국 다다르는 종착지는 바로 집이다. 우리는 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다시 만난 집은 그토록 세상을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기다리고 있고, 지겨울 정도로 곰팡이가 피어나던 일상은 햇살에 널어 말린 이부자리처럼 뽀송뽀송하고 포근하며 안락하다는 사실을.


딸아이는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애완견 호두가 기다리고 있는 정겨운 일상과 편안한 자신의 침대가 그립다고 했다.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체력은 진즉 바닥이 났고, 발가락을 다친 데다가 눈병까지 생겨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었다. 어서 빨리 집으로 돌아가 며칠이고 푹 쉬고 싶었다. 나는 여행 짐을 마저 싸고, 마당으로 나와 하얀 아기 고양이에게 남은 간식과 사료를 모두 부어 주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오전에 코로나 신속항원검사를 받고, 저녁에는 바르셀로나로 날아가서 밤에 아시아나를 갈아타고 다음날 아침 인천 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여행에는 늘 변수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것이 한참 여행을 즐기는 도중이라면 행로를 바꾸면서 또 다른 기회를 얻게 된다. 그러나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순간에 마주친 상황이라면, 그것은 악몽일 수밖에 없다. 마요르카 공항은 마지막 휴가를 즐기고 떠나는 유럽인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사이 늘어난 짐 때문에 가방 무게가 초과되어 잠시 지체되었지만, 곧 짐을 모두 부치고 검색대를 통과해서 면세점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들의 평안은 딱 거기까지였다.


면세점 안에서 항공사로부터 비행기가 연착된다는 문자를 처음 받았을 때, 우리는 환승하는 비행기와의 시간을 계산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시간이 빠듯하긴 하지만 빨리 움직이면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날아온 문자는 시간이 더 지연된다는 내용들이었다. 아이들은 비상 상황을 인식하고 다급하고도 긴밀하게 상의를 했다.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를 놓칠 수는 없기에 다른 비행기를 찾으며 이미 부친 짐을 되찾기 위해 검색대 비상구를 뛰쳐나와 달리고 달렸지만, 상황은 우리 편이 아니었다. 암담했다.

결국 서너 시간이 연착되어 저녁 비행기는 밤 비행기로 둔갑해 있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시아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매정하게 떠난 직후였다. 우리처럼 바르셀로나와 인천 행 항공권을 연계하지 않고 따로 구매한 경우, 연착한 항공사에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하였다. 대신 체크인을 취소한 아시아나에게 일말의 희망을 품고 다 같이 사무실을 찾아갔다. 아,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바라던 튼튼한 동아줄이 아니었다. 비행기도 이틀 후에나 운행될 예정이란다. 우리는 실망을 넘어 절망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비극을 원하는 인간은 없다. 고생을 원하는 여행자도 없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우리가 살면서 피하고 싶은 것들을 통해 드러나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여행의 계절에 떠올려보게 되는 또 다른 성찰이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라는 선조들의 경구는 “그러니까 집에 있으라”는 충고가 아니라 그 개고생이 여행의 가치임을 암시하는 것 같다.

- 김재기(경성대 글로컬 문화학부 교수) -


우리는 새로운 항공권을 구매해야 했다. 가장 빠른 비행기는 독일의 루프트한자였다. 다음 날 새벽 바르셀로나를 떠나 프랑크푸르트에서 6시간을 경유한 후, 그다음 날 인천공항에 도착하는 스케줄이었다. 집으로 가는데 이틀이 걸리는 여정이었다. 공항에서 운영하는 호텔도 만실이라 입국장에서 밤을 새워야 했다. 우리와 같은 처지의 여행객들이 많았다. 그들은 배낭을 베고 바닥에 눕거나 의자를 차지하고 앉아 눈을 붙이고 있었다. 우리는 문을 닫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의자를 이어서 누울 자리를 만들었지만, 아이들은 나처럼 세상을 쉽게 체념하기에는 너무 젊었다. 밤새 한 숨도 안 자고 한국으로 통화하며 여행사와 항공사에 방법을 모색하고 항의했다.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한 눈물겨운 전투가 이어졌다.


이쯤에서 나는 신속하게 마음을 비우기로 마음먹었다. 속은 쓰리지만 더 큰 사고를 당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여기기로 하였다. 여행하는 동안 코로나에 걸렸거나, 교통사고나 익사사고 등 모든 불행이 우리를 비켜갔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상황은 아주 가벼운 감기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게다가 아이들이 나의 보호자로 나서 주는 상황에 안도감이 들었다. 곁에서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을 지켜보는 것은 대견하고도 흥미로웠다. 몸으로 때우든 돈으로 지불하든 결국은 해결될 일이었다. 이젠 이 모든 사실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만 필요했다.




새벽이 되자 공항에서 밤을 새운 사람들이 부스스 일어나서 다시 길 떠날 채비를 하였다. 첫 비행기를 타려는 여행객들도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웠다. 나도 보름 전에는 저들과 다를 바가 없었는데, 이제 여행을 끝내기로 마음먹고 돌아선 길에서 저들을 이해하는 게 갑자기 버거워진 것이다. 이렇게 잠을 설쳐가며 모든 에너지를 소진하면서까지 여행이라는 고생길 위에 영혼을 바치게 되는 이유는 대체 뭐란 말인가. 강한 문이 세차게 머리를 쳐들었지만, 만신창이가 된 심신은 대답할 여력이 없었다.


나는 경유지인 프랑크푸르트에서 잠깐 시내로 나가 독일의 생맥주를 마시고 들어오면 어떨까 싶었다. J의 로망이기도 했으니 한 잔씩 사주며 고생한 아이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시내가 공항에서 멀고, 밤을 새운 우리가 낯선 도시를 헤매는 건 체력적으로도 감당이 안 되었다. 대신 영화 <터미널>의 주인공 톰 행크스처럼 공항 안을 어슬렁거리며 좀비처럼 돌아다녔다. 독일 공항의 면세점 중앙 통로에는 노점상이 있었는데, 왕소금이 박힌 커다란 프레첼이 담백하면서도 부드럽고 고소했다. 곳곳에 책방과 신문 가판대가 눈에 띄었고, 가전제품과 목 베개 같은 물건들이 대부분이었다. 독일은 학구적이고 실용적이라 그만큼 재미가 없지만, 어쩌면 그것이 독일을 이끌어가는 저력이고 뚝심일 거라 생각했다.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탑승 게이트로 가기 위해 다시 한번 입국 심사대를 거쳐야 했다. 코로나 음성 확인서를 보여주고 비행기에 올랐다. 기내는 담요를 두 장이나 덮어도 한기가 들 정도로 냉동고였고, 두 번 받은 기내식까지 냉기가 돌며 최악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잠만 잤고, 다음 날 아침 인천 공항에 내렸다. 짐을 찾자마자 그동안 전우애를 다진 S와 J에게 제주에서 다시 만나자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공항 밖에는 남편과 애완견 호두가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우리를 맞이했다. 그렇게 딸아이와 나는 길고도 험난한 귀로를 끝내고 세상에서 가장 포근한 가족의 품에 안겼다.




서울로 돌아와 나는 한동안 병원을 전전하며 여행지에서 얻은 병을 치료했다. 시도 때도 없이 많은 잠을 자며 탕진했던 체력도 보충했다. 시차를 회복하기까지 어느 여행보다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서서히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여력이 생겨나자, 나는 자연스레 노트북을 열고 지난 여행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글이 마법을 부렸고, 나는 다시 여행의 설렘 속으로 빠져들었다. 고통으로 얼룩진 기억은 서서히 휘발되어 마침내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의 버킷리스트였던 그림도 함께 완성했다. 여행을 갈무리하기에 글과 그림은 더없이 훌륭한 도구들이었다.


나에게 여행이란 무엇일까.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밤을 새운 새벽, 고개를 쳐들었던 질문이 다시 나를 노크했다.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또 떠날 것인가를 되물었다. 나는 일상이 시들해져 의미를 잃어갈 때, 여행이라는 돌파구를 찾곤 하였다. 그러니까 여행은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버티게 해주는 힘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혼자 떠난 길 위에서 나를 스치는 바람과 하나가 되는 순간의 기쁨을 발견하였다. 스스로 여행을 주도하게 되면서 얻게 된 자유와 충만이었다. 그것은 꾸뻬 씨처럼 내가 깨달은 새로운 배움이었고, 여행의 의미였다. 여행은 언제나 옳다. 낯선 길 위에서 오감을 열다 보면, 과거와 미래에서 해방되어 오롯이 지금의 현재를 마주한 나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 2022 유럽여행, 잊지 못할 순간들


P.S. 함께 여행을 가자고 손을 내밀어 준 큰 딸아이와 그들 여행에 선뜻 나를 끼워준 잉꼬부부 S와 J에게도 고맙다고, 고생 많았다고, 함께 나눈 마요르카의 멋진 순간들이 그립다고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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