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파니 블루의 향연

2022 유럽여행 그림일기 10

by Lara 유현정


오늘은 종일 바다에서 놀기로 한 날이다.

다들 아침부터 들떠서 부산했다. 볕은 쨍쨍하고 기온도 높았다. 부엌문을 열자 불가마 같은 열기가 쑤욱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나는 테라스의 기둥 옆에 사선으로 길게 늘어진 그늘에 고양이 밥을 차려주고, 다시 들어와 이것저것 먹을 것을 챙겼다. 우리가 가려는 칼라 욤바르즈는 협곡에 발달한 비치라서 주변에 식당이 전혀 없다고 했다. 물놀이를 하다 보면 금방 배가 고파지기 때문에 음식을 많이 챙겨야 한다. 어제 팔마 식당에서 싸온 빠에야에 햇반과 버섯을 넣고 볶으니 간도 맞고 양이 늘어났다. 피자를 굽고 과일과 얼음물도 쌌다.


우리는 들 안에 수영복을 챙겨 입고 물놀이 용품을 챙겨서 차에 올랐다. 골목을 돌고 돌아 큰길로 나가는 길에는 군데군데 넓은 염소 농장이 있었다. 조랑말 크기만 한 염소가 울타리를 올라타서 순간 탈출하려나 보다 하고 긴장을 했는데, 다시 보니 앞다리를 들어 철망을 붙잡고 고개를 위로 쭉 빼서 가지 끝의 나뭇잎을 뜯어먹고 있었다. 마을 입구로 나오자 원형 교차로에 우리가 방금 본 염소와 똑같은 포즈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었다. 제주도가 말을 방목하듯, 마요르카 시골에선 염소 목축을 많이 하는 듯하였다.


한 시간쯤 달려 쪽의 바닷가 마을 도착했다.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었다. 겨우 자리를 찾아서 안전하게 차를 세우고 짐을 나누어 들었다. 사람들이 수영복 차림으로 혹은 타월을 두르고 꼬리를 물며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우리도 그 뒤를 따랐다. 이글거리는 땡볕 속에서 20여 분을 걸었을까. 갑자기 가파른 계단이 나타나며 나무 사이로 푸른 바다가 어른거렸다. 와아!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코발트 블루와 에메랄드 빛이 혼재하는 바다 위로 윤슬이 가득 쏟아졌다. 수십 캐럿에 달하는 다이아몬드가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광채가 어찌나 휘황찬란하던지 눈이 부셨다. 바다로 뛰어들면 보석을 한 움큼 주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가 다다른 해변 인종을 불문하고 사람들이 꽤 많았다. 우리는 평평한 바위를 찾아 자리를 깔았다. 걸어오느라 몸이 너무 달아올라서 어서 시원한 물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수경을 챙겨 들고 모래 해변으로 내려갔다. 가까이서 비치볼을 하는 젊은이들이 이리저리 물속을 뛰어다녔다. 바닥의 모래가 뿌옇게 올라와 바닷물과 뒤섞였다. 물이 너무 탁해서 스노클링은 거의 불가능했다. 깊은 바다로 나가고 싶었지만 겁이 많아서 마음뿐. 지난여름에 즐긴 제주도 하도리의 무두망개가 너무나 그리웠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이들에게로 달려갔다.


"얘들아. 여기는 안 되겠다. 제주도 바다가 훨씬 깨끗해. 제주도 놀러 오면 내가 좋은 데 데려갈게."


"엄마는 불만쟁이!!"


허걱! 나는 순간 아찔했다. 기습적인 한 골이었다. 경기는 전혀 내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나는 분명 뒷부분에 힘을 주어 말한 것 같은데, 앞부분이 강조되며 망언이 되고 말았다. 골키퍼 실력이 영 시원찮았다. 일행에게 불만투성이로 낙인이 찍히고 말았으니, 쩐다. 마요르카까지 와서 제주도를 들먹이다니, 건 속으로나 생각할 일이지 드러내 놓고 비교할 일은 아닌 것이다. 지들 딴에는 고생해서 찾아낸 바다인데, 겨우 이런 곳이었어?라는 비난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은근히 실망하고 있는 딸아이 심리를 내가 눈치코치도 없이 툭 건드린 건지도 몰랐다. 그때 반대편 해변의 맑은 물빛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다시 짐을 챙겼다. 반대편 지점에 거의 도달할 즈음 딸아이가 이정표 하나를 발견하고 소리를 질렀다.


"앗! 여기다. 우리가 가려고 했던 바다야.

Calo del Moro !! "


Cala S'Almunia, 윤슬이 쏟아지는 바다


그러니까 우리는 길을 잘못 들어섰던 것이다. Calo del Moro는 깊숙이 숨어 있었다. 낑낑거리며 언덕을 올라가서 조금 걸어가자 이번엔 가파른 내리막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 마이 갓!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 협곡과 비치가 발아래로 펼쳐지고 있는 게 아닌가.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소나무를 등에 걸친 깎아지른 절벽이 사방으로 막혀 더 멋진 비경을 간직한 곳이었다. 가슴에 전율이 일었다.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블루의 3단계 색감이 너무도 곱고 투명해서 물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믿을 수 없는 티파니 블루의 향연이었다.


길이 가파르고 미끄러웠다. 하지만 굴러봤자 저토록 아름다운 바다일 테니 겁날 것도 없었다. 언덕 중간엔 동굴이 숨어 있었다. 그 안에 자리를 깔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해안에는 커다란 바위들이 제멋대로 흩어져 자연 방석을 만들어 주었다. 멀리 가로로 놓인 절벽은 방파제가 되어 큰 파도를 막아주었고, 덕분에 바닷물이 잔잔해서 스노클링 장소로도 훌륭했다. 모래 바닷속으로 계속 뻗어가며 서서히 깊어져서 천혜의 요새처럼 안락하고도 안전한 바다였다. 우리는 좀 더 바다 쪽으로 내려가 바위 위에 짐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턴 티파니 블루가 마법을 걸어오는 바닷속으로 뛰어들 차례였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풍덩! 풍덩! 바다로 빠져들었다.


나는 적당한 깊이의 바다에서 실컷 수영을 하고, J가 가져온 스노클링 장비를 빌려 바닷속을 탐험했다. 바다 중간에 바위가 있어 해초가 뿌리를 내리는 곳에는 영락없이 열대어들이 무리 지어 살았다. Calo del Moro는 우리의 기분을 크게 고양시켰다. 흥분한 딸아이는 마요르카를 떠나는 날에도 아침부터 비치를 즐기고 공항엘 가자며 야무진 계획을 늘어놓았다. 우리는 다들 그 자리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여행자의 현실이 그리 녹록하던가.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24시간 이내로 신속항원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이는 9월 3일부터 폐지됐는데, 우리는 이틀 전에 입국함). 계획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지만 또 어떠랴. 물놀이의 로망을 실현해서 멋진 추억을 간직하게 되었으니, 아쉬움은 다시 또 마요르카를 꿈꿀 수 있는 마중물로 쓰면 될 터였다.


나는 어느새 제주도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그토록 신비하고도 낯설어서 속수무책으로 빠져드는 마요르카의 블루에 골몰했다. 블루는 아무리 바라봐도 질리지 않고 지친 마음을 다독이는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 젊고 세련되고 이지적이며, 창의력과 상상력, 신뢰감과 비전, 희망과 진취성과 합리적인 이미지까지 많은 의미를 가진 만큼 색감이 풍부하고 깊이가 있다. 그러나 지나친 사용은 우울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데, 나는 고흐의 그림에서 그런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마요르카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블루에서는 단 한 조각의 우울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요르카에서는 칼날처럼 번뜩이는 윤슬도 남달랐다. 때론 다이아몬드처럼 때론 블루 사파이어처럼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나는 마요르카의 바다가 제주도와 미묘하게 다른 점을 찾아냈다. 그것은 바로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처럼 이글거리며 와랑와랑 하게 뿜어내는 햇살이었다. 제주도를 한껏 추월하는 기온과 습기가 없는 바삭바삭한 햇살이 바다와 만나는 순간, 찌리릿 스파크를 내고 조각조각 부서지며 보석을 흩뿌려 놓는다. 그러곤 바닷속으로 깊숙이 침투한 다른 빛은 모두 흡수하고 푸른빛만 반사하는 것이다. 마요르카의 블루는 렇게 마법을 걸고, 아마도 이것이 마요르카로 여행을 떠는 이유일 것이다.


Calo del Moro, 티파니 블루의 향연




다음 날 오후, 우리는 요트를 타기 위해 다시 바다를 찾았다. 이번에는 숙소에서 가까운 바다였다. 도시 안으로 깊숙이 들어온 한적한 해변은 주민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오는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요트는 마요르카의 첫날 일정이었지만 비가 와서 마지막 날로 연기되었다. 나는 내심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덕분에 마요르카에서의 여정을 멋지게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요트는 크고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친근하고 편안하였다. 우리 일행 외에도 캐나다인 남자 2명이 합석을 했다. 요트는 30분 정도 깊은 바다를 향해 나아갔다. 파도가 커지면서 배도 따라 흔들거렸고 나는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바닷가엔 부자들의 별장이 즐비했다. 멀리서 해안 마을을 구경하며 항해를 하다가 요트가 정박한 곳은 작은 등대가 있는 무인도 앞이었다.


Is this your life?


사업차 서울에 와 본 적이 있다던 캐나다인이 수영을 하다 말고 요트 주인을 향해 큰 소리로 물었다. 스페인을 너무 사랑한다고 말하던 그였다. 질문의 의미를 알아들은 우리는 다 같이 크게 웃었다. 마요르카의 젊은 요트 주인은 어깨를 으쓱하곤 그렇다고 대답하며 따라 웃었다. 요트를 타고 즐기는 인생이라니, 그것도 이토록 아름다운 마요르카에서! 겨울이 일 년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캐나다에선 꿈만 같은 일일 것이다. 딸아이와 나는 요트에서 내린 패들 보트를 탔다. 보트는 물 위에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바닷속에는 물풀이 많았다. 나는 다시 보트에서 내려 물풀과 물고기를 구경하며 섬까지 왔다 갔다 수영을 즐겼다.


한 시간쯤 바다에서 놀고 있으려니 요트 주인이 우리를 불렀다. 그 사이 다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쿠키와 치즈에 과일로 이리저리 솜씨를 부린 안주와 함께 맥주잔을 기울이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해변으로 돌아가는 길은 해가 지고 있었다. 서서히 그러나 순식간에 해가 꼴딱 산으로 넘어가자 주변으로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넘실거리는 바닷물도 붉게 물들어 갔다. 다들 노을을 바라보며 조용히 상념에 빠져들었다. 세상 만물을 비추던 태양이 사라지고 어둠이 찾아오면, 이제는 스스로 내 안을 밝히며 조용히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짧지만 굵직했던 여행의 의미를 곱씹고, 앞으로의 인생에 희망을 심는 시간이다. 해 질 녘 하늘처럼 우리의 여행 그렇게 농익고 있었다.

<그림> 마요르카의 요트 여행



keyword
이전 10화5일간의 마요르카 캣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