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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Aug 30. 2020

여름의 끝을 잡고

선녀탕에서 물고기와 함께 춤을



아침 6시, 어김없이 핸드폰 알람이 울린다.

게슴츠레 실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면 여명이 밝아온다. 나는 바로 알람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양치질을 하고 포트에 물을 덥혀 따뜻하게 한 잔을 마신 후, 주섬주섬 긴팔 수영복을 챙겨 입는다. 구명조끼와 오리발을 챙겨 들고 집을 나선다. 그리곤 동네 언니를 픽업해 자동차로 5분 거리의 황우지 선녀탕으로 내달린다. 

선녀 놀이에 푹 빠진 8월 의 아침 일상이다.






남국의 햇살이 이글거리다 못해 와랑와랑 하다.

유난히 길고 지루했던 장마와 태풍까지 물러가자 뭉게구름이 하늘 가득 피어오른다. 한라산 중턱에도, 섶섬과 문섬 앞바다에도 시도 때도 없이 풍성한 그림을 그려낸다. 제주에 살게 되면서 여름의 낭만을 특별히 사랑하게 된 나는, 여름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팔딱거리며 피가 뜨거워진다. 이제나 저제나 기다려오던 여름, 어느새 입 밖으로 흥얼흥얼 노래가 흘러나온다.


여름은 젊음의 계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서귀포의 여름은 습기로 시작해 열기로 절정을 이룬다. 장마가 시작되면 종일 제습기를 틀며 한바탕 습기와의 전쟁으로 씨름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태양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하면 그 위력 앞에 맥을 못 춘다. 혹자는 여름이면 이열치열을 논하지만, 나같이 참을성 없는 베짱이는 애당초부터 두 손 두 발 들고 항복이다. 도저히 이길 재간이 없어 싸움을 포기하고, 차라리 한바탕 놀아볼 궁리를 한다. '하루 만 보 걷기'를 반납하고 바다로 뛰어든다. '땀 흘려 걷는 자' 위에 '물에서 즐기는 자'가 있으렷다.



파마머리의 김정운 교수는 그의 저서 <<노는 만큼 성공한다>>에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고, 나는 놈 위에 노는 놈 있다'라고 역설하였다. 창의성이 중시되는 21세기에 '일하는 것'은 세계 최고이나 '노는 것'은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한국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발언이다. 요즘은 확실히 잘 노는 것이 미덕인 시대가 되었다. 놀이가 일로 연결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전생에 나라를 구한 사람이나 가능할니, 그저 그런  보통사람들놀 때라도 열심히 놀아야 한다. 나는 아침에 먼저 놀고, 놀면서 충전한 에너지로 낮에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여름날의 하루는 단순하다.





올여름 내가 주로 닌 바다는 선녀탕이다.

외돌개로 유명한 서귀포의 황우지 해안에는 천혜의 스노클링 장이 있다. 5,6년 전만 해도 동네 사람들만 간간이 들락거리던 곳이었는데, SNS의 물살을 타고 빠르게 번져나가 지금은 제주의 핫플레이스가 되었다. 낮에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고 있어서 우리는 새벽시간을 이용한다. 겉옷을 바위에 벗어놓고 아무도 없는 탕 안으로 뛰어드는 맛이란, 여름날 무엇에도 견줄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이다.


선녀탕은 용암이 병풍처럼 둘러싸여 아늑하고 안전하다. 미키마우스의 두 귀를 닮은 용암 뒤로는 문섬이 보이고, 주변의 해안 절벽과 새섬, 새연교가 만들어내는 경관이 빼어나다. 수온도 적당하고, 물이 맑고 투명하여 물 밖에서도 물고기가 보인다. 크고 작은 웅덩이와 바다세 군데 있는데, 우리는 3,4m 정도의 깊이와 직경 20,30m 정도의 크기를 가진 바다 풀장을 좋아한다. 안전을 위해 입구에 시멘트 방파제를 설치했지만, 바다 밑은 뚫려 있어서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며 다양한 물고기가 서식해서 구경할 것이 많기 때문이다.

99% 신의 손길로 만들어진 서귀포의 파라다이스, 그 이름하여 선녀탕, 탕, 탕!!



아침마다 나는 밤새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는지 궁금하다. 수경을 끼고 오리발을 찬 후, 선녀탕 한가운데로 나아간다. 먼저 한 바퀴 순찰을 끝낸다. 뜨거운 용암이 차가운 바닷물을 만나 그대로 굳으며 만들어진 자연 방파제가 눈부신 아침 햇살을 막아준다. 선크림이 굳이 필요 없다. 용암 절벽의 틈새로 비스듬히 내리 꽂히는 햇살은 물결 따라 굴곡지며 아롱진다. 바닥에 깔린 크고 작은 현무암이 햇살에 반짝거리면, 문득문득 지구 반대편 파묵칼레의 노천 온천 수영장이 아른거린다.


아아, 파묵칼레...

십수 년 전 여름, 친구랑 터키를 여행하던 중이었다. 파묵칼레는 계단식 논처럼 여러 층을 이룬 지형에 찰랑찰랑하게 물이 차 있는 온천으로 유명하다. 석회수가 녹아내려 에메랄드 빛을 띠는 물에 발을 담그며 한 층 한 층 올라 선 꼭대기에는 온천수를 모아둔 수영장이 있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바닥을 내려다본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로마시대의 유물이 겹겹이 물 안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닌가. 한바탕 전쟁을 치렀는지 여러 문양의 돌기둥이 부서진 채 바닥을 장식하고 있었다. 너무나 초현실적인 풍경이었다. 우리는 어느새 2천 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로마제국을 헤엄치고 있었다. 콩닥콩닥 흥분한 그날은 여행 중 한 번쯤 만나게 되는 보물 같은 순간이었다.



선녀탕(좌)과 외돌개(우)



이제 나는 로마의 유 대신 살아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과 함께 루를 시작한다. 평소 선녀탕을 가장 즐기는 녀석은 파란색 물고기들이다. 올해 처음 만난 물고기라 그런지 눈길이 더 자주 간다. 어른 손가락 크기의 날씬한 몸매를 가진 녀석들은 등은 거무스름하고 꼬리는 노란데, 몸통은 푸른 바닷속에서 새파랗게 빛이 나투명하다. 때론 형광빛이 나기도 다. 여러 마리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물속을 유영한다.


노란 줄무늬 물고기는 바닷속의 마스코트다.

마름모꼴 모양으로 갓난아기 손바닥만 한 녀석들은 항상 두 마리가 함께 다닌다. 아무래도 연인임에 틀림없다. 어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나는 그냥 파파라치처럼 따라다니며 그들의 데이트를 훔쳐보는 걸로 만족한다. 놀래미는 두세 마리가 평평한 바위 위에서 몸을 비벼대고 있다. 가끔 해초를 쪼아 먹고는 개구쟁이처럼 몸을 s자로 비틀며 뭉개면서 논다. 못 보던 한치 가족도 나타났다.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 한치는 열심히 지느러미를 흔들지만, 낯선 곳이 두려운지 엄마 곁을 떠나지 못하고 맴돌기만 한다.



앗, 문어가 나타났다.



태평하던 선녀탕에 갑자기 문어가 침입했다.

씨름 선수의 팔뚝만  크기에 몸통은 두리뭉실한 것이, 인어공주를 괴롭히는 마녀 문어 '우르술라'를 똑 닮았다. 8개 다리의 빨판으로 바위를 움켜쥐며 스멀스멀 옆으로 이동만 하는데도 포스가 작렬한다. 외모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다. 나를 인어공주로 착각하고 물 위로 솟구쳐 올라 내 몸을 휘어감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걱, 다급해진 마음에 큰소리로 동행한 언니를 불렀다. 녀석도 놀랐는지 순식간에 꼬리를 감추고 사라져 버렸다. 어딘가 바위틈 아래로 거대한 몸집을 구겨 넣고 있으련만, 아쉽게도 녀석의 모습은 끝내 찾을 수가 없었다. 문어에게는 인간인 내가 침입자였던 모양이다.



, 그렇다면 선녀탕의 대장은 누구일까?

며칠간 살펴보니 아무래도 늘 혼자 다니는 검은 줄무늬 물고기가 아닐까 싶다. 어른 발바닥 만하게 제법 커다란 돌돔을 닮은 녀석은 혼자여도 언제나 당당해 보인다. 배가 고프면 해조류를 뜯으며 혼밥을 하고, 심하면 다른 물고기들 사이를 가르며 순찰을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꼬리에 하얀 동그란 무늬로 예쁘게 치장을 하고 게 아닌가. 오호라, 너도 쬐끔은 외로운가 보구나.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니? ㅎㅎ



멸치는 언제나 떼로 몰려다닌다. 작은 몸을 보호하려니 집단생활을 철칙으로 지킨다, 그런데 그들의 군무가 우아하다. 물속으로 햇살이 비치면 몸통과 꼬리가 반짝반짝 빛이 나며 영롱해진다. 그 빛에 홀려 내가 다가가면 걸음아 날 살려라, 내빼기 바쁘다. 대열은 삽시간에 무너지며 흩어지고, 다들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바쁘다. 그 뒤를 쫓을수록 멸치몸통은 투명해진다. 등뼈와 얇은 가시까지 속속들이 보이는 것만 같다.



제주 친구(김 옥)가 만들어준 선녀탕 동영상



그렇다면 미역은 어떤 모습일까?

얌전하게 다소곳하고 조신하며 요조숙녀일 것만 같은 미역이 사실은 가장 끼가 많은 `바다의 댄싱 퀸'이라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 선녀탕 가장 깊은 곳에 퇴적된 하얀 모래 주변의 크고 작은 바위엔 미역이 뿌리를 내리며 집단으로 자생한다.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미역은 물살에 흔들린다. 파도가 일 때마다 온몸을 자유롭게 흔들어댄다. 물살의 순리대로 흔들리는 미역의 떼춤은 열정적이고, 유쾌하다 못해 마력을 뿜어내며 구경꾼의 엉덩이를 들썩이게 만든다. 에라, 모르겠다. 나도 따라  팔과 다리와 몸통을 흐느적거려 본다. 어느새 물살은 왈츠가 되고, 우리는 박자를 맞춰가며 함께 춤을 춘다. 다른 물고기들도 덩달아 꼬리와 지느러미를 흔들며 미끄러진다. 그렇게 모두 하나가 다.



한바탕 미역과 물고기들과의 댄스파티를 즐기고 나면, 이제는 열심히 운동을 할 차례.

자유형과 평형으로 선녀탕을 돌고 돈다.  턱까지 차오르몸을 뒤집어 배영을 한다. 그러다 가만히 멈추고 누워서 하늘을 바라보면, 용암 절벽 꼭대기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 나뭇가지 하나가 늘어져 바람에 흔들린다. 젖은 얼굴 위로 스쳐가는 한줄기 마파람이 감미롭다 못해 달콤하다.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면, 어디선가 날아온 새 두 마리가 사이좋게 허공을 가른다. 소금기는 부력을 만들어 온몸을 흔들림 없이 탱탱하게 받쳐주고, 하늘에 엷게 떠있는 흰구름은 차렵이불이 되어 포근히 나를 덮어준다. 선녀탕에 뛰어든 선녀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 내 여름날의 보물 같은 순간이다.






벌써 꿈같은 8월이 끝나가고 있다.

선녀탕엔 반갑지 않은 불청객 해파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영을 할 때 가끔 따끔하게 얼굴을 쏘고 달아난다. 이제 내년 여름을 기약할 때가 되었나 보다. 늘은 아침에 일어나 보니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가 간질거린다. 이러다가 어느 날 물고기로 변신한 나를 만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다른 해보다 유난히 짧았던 여름, 아쉬운 마음에 여름의 끝을 잡는다.


                                                                                                              

#선녀탕 #제주바다 #스노클링 #보물같은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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