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명절

효도는 셀프, 나는 이제 명절에 친정으로 간다

by Lara 유현정


불효자는 옵니다.

명절도 비대면라더니, 추석을 앞두고 청양군에 내걸린 현수막이 전국을 뜨겁게 달궜다. 코로나 시대의 달라진 풍속을 보여주는 현수막 문구의 위트와 기발함에 크게 웃어넘기던 나는 생각이 많아졌다. 젊고 건강한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한 번쯤 명절을 건너뛴다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얼마를 더 사실지 모르는 늙고 병든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어쩔 것인가? 의 부모님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은 코로나일까, 아니면 외로움일까?




나의 시댁은 지난 설부터 명절엔 산소를 다녀오는 것으로 차례를 대신한다. 시부모님과 아주버님이 모두 돌아가신 후 집안의 대소사를 큰집 형님 상의하는데, 이번 추석엔 코로나 때문에 서로 대면을 피해 성묘를 각자 따로 하자고 하셨다. 덕분에 명절 아침 일찍부터 서두를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이참에 '내가 바라는 명절'이라는 숙원의 카드를 꺼내 남편에게 들이밀었다.


"이제 명절엔 친정으로 가야겠어."

"......"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실지도 모르는데, 명절 아침에 친정부모님 챙겨드릴래."


명절을 쇠러 제주에서 올라온 나는 명절 전날 엄마가 좋아하는 녹두전을 부쳐드리고 명절날엔 아침식사를 챙겨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뇌경색으로 누워계신 친정아버지와 간병으로 병이 난 엄마를 떠올리, 왜 이제야 이런 기특한 생각을 했는지 속상할 따름이었다. 십수 년 전 외며느리를 잃은 딸 부잣집 친정부모님은 언제나 쓸쓸한 명절 아침을 맞이하셨고, 늦은 저녁에야 들이닥친 딸들과 사위들을 챙기느라 허리가 휘청이셨다. 두 분을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건 뭐 뒤늦게 정신차린 불효자식이 회한에 사무쳐 통곡하는 꼴이었다. 차분하게 시작된 명절 이야기가 제풀에 복이 받치면서 울먹이게 되자, 처음엔 어안이 벙벙하다가 당황한 남편이 알겠으니 그러라고 하였다.




관성이란 참으로 무섭다. 나는 결혼 초부터 느껴오던 관습의 불평등에 끝없이 분개하면서도 큰 틀은 깰 엄두를 내지 못한 채,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변화를 시도하며 그럭저럭 세상과 타협하살아왔다. 시아주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시부모님 제사가 막내인 남편에게 돌아오자 나는 변화에 속도를 냈다. 제사상에 떡 대신 케이크를 올렸고, 전과 산적 대신 요리를 주문하고 파티상을 차렸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 날은 마침 크리스마스이브였으니 형님도 군말이 없으셨다. 명절 차례상에도 술 대신 차를 올리며 음식 가짓수를 대폭 줄였고, 최근에는 성묘로 대신하면서 더욱 간소해졌다.


하지만 가부장제의 권위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명절이 돌아오면 나는 언제나 살아계신 친정 부모님보다 돌아가신 시부모님을 먼저 챙겨야 했다. 차례를 준비하느라 친정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 오랜 세월 관습에 젖어 살다 보니 아무리 선량한 남편이라 할지라도 기득권을 내려놓기에는 의식의 한계가 있었고, 나도 그 견고한 틀을 깨고 나오기에는 용기가 부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로나가 명절 문화를 바꾸고 있는 게 아닌가? 돌아가신 조상님보다 살아있는 사람의 목숨이 더 소중하니 다들 어쩔 수 없이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 틈에 나는 명절을 온전히 친정에서 보내고 싶었던 염원을 달성하게 된 것이다. 변화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추석 명절 잘 보내셨나요?



명절이 끝나면 지인들끼리 례히 주고받는 질문이다. 하지만 결혼한 여자 중에 흔쾌히 예스,라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만약에 그들이 새로 결혼한 젊은 새댁이라면? 마음은 더욱 답답해진다. 부부 중 한 사람만 행복하고 다른 한 사람은 불행하다면 그 행복은 온전한 것일까? 다 같이 행복해야 진짜 행복일 것이다. 나는 세상이 바뀌기를 기다렸으나 변화의 속도는 더디기만 하였다. 디지털 세상의 변화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지만 오랜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풍습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겠지만, 세상이 변하는 속도만큼은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신혼 초에 맞이한 설 명절은 지금도 잊지지 는다. 허니문 베이비를 임신하여 입덧이 심한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명절 전날 직장에서 당직까지 걸려 저녁 6시에 퇴근을 했는데, 시댁에서는 차례상 준비를 도와야 한다며 호출하였다. 나는 차마 못 가겠다는 얘기도 못하고 지옥으로 끌려가는 심정으로 만원 버스를 타고 터덜터덜 시집으로 갔다. 입덧이 심했던 친정 엄마는 그 얘기를 듣고 무척 속상해하셨다. 하지만 평생 입덧을 모르고 6남매를 낳으신 시어머니께서 나의 몸 상태를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셨을 것이다. 어쩌면 막내인 나만 봐주기에는 손윗 동서들에게 미안하셨을지도 모르겠다.


반면 추석에는 만삭인 배를 끌어안고 송편을 빚었다. 곱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씀에 저린 다리를 뒤척이며 칭찬을 받으려고 내심 애를 썼다. 나는 차례를 지낸 다음 날 양수가 터져 응급실에 들어갔고, 끝내 자연분만에 실패하여 제왕절개 수술을 받고 딸아이를 출산했다. 시어머니는 바쁜 친정엄마를 대신하여 나의 산후조리를 맡아주셨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 놀이방에 맡길 수 있을 때까지 두 아이를 키워주셨다. 지금은 돌아가신 시어머니를 누구보다도 존경하지만, 그 당시 어린 새댁으로서는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었다.



신혼 초에 맞벌이 부부가 당면하는 문제는 첩첩산중이다. 결혼은 낭만이 아니고 현실이기 때문이다. 가사에 치여 치열하게 싸우고, 육아에 지쳐 남편에게 눈물의 편지로 호소하다가, 불합리한 결혼제도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명절을 보내고 정신적 스트레스의 쓰나미에 시달리고 나면 결혼의 환상은 환멸로 변한다. 는 결국 결혼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며 주변에서 결혼한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거 알아? 결혼의 행복은 신혼여행까지라고, 결혼이라는 제도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뜯어말리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시댁에는 훌륭한 제도가 하나 있었다. 집안에 병원에 입원할 정도의 아픈 사람이 있으면 그해 차례를 지내지 않는 관습이었다. 그런 행운(?)은 마치 안식년처럼 10년에 한 번 꼴로 찾아왔는데, 선선한 가을날 대만으로 떠난 가족여행은 신선놀음처럼 자유롭고 달콤한 추억을 안겨주었다. 나이가 들어서는 철이 좀 들었는지 친정 엄마를 도와주러 갔다. 그때 엄마는 나를 보고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살아오신 것보다 더 반갑다고 하셨다. 그날 저녁 늦게까지 전을 부쳐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밤하늘에 휘영청 떠오른 보름달처럼 마음이 뿌듯하고 충만하였다. 자고로 명절이란 마음이 이렇게 흡족해야 하는 법이거늘, 시집에서 보내는 명절은 늘 마음이 불편해서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이 손님으로 군림하더라도 명절을 친정에서 보낼 수 있다면, 여자들끼리 음식을 만들어도 얼마나 즐겁고 신날까, 라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명절증후군은 남자보다는 여자에게서 빈번히 나타난다. 특히 여자가 결혼 후 명절을 전후해 맞닥뜨리게 되는 육체적 과로와 스트레스는 정신 질환로까지 발전한다. 나는 그 원인의 뿌리가 가부장 중심 사회에 뿌리내린 불합리하고 불평등한 결혼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득권을 가진 남자들은 모든 시스템이 자기를 중심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아내들만 용인하고 인내해준다면 명절이 편안하고 달콤할 것이다. 과거에는 여자들이 결혼하면 출가외인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자기 체면을 걸었기 때문에 가부장제는 더욱 공고해졌다. 하지만 가정에서 학교에서 평등을 배우고 자라난 세대는 불합리한 불평등을 참지 못한다. 만일 한쪽이 이를 고집한다면 같이 살 수가 없는 것이다.


물론 남자들도 구세대 부모와 신세대 아내 사이에서 처신하기가 난감하여 힘들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란 부모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의미한다. 가정을 꾸리기로 약속했다면 아내와 동등하게 새 삶을 설계해야 할 것이고, 거기에는 당연히 명절도 포함된다. 세대 간의 가치관이 충돌한다면 부모님께 양해와 이해를 구하고 슬기롭게 난관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남편의 입지가 모호할수록 결혼생활은 위태로워진다. 사랑하는 아내가 명절증후군을 앓으며 괴로워하면 가정이 평화로울 수 없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쌓아 올린 행복은 허상이고 모래성처럼 허술하다. 모두가 다 함께 행복한 세상을 향해 평하게 합의점을 찾아가야 한다.






아버지께 약을 챙겨드리고 계던 엄마의 얼굴은 초승달처럼 핼쑥하였다. 입맛이 써서 잘 드시지 못하고 아버지를 돌보느라 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나의 짝 방문에 화들짝 놀란 엄마에게 나는 명절을 준비해 드리러 왔다고 하였다. 엄마의 얼굴에 기쁨이 번지며 화색이 았다. 이제 돌아가실 때까지 가 명절을 챙겨드릴 거라 하니 눈물지 글썽거리다. 녹두전을 부치고 나는 오랜만에 부모님 옆방에서 하룻밤을 잤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도 든든하셨나 보다. 수차례 언급하며 고마움을 표현하셨다. 엄마는 코로나보다 외로움이 훨씬 더 무서우셨던 것이다. 늙은 부모에게는 자식보다 더 반가운 선물이 없다. 겨우 1박2일이었지만 그래도 명절이었기에 엄마의 마음은 듬뿍 채워졌고, 헤어질 때 엄마의 얼굴은 보름달처럼 환하고 행복해 보였다.


남편은 명절 아침에 성묘 대신 홀로 조촐하게 차례를 지냈다고 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원래 차례는 남자들이 준비해서 올렸는데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등 국난을 겪으면서 가부장제가 확고해졌고, 이에 따라 여자들의 노동력이 동원되었다고 했다. 또 조선 후기에 신분사회가 무너지면서 양반집에서만 간소하게 지내던 차례를 너도나도 과시용으로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을 차리기 시작한 것이라 하였다. 이로써 남편은 조선 초기 명절 차례의 정신을 이어받아 자신의 힘으로 조상님께 예를 갖추게 된 것이다.



효도는 셀프고 했던가? 올해는 결혼 후 처음으로 각자의 원가족을 챙기는 명절이 되었다. 는 그동안 어깨를 짓누르던 명절증후군이 씻은 듯이 사라졌고, 이제야 진심으로 뜻깊은 명절을 보냈다고 자부할 수 있게 되었다. 세상은 공평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아가야 한다. 나의 딸들이 살아갈 앞으로의 세상은 지금보다 더 등하고 지혜로우며 조화롭고 행복한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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