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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l 17. 2020

엄마의 순애보

가족이란?그리고 부부란?



  엄마의 휴가가 시작되었다.


  햇수로 8년 만에 맞이한 휴식이지만, 엄마는 그저 눈물만 범벅이다. 평소 뇌경색으로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폐렴으로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체온이 올라 지난 새벽 급히 응급실로 옮겨졌는데, 열 때문에 코로나 검진부터 받느라 일정이 지체되었다. 오후 늦게 음성 판정을 받고서야 중환자실 입원이 허락되었다. 중환자실은 보호자 간병이 금지된다. 부득이 엄마가 휴가를 맞이하게 된 진짜 이유다.






  아버지는 2013년 봄 갑자기 쓰러지셨다. 사실 갑자기는 아니, 몸이 징조를 보이며 몇 번의 신호를 보냈는데 알아차리지 못했다. 쓰러지기 한두 달 전부터 안면 근육이 조금씩 저린 증상이 있었는데, 대학병원에서 영양실조로 진단받아 몸보신을 하며 한의원만 다니시쓰러지신 것이다. 곧바로 119를 타고 서울대병원으로 향하는 도중에 무슨 일인지 응급기사가 한방을 겸비한 가까운 대학병원을 제안하였고, 보호자로 동행하던 엄마와 동생이 그 말을 따른 것이 큰 화근이 되었다. 응급실에 전문의가 배치되어 있지 않아서 아버지가 제대로 조치를 받지 못하면서 골든 타임을 놓쳐버린 것이다.


  결국 아버지는 뇌의 숨골로 가는 혈관이 완전히 막히면서 전신에 마비가 왔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평소에 지병도 없으셨고, 늘 운동과 소식을 실천하며 주변에 건강을 전파하던 분이시라 혈관 질환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아버지의 급작스런 발병은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고, 우리 가족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기며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미국에 사는 언니와 동생이 바로 날아왔고, 아버지는 다시 서울 삼성병원 중환자실로 옮겨져 사투를 벌이셨다.


  제일 큰 충격은 당연히 엄마의 몫이었다. 아버지를 중환자실로 옮겨 놓은 엄마는 넋이 나간 채 식음을 전폐했고, 자신이 아는 모든 신을 찾으며 제발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절히 매달렸다. 엄마의 기도를 들었는지 신은 아버지의 목숨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잔인하게도 다른 모든 것을 앗아갔다. 아버지는 팔과 다리, 몸뚱이를 모두 내주고도 모자라 목소리까지 반납한 후, 1등급 장애 판정을 받고 남은 생을 침대에 누워 지내게 되었다. 내가 수년 전 보았던 영화 '잠수종과 나비'의 실제 주인공 장 도미니크 보비처럼 감금 증후군, 의식은 있지만 전신이 마비되어 외부 자극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보비는 몸에서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왼쪽 눈꺼풀뿐이었다. 실제로 프랑스 패션 잡지 엘르의 편집장이었던 그는 뇌졸중으로 쓰러져 전신마비 상태가 되었고, 꼼짝없이 누워서 잠수종에 갇히는 듯한 공포를 맛보았다. 하지만 그는 절망의 늪에 갇혀 나약해지는 대신 창작에 매진하며 불굴의 생의 의지를 보여 주었다.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것들, 기억력과 상상력 그리고 한쪽 눈꺼풀만으로 대필작가의 도움을 받아가며 '잠수종과 나비'를 출간하였던 것이다.


  열쇠로 가득 찬 이 세상에서
내 잠수종을 열어줄 열쇠는 없는 것일까?

  혼신의 힘을 다해 세상을 향해 울부짖던 그는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나비처럼 날아올랐다. 영화는 내게 죽음 앞에서 더욱 심오해지는 삶의 의미를 되짚어주었고, 전율하던 감동의 쓰나미는 오랜 시간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두 눈을 모두 깜빡일 수 있었다. 나는 보비를 거울삼아 아버지가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은 가능하리라 생각하고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아버지는 오랜 시간 중환자 상태로 머물렀고,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여 우울증까지 겹쳤는지 별로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에게 하시고 싶은 말을 해보라고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 읊어가며 아버지의 눈 깜박임을 체크하는 일은 무한한 인내를 요구했다. 아버지는 별로 할 말이 없거나 어쩌면 침묵하며 잠하고 싶은데, 빨리 말을 해보라고 닦달하는 것만 같았다.


  삼성병원에서 목숨을 건진 아버지는 상태가 안정되면서 3달 후 서울 삼육병원으로 옮겨졌다. 우리는 다행히 젊고 의욕적이며 친절한 담당 여의사를 만났다. 우리 가족은 다시 희망을 가졌고, 의사와 긴밀히 협조해가며 아버지를 설득해서 눈으로 컴퓨터를 작동해 의사를 소통하는 훈련에 매진하였다. 하지만 아날로그에 익숙한 고령의 아버지에게 그런 방법은 너무 신식이었는지 아버지는 결국 문턱을 넘지 못하셨다.


  가끔 아버지께 말을 하고 싶으시냐고 여쭈면, 두 눈을 꾹 감으셨다. 두 눈을 잠깐 깜빡이지 않고 힘주어 꼭 감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간절한 의사 표시다. 엄마는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했다. 물리치료사를 통해 이미 굳어버린 아버지 혀의 재활 운동을 도왔고, 곁눈질로 배운 엄마도 틈틈이 아버지의 혀를 풀어 드렸다. 드디어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고 전문병원에 입원을 하였으나, 불운하게도 다시 또 아버지에게 심한 폐렴이 오는 바람에 그것마저 실패를 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1년이 넘게 병원을 전전하셨다. 엄마는 어떻게든 아버지를 일으켜 보려 애쓰며 24시간 아버지 곁을 지켰다. 몰래 다른 병원의 물리치료사까지 고용해 치료에 열과 성을 쏟았지만, 크게 기대를 걸었던 국립재활원의 치료마저 수포로 돌아가자 엄마는 아버지의 재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였다. 하늘을 뚫을 듯하던 의욕이 꺾이며 끝없이 지쳐갔고, 여생을 병원에서 보내게 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각종 의료기구를 사들고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왔다.


  엄마는 오전 요양사의 도움을 잠깐 받기도 하지만, 오후부터 새벽까지의 아버지는 온전히 엄마의 몫이다. 세 끼 식사와 약을 챙기고 틈틈이 대소변을 받아내고, 남동생의 도움을 받아 자전거와 경사대 운동을 시킨다. 수시로 아버지의 손발을 마사지하고, 편두통으로 얼굴을 찡그리시면 머리도 함께 지압을 해드린다. 침대 위에서 공에 걸터앉아 아버지의 상체 운동을 시키는 다소 위험하지만 기발한 방법도 개발했다. 밤에는 두 시간마다 깨서 가래를 뽑는 썩션을 하고 체위를  바꿔드린다. 욕창이 생기면 큰 일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아버지는 9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보다 한 살 젊은 엄마도 80대 노구로 오랜 시간 간병을 해 왔으니 몸이 온전할 리가 없다. 그 사이 무릎은 인공관절을 , 고관절과 허리는 손도 못 대고 의원만 다니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한 번은 엄마가 크게 아파서 아버지를 돌볼 간병인을 불러들였다. 하지만, 일주일쯤 지나 기운을 차리자 또다시 아버지 간병을 자처하셨다. 장신의 아버지를 돌보기엔 간병인 체구가 너무 작다며 어떻게든 내쫓을 꼬투리를 잡았다.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설득하였지만, 엄마에겐 어림도 없는 소리다.


당신만큼 간병할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주변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사람들 얘기가 종종 들려온다. 뇌졸중에는 뇌의 혈관이 터지는 뇌출혈과 혈전이 혈관을 막는 뇌경색이 있는데, 둘 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결과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중풍으로 고 있는 몸의 마비가 오는 질병이다. 의학박사 홍혜걸은 세바시 강연에서 혈관이 깨끗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하였다. 그는 그 어떤 질병보다도 혈관 질환자의 삶의 질이 가장 떨어진다고 하였다. 우리가 주변에서 보는 중풍 환자들은 아주 경미한 상태이며, 중증환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정리할 수도 없이 여생을 골방에서 누워 지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의견에 크게 공감한다.


  최근 아버지의 사촌과 친구분도 뇌경색으로 쓰러지셨다. 그들은 가족의 돌봄이 여의치 않아 곧바로 요양원에 보내졌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그때마다 엄마의 충격은 남달랐고, 그럴수록 아버지에게 더욱 매달렸다. 아버지를 절대 저승으로 먼저 보내지 않을 기세다. 당신이 쓰러질 때까지 간병인과 요양원은 어림도 없다. 60년 넘게 결혼생활을 하며 평생 아버지에게서 받은 사랑을 말년이 되어서야 갚는다며 이생에서 다 갚고 갈 요량이다. 그러니 아버지의 곁을 타인에게 내줄 리 만무하다.


  하긴 울 엄마에게 아버지는 최고의 이상형이었다. 엄마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부잣집에 재가한 외할머니를 따라갔으나, 새아버지의 인색하고 고약한 성품으로 눈칫밥을 얻어먹으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꽃다운 나이에 가난하지만 키 크고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성격까지 자상한 남자를 만났으니, 엄마는 평생을 아버지만 보고 살면서도 늘 행복해했다. 나이 들어 노래교실을 다닐 때는 멋을 내는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옷까지 다려주었다고, 자식들에게 남편 자랑을 할 정도였다.


  엄마는 신혼 때 아버지의 학업을 돕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서는 갖은 고생을 하며 아버지의 대학 졸업과 고시공부를 뒷바라지하였다. 아버지의 공부가 길어지면서 그만큼 엄마의 고생은 깊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런 엄마의 순애보는 젊은 날부터 유명해서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고, 옛날 '로맨스'라는 잡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때 나는 아주 어렸지만, 고 고운 엄마가 대학가에서 노점을 하며 고구마를 굽던 모습과 잡지 속 흑백사진을 또렷이 기억한다.






  오랜만에 나는 태안에서 잡았다는 금게와 뼈에 좋다는 홍화씨 기름을 사들고 엄마를 방문하였다. 엄마는 최근 아버지께 족욕을 해 드리다 주변 물기에 미끄러져 허리가 골절되셨다. 병원에서 시술을 받고 환자용 허리 복대를 고 있는 엄마에게 게찜을 해드렸다. 입맛이 없다고 한동안 누룽지만 드시던 엄마가 이제야 입맛이 도는가 보다. 창백해진 울 엄마 얼굴에 화색이 돈다. 동생도 엄마가 먹을 반찬을 바리바리 들고 들어섰다. 셋이 되니 화제가 만발해서 참 좋구나, 라고 말하 엄마는 나이 들면 외롭고 병들면 더 외로운 노인의 심정을 숨기지 않는다.


  밤이 늦어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이번에는 연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하신다. 엄마는 아버지가 투병하기 시작한 뒤로 부쩍 고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다. 내참, 뭐가 그리도 고마운지,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쥐구멍라도 숨고 싶다. 자주 찾아뵙는 것이 효도일 텐데, 멀리 산다는 이유로 그러지 못해 늘 마음에 걸린다. 아파트에 엄마만 남겨두고 나오려니 발걸음이 무겁다. 그래도 딸들의 방문으로 힘을 얻은 엄마는 허리 치료에 열중할 것이고, 한 고비를 넘기신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오시면 다시 아버지를 사랑으로 지켜낼 것이다.



  한때 나는 엄마가 아버지를 그만 내려놓기를 간절히 바랬다. 제행무상,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니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누구라도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있다고, 그것이 가족이라면 너무나 가슴 아프고 힘들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려놓아야 할 때가 온다고, 강변하였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과연 숨이 넘어가는 순간까지 당신 생의 전부인 존재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는 것이 어리석다고만 할 수 있을까? 엄마는 죽어서 아마나는 이렇게 살았노라, 큰소리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너무 애쓰는 엄마가 안쓰럽다. 울 엄마의 순애보는 언제쯤 끝나려나? 

평생을 천생연분으로 사랑을 키워가는 울 엄마의 순애보는 오늘도 현재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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