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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12. 2020

사려니 숲 나의 꿈길

제주, 나의 인생 숲

 


  숲은 쉼이다. 일상의 쉼표가 되어 준다. 거친 모래바람을 만나 가슴이 서걱거린 날, 숲은 토해낸 한숨을 받아내고 깊은숨의 바다가 되어준다. 짙은 초록으로 위로를 건네며 말없이 안아준다. 인생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정신없이 남들 따라 달리느라 자신을 잃고 헤매게 될 때, 누구나 찾아가고 싶은 자기만의 숲이 있다. 도시 사막을 헤매며 50이란 나이의 문턱에 걸려 넘어진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의 숲을 찾아 나섰다. 제주 섬에 둥지를 틀고 간세가 되어 나를 다그쳐 온 도시의 속도에서 벗어났다.


  어느 여름날 '신령스러운 곳'이라는 의미의 사려니 숲 숨결이 내게 닿았다. 붉은 송이가 곱게 깔린 숲길은 때마침 피어오른 안갯속에서 산수국이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꽃길 따라 병정처럼 줄지어 선 삼나무는 늠름하게 산수국을 호위하였다. 활엽수 나무들은 손을 뻗어 저마다 향기로운 사연을 풀어내며 시를 쓰고 있었고, 백일장이 열리고 있는 숲은 곧 아름답고 거대한 시집이 되었다. 나도 따라 글을 적어 내려가자 가슴 밑바닥에서 행복한 꿈이 솜사탕처럼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산수국이 핀 사려니 숲길



  느린 섬 제주에도 가을이 찾아왔다. 한바탕 제주의 올레길 축제를 즐기러 밀물처럼 밀려들던 친구들이 모두 떠났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찾은 사려니 숲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감이 돌았다.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 아주 가끔씩 사르륵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번잡하지 않은 숲을 찾아 한가로이 걸으니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숲은 호젓해야 제 맛이다.

  

  숲을 완주하려던 나는 오랜 세월을 견뎌낸 단풍나무에 이끌려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바닥은 수북이 떨어진 단풍잎으로 폭신해 보였다. 사부작사부작 단풍나무 곁을 맴돌았다. 마른 나뭇잎이 사각거리며 숲의 적요가 깨어났다. 순간 붉은 땅에서 발바닥으로 불이 붙었다. 화들짝 놀라 내려다보니, 불은 삽시간에 다리를 타고 가슴으로 번져 올랐다. 꿈이 활활 타오르며 나의 꿈나무에도 단풍이 들었다.



사려니 숲 단풍나무



   밤새 눈이 내렸다. 제주에서 만난 친구들은 지난가을 약속을 했다. 첫눈이 오면 하얀 사려니 숲길을 걸어보자고. 우리는 이심전심으로 설렘을 안고 버스정류장에 모여들었다. 눈 내린 출근길이라 버스는 만원이었다. 내내 자리에 앉지도 못하고 꼬박 서서 516도로 산길을 넘었다. 교래 입구에서 내려 숲길로 들어섰다. 조릿대가 도열한 숲길 따라 은빛 카펫이 구불구불 끝없이 펼쳐졌다. 사진을 찍으면 자동으로 흑백사진이 되었다.

 

  새벽에 노루가 앞서 간 길을 따라 걸었다.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뽀드득 소리는 동심의 세계로 달려가는 기차 바퀴가 되어주었다. 우리가 당도한 종점은 꿈속에서나 닿을 수 있던 하얗고 순수한 소녀시대였다. 한바탕 같은 꿈을 꾸고 우리는 배고픈 까마귀만 남겨둔 채 천미천에서 하얀 징검다리를 건넜다. 따뜻한 서귀포로 돌아오니 어디서도 눈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었다. 하얀 꿈에 취한 나는 깊은 겨울잠에 빠져들었다.


   동면을 하는 동안 북풍을 타고 날아온 바이러스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한동안 머문 서울의 하늘은 온통 잿빛이었다. 광화문 거리도 활기를 잃어갔다. 다시 봄이 오기는 하는 걸까? 코로나 19에 꽁꽁 묶인 마음이 암울했지만 다시 돌아온 제주는 여전하였다. 동백과 매화, 유채꽃이 앞 다투며 반겨주었고, 벚꽃도 수줍게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서서히 한라산 자락도 봄옷을 갈아입었다. 다들 조심하며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는 동안 나는 매일 한 발씩 내면으로 침잠하여 드디어 심연에 착륙하였다.



하얀  꿈길 사려니 숲



  화창한 5월의 어느 날, 사려니 숲에서 나를 부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배낭을 메고 다시 신발끈을 조였다. 숲길 초입부터 습기를 머금은 쌉싸래한 더덕 향기가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요정처럼 다가왔다. 이끼와 넝쿨로 뒤덮인 나무는 원시의 세상을 연출하며 연둣빛 사연을 담아냈다. 신록이 주는 기쁨은 어지럽게 흩날리는 벚꽃보다 깊고 차분했다. 나뭇잎이 그림자를 살포시 떨어뜨리자 햇살은 지르밟기 아까운 영롱한 그림을 그려냈다. 새들은 고뇌하는 법을 모른 채 삶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오감을 자극하는 사려니 숲은 들뜬 봄날을 섬세하게 연주하며 나의 발길을 이끌었다.


   마침 때죽나무(종낭) 꽃들의 잔치가 열리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작고 향기로운 종을 종종종 매달고 땅을 향해 수줍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들은 오리 십리나 되는 숲길을 지치지도 않고 줄지어 서서 작은 종을 앙증맞게 흔들어댔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피고 지는 산딸나무 꽃들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꼿꼿이 쳐드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귀를 간질이던 종소리가 점점 거세지며 사려니 숲을 가득 채웠다. '뎅그렁뎅그렁' 종소리가 마음속으로 흘러들었다. 겨우내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나의 꿈을 흔들어 깨우며 나직이 속삭였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야."



때죽나무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봄날의 사려니 숲



  꿈을 찾아가는 길은 진정한 삶의 여정이다. 뒤늦게 글을 쓰면서 찾게 된 행복을 놓치지 않으려고 나는 매일 아침 글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러다 꿈이 더욱 간절해지는 날, 나는 만사 제치고 사려니 숲으로 달려간다. 그곳에서 다시 나무들의 시를 읽고 나를 가슴 뛰게 하는 꿈을 기억한다. 초록의 에너지를 충전받아 기쁘게 나의 책상으로 돌아온다. 나무처럼 당당하게 나의 이야기를 꽃피우고 향기 날리는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을 꾼다.


  사려니 숲!

  내 인생의 숲, 사려니 숲은 나의 꿈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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