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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16. 2020

'소라의 성'과 왈종 미술관

제주, 나의 인생 숲



   "혹시 '소라의 성'을 기억하시나요?"


   90년대와  2000년대 초 서귀포를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정방폭포 근처에서 식사 때가 되어 우연히 들렀는데, 범상치 않은 건물 외관과 풍광에 놀라고 음식 맛에 한 번 더 놀라서 지금도 '소라의 성'을 그리워하고 있는 이가 분명 있을 것이다. 만일 당신그러하다면, 오늘 문득 빛바랜 추억을 함께 도란도란 나누고 싶군요.

 

   




  아침부터 비가 내린다. 바다엔 안개가 자욱하고 거실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섶섬이 구름모자를 썼다 벗었다 변덕을 부린다. 게으름 피우기 딱 좋은 날씨다. 나는 오래간만에 늦잠을 자고 오전 내내 집안에서 빈둥거리다가 비가 조금씩 잦아지기 시작해서 우산을 들고 동네 산책을 나섰다. 정방 폭포로 흘러드는 정방천은 용천수에 빗물까지 덮치자 수량이 급증하여 흙탕물을 콸콸 쏟아내고 있었다. 하천을 건너는 다리에 출입을 금하는 노란 줄이 쳐져 있는 걸로 봐서 중국 공원으로 통하는 길은 이미 물에 잠겼음에 틀림없다.


   할 수 없이 공원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아스팔트 길로 돌아섰다. 지난봄부터 돌담 위엔 다양한 색깔의 가자니아 꽃이 릴레이를 하며 피고 지고 있었다. 서복 전시관 앞 갈래 길에서 나는 정방 폭포와 소정방 폭포로 이어지는 올레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이름하여 '작가의 산책길'이다. 나는 오늘 이 길의 종점인 '소라의 성'을 둘러볼 참이다. 한때 명성이 자자했던 해물탕집 '소라의 성'은 올레 본부를 거쳐 요즘은 서귀포시에서 북카페로 운영을 하고 있다. 변신을 거듭하며 지역주민의 쉼터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정방 폭포 앞에서 올레 리본을 따라 몇걸음 옮기자 성채와도 같은 '소라의 성'이 야자수 사이로 반긴다. 이 건물은 설계도가 남아 있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지만, 다들 건축가 김중업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제주의 뿔소라를 닮은 외관이 그의 건축에서 보이는 유려한 곡선미와 너무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검은 현무암과 하얀 회벽이 대조를 이루며 소라의 몸통과 뿔소라의 껍데기를 연상시킨다. 주상절리가 발달한 절벽 아래로는 소정방 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내며 투명하게 바다로 흘러들고, 앞바다에는 문섬이 그림처럼 둥둥 떠 있다.   



해안 절벽 위에 우뚝 솟은 '소라의 성'

         


  "사탕옥수수예요. 방금 찐 거예요."

  "이 비싼 걸 가져오셨어요? 딸아이가 좋아해서 보내 주고 나는 아직 먹어보지도 못했는데..."


   하루 종일 무료하게 앉아 있을 북카페 지킴이에게 옥수수를 내밀자 반색을 한다. 책을 읽으러 왔다고 하니 이번에 새책이 들어왔다고 알려준다. 내 연배로 보이는 그녀는 서귀포 토박이로 '소라의 성'의 산 증인이었고, 지난번 방문 때 우리는 한참 수다를 떨었었다. 나는 읽고 싶던 책을 두 권 찾아들고 조용한 이층으로 올라갔다. 몇몇 사람들이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독서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서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25년 전의 문섬이 손에 잡힐 듯 바로 거기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90년대 중반, 나는 '소라의 성'을 처음 만났다. 가족여행으로 제주도를 유람하던 어느 여름날, 서귀포를 지나다가 우연히 상호에 이끌려 문섬이 바라보이는 식탁에 앉았던 것이다. 그 당시 나는 아직 지중해를 만나기 전이었지만, 분명 지중해보다 여기가 더 아름다울 거라며 섬의 이름마저 문(moon)이라니 낭만의 극치라고 치켜세웠다. 전망에 버금가는 해물탕 맛은 내게 미각의 신세계와 함께 황홀한 추억을 남겨주었다.

(사실은 일본인들이 산호가 아름다운 문섬에 모기 문(蚊)을 붙여 제주인들의 접근을 막았다고 한다.)



북카페로 변신한 '소라의 성'



  '소라의 성'은 내가 기억하는 제주도 최고의 맛집이다. 하지만 해외여행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내 기억에서 서서히 잊혀갔다. 한동안 해외를 돌다가 지쳐갈 즈음, 제주도에 올레길이 생기면서 '소라의 성'에 대한 기억이 스멀스멀 되살아났다. 그러자 나의 혀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해물탕을 다시 한번 먹을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처럼 애가 타기 시작했다. 나는 올레길을 걸으며 기억을 되살려 '소라의 성'을 더듬더듬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애타게 찾은 성은 패망한 나라의 왕궁터처럼 잡풀이 무성한 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버림받은 왕처럼 위용을 잃은 지 오래되었고, 폐허가 되어 곧 파도가 덮쳐 삼켜버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세월이 하도 무상하여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멋지고 맛있던 집이 문을 닫은 이유를 알지 못한 채, 허망한 마음을 달래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상실감이 어찌나 크던지 나는 두고두고 나의 무관심이 부른 참사라고 자책하였고 상사병이 날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제주도민이 되어 다시 찾은 제주에서 나는 결국 슬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소라의 성'은 주인이 갑자기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낙석과 붕괴의 위험까지 겹쳐 문을 닫게 되었다고 하였다. 돌아가시기 전, 그는 서울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하던 이왈종 화백이 제주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하루 3번씩 식사를 챙길 정도로 절친이 되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이왈종 화백은 정방폭포 앞에  '왈종 미술관'을 건립하였고, 그를 생각하며 직접 만든 향로에 매일 향을 피운다고 하였다.                                            


  나는 그들의 우정에 매료되어 왈종 미술관으로 향하였다. 왈종은 친구를 향한 그리움을 향로에 모두 쏟아부은 듯하였다. 전시장 곳곳을 장식한 향로는 미술관의 중앙을 장식하는 기둥처럼 커다란 것부터 화병이나 찻잔 같이 아담한 크기까지 실로 다양하였다. 향로로서는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는데 동백꽃과 새, 물고기, 골프채까지 등장하며 제주 생활에서 만나 함께 나눈 소소한 기쁨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새겨놓았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만큼 깊고 강렬해서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우정이 예술로 승화되었다.



'소라의 성'을 그리워하는 왈종 미술관



   나는 오늘도 '소라의 성'을 다녀오면서 왈종 미술관 앞을 잠시 서성거렸다. 도자기 닮은 멋진 미술관은 애잔한 그리움을 가득 담은 향기로운 커피잔 같았다. 아름다운 서귀포 바다를 원 없이 내려다보고 싶어서 죽으면 자신의 뼈를 넣어달라고 했다는 옥상의 조형물은 왈종의 분신이 되어 먼저 길을 떠나는 친구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듯하였다. '소라의 성'과 왈종 미술관, 그들은 지척의 거리에서도 닿을 수 없는 안타까운 운명을 속으로 삭이며 그렇게 그리움의 화신으로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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