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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10. 2020

반전의 매력 체 오름

368개의 오름을 앞에 두고

  


   "어디부터 갈까?"


   368개의 제주 오름을 앞에 두고 나는 늘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한라산 자락에 봉긋하게 솟은 오름은 500명의 아들을 길러낸 거인 설문대할망의 젖가슴처럼 풍만하다. 제주바다와 한라산의 매력에 빠져 제주도를 찾던 이들이 올레길에 반해서 이를 단숨에 완주하고 나면, 그다음 발길은 자연스레 오름으로 향한다. 길어야 30분 안에 오를 수 있는 오름은 작은 수고 뒤에 몇 배의 희열과 자유로움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오름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한라산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광활하고 거침이 없다.



    체 오름에서
나는 시간을 넘어선 장대한 후박나무를 만났다.



   체 오름은 오름의 여왕이라 불리는 다랑쉬를 제치고, 나의 오름 인생 5년 만에 최고의 오름으로 등극하였다. 이는 오로지 오름 산행 막다른 숲길에서 운명처럼 맞닥뜨린 후박나무 때문이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 홀로 영원의 시간을 버텨온 후박나무가 뿜어내는 생명력은 강인했다. 오랜 세월 근육을 갈고닦은 불끈한 줄기는 가지마다 가득 자손을 달고 일가를 이루고 있었다. 좌우로 균형 잡힌 몸매가 흠잡을 데 없이 늠름하고 우아하였다. 처음 마주한 순간, 후박나무는 성큼 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체 오름의 절정, 후박나무



   나는 친구와 함께 체 오름을 찾아 나섰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송당 마을 뒤편의 비포장 도로 한가운데였다. 나보다 한 발 앞서 제주에 정착한 그녀는 오름에 관해서라면 마당발이었지만, 체 오름은 그녀도 초행인지라 입구를 찾는데 애를 먹었다. 할 수 없이 길 한쪽에 차를 세워두고 우리는 남쪽 능선을 향해 치고 올랐다. 측백나무 군락을 헤쳐가자 7부 능선부터는 온통 가시덤불이다. 덤불 사이로 사유지를 표시하는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사스레피 꽃향기가 진동하며 오름 군락이 아스라이 펼쳐지는 능선 아래로 비고 117m 깊이의 굼부리(분화구)가 깎아지른 듯 아찔했다. 스릴이 더해지자 체 오름은 금지된 장소의 매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체 오름은 모양이 곡식을 까부는 키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키'의 제주 방언이 '체'인 모양이다. 좁은 능선길을 완주한 우리는 북쪽 끝의 내리막길을 따라 굼부리 안으로 들어섰다. 굼부리가 동쪽으로 트여있는 걸로 봐서 오름 입구는 아무래도 그쪽인 것 같았다. 마을로 전기를 실어 나르는 송전탑도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자연 병풍이 만든 너른 분화구는 엄마의 자궁처럼 아늑하고 평화로웠다. 세상 풍파를 겪어보지 못한 강아지풀만이 바싹 마른 몸을 서로 부대끼며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오름 입구에 용암이 쓸려가며 쌓아놓은 듯한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언덕에 올라서서 체 오름을 마주하였다. 가운데 분화구를 품고 남북으로 둥글게 둘러싼 산세가 웅장하였다. 시든 수련 잎이 간간이 떠있는 잔잔한 연못에 제 모습을 비추며 길게 누워있었다. 방금 전 우리가 내려온 길은 오름의 가르마를 가파르게 타고 올랐다. 언덕 뒤쪽엔 자연동굴이 숨어 있었다. 최근에 알게 된 체 오름 주인장으로부터 이곳에서 영화 '봉오동 전투'를 촬영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양한 보물을 간직한 체 오름이 더욱 흥미진진해졌다.



연못에 비친 체 오름의 웅장한  자태



   체 오름의 1막이 능선길이라면, 2막은 굼부리와 후박나무를 이어주는 동백길이다. 체 오름의 남쪽 사면을 따라 동백나무 숲길로 들어서자 새들의 달뜬 지저귐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숲길 가득 맑게 퍼져나가는 새소리의 삼매경에 빠져 주변을 둘러보지만, 새들은 재빨리 숨어들고 대신 동백꽃망울이 빠끔히 얼굴을 내밀었다. 꽃과 새들에 홀려 한 발씩 내딛다 보면 어느덧 후박나무가 숨바꼭질하고 있는 체 오름의 가장 깊숙한 곳에 다다르게 된다.


  마침내 후박나무에 다다랐다. 누구라도 첫눈에 반할 만큼 매력적인 후박나무는 체 오름 산행의 절정, 반전의 피날레요 황홀한 해피엔딩이었다. 발치에 앉아 숨을 돌리자, 후박나무는 다정한 손길로 나그네의 땀을 닦아주었다. 우리는 문득 아득한 시간 너머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후박나무는 얼마나 오랜 세월 이 자리를 지켜온 것일까? 후박나무 씨는 어느 바람을 타고 여기까지 날아왔을까? 천지가 개벽하며 체 오름이 솟아오르던 그날까지 영원한 시간의 우물 속에 생각의 돌 하나를 던져보지만, 깊이가 까마득하여 바닥에 다다를 수는 없었다.


   "결코, 너를 잊지 않을게"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인사를 나누었지만 선뜻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나는 슬며시 후박나무 씨앗 하나를 가슴에 품었다. 후박나무는 하루하루 그리움을 먹고 자라는 나의 나무가 되었다.



   *****************



  <<잠깐만요~~>> 체 오름은 사유지입니다. 방문객의 쓰레기 투척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어서 허락없는 출입을 금하고 있습니다 . 방문을 원하시는 분은 체 오름 입구에 적혀 있는 주인장의 전화번호로 연락하여 허락을 받고 출입하셔야 합니다. 꼭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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