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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ra 유현정 Jun 10. 2020

설문대할망의 품 안에서

왜 제주도인가?

  


  제주도민이 된 이후 나는 서울에서 볼 일을 마치기가 무섭게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일이라고 해봤자 명절이나 제사, 어버이날과 친정부모님 생신 등 손으로 꼽을 정도지만, 간 김에 친구들도 후다닥 만나고 미련 없이 돌아선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끌어당기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나는 매번 그렇게 제주도로 날아오른다.  

 

왜, 제주도인가?


  공항을 빠져나오면 야자수 사이로 얼굴을 내미는 제주 하늘이 무작정 반갑다. 크게 심호흡을 하면 바다 습기를 머금은 달짠한 공기가 폐에 가득 차오르고, 나는 그제야 제주를 실감한다. 곧바로 빨간색 급행버스에 몸을 싣고 516도로 산길을 넘어 서귀포로 내달린다. 성판악을 지나 숲터널을 가로지르고 도로가 구불구불 가파르게 내리 꽂히면 멀리 서귀포 바다의 수평선이 눈높이로 펼쳐진다. 나란히 파도를 타고 있는 섶섬과 문섬이 눈에 들고서야 나는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든다.


  서울에선 번잡했던 마음이 제주에만 오면 단순하고 평화로워지는 걸 또렷이 느끼게 된다. 그저 바쁜 도시를 벗어났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은 챙겨야 할 부모님과 가족에 대한 의무감에서 해방된 자유로움 때문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아니었다면 이리 달콤할 수가 있을까? 한라산 설문대할망의 너른 품이 없었다면 이토록 완벽하게 평화로울 수 있을까?  



한라산 설문대할망의 모습



  서귀포에선 한라산이 가까이 바라보인다. 그래서인지 여기 사람들은 한라산 봉우리를 제주 섬을 창조한 '설문대할망'이라 부르며 친근하게 느낀다. 머리를 동쪽 방향으로 길게 풀고 누워계신 모습이 영락없는 할머니 모습이다. 맑은 날은 짙은 음영의 눈두덩과 광대뼈, 입 주변과 뺨까지 깊게 파인 주름, 턱 밑으로 축 늘어진 목살과 작고 낮은 코의 콧방울까지 세세하게 보인다. 간혹 날이 흐려서 실루엣만 보이는 날은 얼굴의 주름이 펴지며 처녀시절로 돌아가는 마술을 부리기도 한다.


  신기하게도 할머니의 얼굴은 서귀포에서만 보인다.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읽었던 너대니엘 호손의 작품, '큰 바위 얼굴'이 떠올랐다. 주인공 어니스트가 어머니로부터 바위를 닮은 아이가 태어나 훌륭한 인물이 될 거라는 전설을 전해 듣고, 언젠가 그와의 만남을 고대하면서 바위를 닮아간다는 이야기다. 나는 서귀포 사람들의 친절과 아량이 설문대할망의 너른 품을 닮고자 하는 무의식의 노력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설문대할망은 봄이면 고운 연둣빛 옷을 입고 천상에 철쭉 화원을 가꾸시고, 가을이면 제주 섬 여기저기서 열리는 축제를 다녀오시려는지 비단옷으로 단장을 하신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 짙은 초록색 옷을 입고 누워있는 모습은 왠지 할머니께서 깊은 오수에 빠진 듯하여 가능한 발걸음을 삼가게 된다.


  북풍이 몰아치는 겨울날, 밤새 함박눈이라도 내리면 할머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에 뽀얀 분칠을 하고 긴 잠에서 깨어나신다. 그 순간 할머니의 모습은 제주의 그 어떤 미인보다도 아름답고 신비스럽다. 나는 멀찍이 바라보며 경외를 하다가도, 가끔은 할머니의 품에 와락 안기고픈 마음에 당장 아이젠을 차고 영실코스로 설국 여행을 떠난다. 등산로의 마지막 계단을 오르고 구상나무 숲을 가로질러 탁 트인 선작지왓에 도달할 즈음이면, 화끈한 성취감과 함께 깃털 같은 자유로움이 한라산 줄기를 타고 무한하게 날아오른다.



영실 계곡에서 만난 설문대할망

  


   어느 날 나는 한라산 병풍바위를 지나쳐 오르다가 계곡 아래 눈으로 만든 두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바위에 앉아 계신 설문대할망을 만났다. 놀란 가슴에 꿈은 아닌지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내려다보니, 그녀는 오백 명이나 되는 아들들의 밥을 짓다가 잠시 숨을 돌리고 앉아 있는 평범하고 다정한 엄마의 모습이었다. 그날 운명처럼 내 앞에 친히 현현해주신 설문대할망은 내 안에서 온전히 살아나셨고, 이제는 나와 함께 제주 섬을 누빈다.


   매일 아침 산책길에서 멀리서나마 설문대할망의 안녕을 살피면, 할머니는 거대한 품 자락을 내보이며 내게 커다란 영감을 주신다. 지친 나를 비롯하여 누구라도 품어주는 한라산, 나는 내 마음의 평화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또 무엇이 나를 그토록 잡아끌었는지 이제는 또렷이 말할 수 있다. 언제나 설문대할망의 넉넉함을 배우고자 하는 나는 남은 인생을 제주 섬에 뿌리내려야 하는 충분한 이유마저 찾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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