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생로병사의 단계가 있다면, 자연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의 사계절이 있다.스스로 존재하고 저절로 이루어지는 자연은 우리 인생의 거울이고 스승이다. 어쩌면 신은 찰나의 인생을 살다가는 나약하고 미숙한 인간을 위해 영겁의 위대한 자연이라는 장치를 마련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자는 자연에서 겸허하게 배우고, 어리석은 자는 자연을 배반하고 거스르려 한다. 박노해 시인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문장을 빌려와 그의 시 '계절이 지나가는 대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나는 계절이 지나가는 대로
계절을 따라가며 살아가리라
그 계절의 바람을 맞고
그 계절의 공기를 마시고
계절이 입혀주는 옷을 입고
계절의 여신이 주는 물을 마시리라
나는 봄과 함께 파릇파릇해지고
여름과 함께 초록불로 타오르고
가을과 함께 고개 숙여 익어가고
겨울과 함께 하얗게 떨리라
나는 내가 발 딛고 선 대지의
계절 속으로 걸어 들어가리라
제주국제실험예술제(JIEAF)는 절정을 향해 내달렸다. 이틀간의 아트 콘서트와 그다음 날의 워크숍, 또 다른 날의 마켓 퍼포먼스까지 실로 숨 가쁜 일정이었다. 이제 축제의 마지막 날, 드릇팟의 피날레 공연 '사계'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사계'의 무대는 서귀포 농업기술센터 안의 너른 자연 속에서 연못과 녹차밭, 바람의 언덕과 미로 공원이 무대가 되어 관객을 이끌고 이동하며 진행될 예정이다. 마침 감귤박람회도 폐막을 앞둔 주말이기에 가족 단위로 참여한 사람들까지 구경꾼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다.
계절의 시작인 봄은 언제나 생명의 신비를 드러낸다. 연못은 생명을 잉태하기에 딱 맞춤인 공간이었다. 생명과 죽음의 정령들이 생사의 경계를 허물며 연못 위 데크에서알에서 새가 깨어 나오듯, 자궁 속의 태아가 꿈틀거리며 태어나기를 기다린다. 커다란 천 속에서 생명체가 요동치며 몸부림을 친다. 생사를 넘나들며 영원 같던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생명체의 몸짓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생명의 정령은 탄생의 기쁨을 만끽하고, 죽음의 정령은 극심한 산고를 치른 어미처럼 온몸을 뒤틀며 데크 바닥과 난간 위로 널브러졌다.
기다렸다는 듯 돌담 위에서 바이올린과 첼로, 콘트라베이스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부드럽고 감미로운 산들바람이 스치는 봄날의 향연이었다. 탄생을 축하하는 신성한 의식 속에서 뒤늦게 우렁찬 울음소리와 함께 생명체가 얼굴을 드러냈다. 독수리가 날개를 털며 세상을 향해 비상하듯, 사자처럼 포효하며 지상에 당당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것은 실로 위대한 탄생이었다. 사물놀이 패가 신명 나는 리듬으로 인도하자, 이제 여름을 향해 걸음마를 뗄 시간이왔다. 인생의 봄날을 즐기던 관객도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탄생의 기쁨으로 포효하는 기예르모
그들이 당도한 곳은 싱그럽고 너른 녹차밭이었다. 깔끔하게 이발을 마치고 가지런히 줄 맞춰 늘어선 초록의 차나무 위로 오색천이 화려하게 수를 놓았다. 뒤쪽에서는 두둥둥 난타의 북소리가 우렁차게 울리며 환호하듯 뜨거운 여름을 맞이하였다. 꿀벌 맨도 다들 녹차밭에 내려앉았고 이글거리는 태양의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얼굴을 갈대로 칭칭 두르고 두 팔을 깃털로 장식한 구스타프는 땅 속에서 부르르 털고 깨어나 돌담 위로 올라섰다. 기나긴 기다림 속에서 세상으로 방금 얼굴을 내밀고 그토록 짧은 생의 기쁨을 노래하였다.
절로 두근거리며 가슴 뛰는 청춘, 여름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계절인 동시에 성장으로 치닫는 열정의 계절이다. 함께 참여한 존재들이 다들 사랑에 들떠 있을 때, 녹차밭 한가운데로 초록의 기운을 가진 기예르모와 지오가 등장했다. 대지와 호흡하는 건강한 농부의 삶, 역동적이면서도 애환이 담긴 그들의 격정적인 춤 앙상블은 관객의 시선을 모았다. 모든 행위가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실험예술 퍼포먼스에서 둘의 멋진 호흡은 평상시의 우정을 가늠케 하였다.공중의 스피커를 타고 모카의 보이스까지 더해지자 아름다운 음의 진폭이 가슴으로 파고들며 다들 열락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 저만치서 손짓을하니, 자연의 순리대로 이제 인생은 청춘을 졸업하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80여 명으로 구성된 아티스트의 동선을 따라 골프장의 갤러리처럼 관객이 함께 이동해가며 장관을 이루었다. 풍성한 귤밭과 한라산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설문대할망이 빙그레 소리 없이 굽어보는 가을의 무대 '바람의 언덕'으로 다들 모여들었다. 가을바람을 만난 꼬리연이 훨훨 자유롭게 춤을 추고, 몸집이 커다란 돌하르방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결실의 풍요로움에 감사함이 넘치는 계절, 인간은 신과 대자연에 정성껏 추수감사제를 올린다. 모로코의 사막 부르스 오마르가 노래하고,제주어로 노래하는 뚜럼브라더스도 흥을 돋우고,대 붓으로 멋들어지게 페인팅 퍼포먼스를 하면서 신께 축배의 잔을 올린다. 관객들도 함께 참여하는 시간,남녀노소 할 것 없이 진하게 어우러지며 한바탕 흥을 돋웠다. 삶의 기쁨을 만끽하며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가 두루 자연에 녹아들었다.
계절은 이토록 스스로 충만한데, 우리는 지금 인생의 계절 어드메를 서성거리고 있는 것일까? 이제 모두가 발 딛고 서 있는 계절 속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갈 때가 온 것 같았다.
드디어 마지막 계절 겨울이 도래했다. 누구에게나 생의 마지막 길인 죽음은 미지의 길, 무대는 절묘하게도 미로 공원이었다. 하얗게 분장한 부토 댄서들이 줄줄이 입장했다. 그들은 죽음의 정령답게 영혼의 춤으로 망자를 에스코트한다. 독일의 디륵은 큰 키에 발끝까지 내려오는 하얀 옷을 입고 홀연히 나타나 신의 정령으로서 나무와 나무를 하얀 실로 연결하며 함께 한 모든 이들의 마음을 연결해주고, 삶과 죽음마저도 하나로 이어주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이처럼 한 해를 계절로 나누고, 때때로 친절하게 광선을 기울이는 신이 고맙다. 겨울에는 신이 가장 가까이 있으니, 가장 짧은 날에 가장 똑똑히 보인다.
- `영혼의 계절’, 헨리 데이비드 소로 -
겨울은 신과 함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길 바라며 삶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다.하늘을 우러르게 만든 무대는 드높은 가을의 하늘빛으로 더욱 찬란했다. 바이올린, 첼로, 콘트라베이스와 하모니를 이룬 모카의 보이스는 속세의 차원을 넘어선 아득한 천상의 소리로 거듭났다.이별의 장례의식은 장엄했으며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못내 아쉽지만 만물은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에 안녕을 고한다. 커다란 두 개의 풍선이 두둥실 하늘로 날아오르자 영혼도 이승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가볍게 가볍게 떠나는 듯하였다. 오쇼 라즈니쉬의 표현대로 어쩌면 생의 절정일 수도 있는 죽음의 순간이었다. 소풍처럼 살다 간 인생, 이제는 은하수에서 자유롭게 춤을 출 것이다.
삶의 위대한 순환, 사계
겨울은 다시 봄으로 이어진다. 죽음은 벽이 아니라 다른 차원으로 나아가는 문이 아니던가? 서귀포 농업기술센터 안의 자연 무대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된 드릇팟의 피날레 공연 '사계'는 다양한 예술의 장르를 통합하고 관객을 참여시키며 함께 대자연 속으로 녹아든 대서사시였다. 예술과 농업,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우러지며 상생하는 퍼포먼스였고, 대자연의 사계절을 삶의 위대한 순환으로 승화시키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축제에 참여한 아티스트와 스태프들은 “김백기! 김백기!”를 외치며 크게 환호하였다. 모두가 진심으로 김백기 감독에게 축하와 감사의 큰 박수를 보냈다. 그는 감정이 벅차오른 듯 금방이라도 쏟아낼 듯이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도 똑같은 심정으로 벅차올랐다. 우리는 다 함께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다. 고단했던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도 해냈다는 기쁨에 마음속으로는 환희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