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어딘가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2년 전 서귀포 관광극장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그녀의 내면으로부터 전해지는 깊은 울림을 들었다. 비트를 우물우물 씹으며 핏빛 국물을 뚝뚝 흘리던 그녀의 행위예술은 섬칫하면서도 우아했고, 한편으론 아련한 슬픔 같은 것도 함께 감지되었다. 한국인으로서 노르웨이의 국적을 가진 이력부터 늘씬한 체구에 동양적인 미모를 간직한 외모까지 그녀는 내 기억의 한편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그런 그녀가 제16회 제주국제실험예술제초청 작가로 제주도를 다시 방문했다. 짐짓 그녀가 궁금했던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실험예술제 첫날, 드릇팟 아트 퍼포먼스에서 그녀가 자신의 무대로 점지한 곳은 서귀포 농업기술센터 바람의 언덕에 자리한 귤밭이었다. 11월이면제주도는귤이 한창인지라 나무마다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아, 그런데 귤나무는 분명 결실의 계절 가을이 분명한데, 감귤을 피워내는 대지는 마치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얀 겨울 느낌이 아닌가? 이는 농업기술센터에서 시험재배를 하며 귤의 당도를 높이기 위해 하얀 필름지 타이벡을 바닥에 깔아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며 초현실적인 세계가 펼쳐 치고 있었다. 그곳을 무대로 선택한 그녀의 안목이 새삼 놀라웠다.
그녀는 귤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다. 그녀 앞에 펼쳐진 황금빛 보자기에는 대추 수십 알과 커다란 도라지 한 뿌리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십여 개의 대추가 꿰어진 실에 바늘로 한 알 한 알 대추를 엮으면서 퍼포먼스를 시작하였다. 그 모습은 주변의 초현실적인 배경으로 인해 마치 선녀가 내려와 앉은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가을인지 겨울인지 도통 계절을 분간할 수 없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예술행위가 너무나 환상적이어서 나는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 세상 모든 인간은 각자 개성을 지닌 개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홀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人)의 모양을 보면 서로 의지하는 형상이고, 인간(人間)은 사람 사이에서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인간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관계의 깊이와 폭은 사람마다 다르다. 부처님은 우주의 삼라만상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꿰뚫어 보시고 깨달음을 얻으셨다. 명상을 통한 의식의 확장은 실제로 부처님의 위대한 깨달음, 연기법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그녀는 평소 춤을 추고 명상을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다다른 내면을 행위예술로 표현한다. 작품의 깊이와 철학은 갈고닦은 의식과 생활방식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그녀의 행위예술은 몸짓 하나에 자신의 의식을 녹여내며 자연스레 그녀의 참모습을 담아낸다. 내가 그녀의 작품에 끌리는 이유이다. 그녀는 대추를 엮으며 그녀를 둘러싼 인연의 소중함을 되새겼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을 살면서 겪은 108가지 번뇌를 내려놓기 위해 정성스레 염주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대추알을 꿰며 이 세상 존재하는 모든 개체들이 결국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대추를 모두 꿰고 마지막으로 도라지를 끼웠다.도라지는 뿌리 식물이다. 그녀에게 뿌리는 어떤 의미일까? 고국에 부모, 형제, 친구를 남겨두고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멀리 북구의 나라 노르웨이로 떠난 것은 그녀의 숙명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사랑을 좇는다는 그녀지만 낯선 세계에서 일상으로 마주치게 되는 외로움은 뼈에 사무치고, 그리움은 그녀의 의식을 안으로 뻗어 내려 뿌리에 닿게 하였을 것이다. 자신을 이루었던 모국어와 풍습을 모두 벗어던지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 옷을 두르고 산다는 것은, 가슴 밑바닥에 보이지 않는 시꺼멓고 서늘한 구멍 하나를 간직하고 산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그녀는 완성된 염주를 모카의 목에 걸어주었다. 처음엔 관객에게 선사할 예정이었으나, 그녀의 공연에 찬조 출연한 모카가 임신 중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염주가 소중한 생명을 잉태한 모성에게 바쳐진 것은 의미가 있었다.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고 인연을 하나로 엮으며 번뇌까지 벗어버린 그녀는 두 팔을 올려 하늘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성스러운 기운이 그녀의 몸짓을 타고 주변으로 뻗어 나갔다. 귤밭 뒤로 병풍처럼 두른 한라산의 자애로운 설문대할망이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녀는제주도의 농경신 자청비로 환생한 듯하였고, 그녀의 손길이 머무는 곳마다 제주의 감귤은 더욱 탱글 거리며 익어갔다.
Love is ...
다음 해에도 그녀는 잊지 않고 제주도를 찾았다. 제17회 제주국제실험예술제를 앞두고 서빳에서도 그녀의 공연이 있다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달려갔다. 이번에는 카타리나와함께 듀엣으로 사랑 이야기를 들려줄 모양이었다. 그녀들이 얘기하는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졌다.
서빳의 무대는 오색 천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배규자는 초록색 천 뒤에서 머리에 실타래를 얹고, 카타리나는 빨간색 천 뒤에서 노란색 천 두루마리를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오색 천은 관계의 다섯 가지 차원을 상징한다. 육체적 관계에서부터 정신적, 감정적, 경제적인 관계와 영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관계를 의미한다. 사랑도 관계이다. 대상이 연인이든 친구이든 부모와 자식이든 사랑은 관계 속에서 자라거나 시든다. 노르웨이에서 활동하는 배규자와 카트리나, 두 작가도 함께 팀을 이루면서 관계 속에서 성장해왔을 터였다.
나는 배규자 작가가 머리에 오색 실타래를 이고 중심을 잡으며 홀로 걷는 행위에 주목했다. 자신의 정체성인 초록색 천을 따라 조심스럽게 걷다가 카타리나의 빨간색 천과 교차하는 지점에서 인연이 스쳤다. 인연이 필연을 넘어 운명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홀로서기가 필요하다.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만이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만이 상대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관계에 집착하지 않는다.
운명으로 마주한 그녀들은 오색실로 서로의 옷을 한 땀 한 땀 꿰어가며 관계가 얽히지 않도록 조심하였다. 한 사람이 상대의 옷을 한 번 꿰면 오색실이 상대에게 넘어갔고, 실을 건네받은 상대는 다른 상대의 옷을 꿰는 행위가 반복되었다. 그녀들은 주도권을 혼자 장악하지 않고 공평하게 나누면서도 서두르는 법이 없었고, 또 서로를 너무 가까이 묶어두지도 않았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균형을 맞추어 나갔다.
우리가 사랑을 처음 시작하고 그 열병의 고통으로 밤을 지새우게 될 때, 사랑의 정답을 얻고 싶어서 읽게 되는 책이 있다. 바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그 책에서 에리히 프롬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상대를 향한 소유욕은 나의 실로 강하게 잡아당겨 상대를 최대한 가까이 소유하려 할 것이고, 그렇게 구속과 집착으로 인해 팽팽하게 당겨진 실은 결국머지않아 툭 끊어지고 말 것이다.그런 경우에 대하여 에리히 프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럴 때 나는 패배하고 좌절한 가엾은 인간에 불과하며....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을 내기 마련이다. .... 사랑하는 행위에도 불안을 느끼며 자유, 성장, 변화의 미지의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진다.....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떠밀려서 방어적이 되며 가혹해지고 의심이 많아지고 결국 외로워진다."
퍼포먼스를 보면서 나는 `관계의 균형’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함께 본 친구는 그것조차 `구속’으로 느껴졌다고 하였다. 놀라웠다. 그녀는 여태껏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자주적이고 진취적이며 자유로운 사고의 소유자였으니, 그녀의 해석이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예술 감상도 결국은 개개인 사고의 프리즘을 통과한 것이다. 감상에는 정답이 없으니 더 재밌기도 하였다.
요즘 졸혼이나 해혼이란 말이 유행한다. 사랑을 할 때는 서로가 아름다운 구속이 되지만, 나이가 들고 때가 되면 서로가 끈을 풀어주는 것도 아름다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작가가 나이를 더 먹으면 그때는 서로를 엮었던 실을 거꾸로 풀면서 묶었던 혼인 즉 결혼(結婚)을 풀어주는 해혼(解婚) 퍼포먼스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배규자 작가가 이런 퍼포먼스를 한다면 무척 심오하고도 아름다울 것이다. 아무래도 주말 실험예술제에 참여하는 그녀를 만나 귀띔을 해줘야겠다고 생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