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토는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망한 후 정신적 충격으로 허무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전통예술인 노, 가부키와 서구의 현대무용이 만나 탄생한 아방가르드(전위주의) 무용의 한 장르이다. 우리에겐 아직 많이 낯선 부토지만, 유럽에선 이미 1978년 처음 파리에 소개된 이후 오늘날까지 유럽 무용계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무용은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사상과 감정을 미적으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무용이란 뜻의 댄스(dance)는 산스크리트어의 Tanha(탄하)가 어원이며 Tanha는 '생명의 욕구'를 뜻한다고 한다.생명을 가진 존재는 모두 표현의 욕구가 있다고 볼 때, 욕구를 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예술행위라 할 수 있겠다.
나는 무용이란 본디 화려하고 아름답고 역동적이라고, 막연히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러나 제주에서 부토를 만나고 나의 편견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부토는 얼굴과 몸에 흰 분칠을 하고 깡마른 상반신을 노출하거나 거의 알몸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화려하거나 아름답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그로테스크하여 기괴하다고 느낄 정도로 한참이나 낯설고 충격적이다. 템포는 또 어찌나 느리고 더딘지 역동적인 춤을 갈망하던 기대를 배반하며 단칼에 무너뜨린다.
그런데 참으로 요상하다. 부토는 마주하는 순간 섬칫하여 한 발 뒤로 물러서게 되지만, 곧 강렬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고독특한 매력을 발산하며 관객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주로 죽음이란 주제를 다루며 인간의 내면을 표현하다 보니, 얼굴 표정과 손짓 발짓 몸짓 하나하나에 깊고 내밀한 의미가 담겨 진솔하고 절절하게 다가오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부토는 단번에 관객의 선입견을 깨며, 아름다운 것만이 미가 아니라는 무용 의식을 확장해 나간다. 기존의 기교와 형식에 얽매이는 무용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리하여 김백기 감독의 표현대로,부토는 무용이라기보다는 그냥 `몸의 은유’ 또는 `사색의 몸짓’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겠다.
제17회 제주국제실험예술제에는 일본의 부토 무용가 테미츄 토시(Temmestu Toshi)가 초대되었다. 테미츄 토시는 내가 만나본 부토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과 시적인 감성을 지닌 예술가이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히 큰 키에 너무 과하지도 깡마르지도 않은 몸 곳곳에 보기 좋게 붙은 근육은, 그가 평소 얼마나 자신을 잘 관리하고 다스려왔는지를 한눈에 보여준다. 게다가 그가 보여주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서정적이어서 마치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읽은 것과 같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테미츄 토시는 축제 전날 서빳에서의 공연을 시작으로 제주 현대미술관에서 이루어진 실험예술제 공연까지 3일 연속으로 3색의 공연을 제주에 펼쳐놓았다. 덕분에 나는 조금씩 부토를 이해하며 그 낯선 세계에 깊이 그리고 맘껏 빠져들 수 있었다. 첫날 서빳의 공연은 실내 무대조명을 잘 활용하였다. 알을 품는 어미처럼 생명의 태동을 표현하며 시작한 장면은 시각적으로도 무척 신비스러웠다. 그는 선별한 음악과 함께 인간 내면의 희로애락을 다양한 느낌으로 섬세하게 표현하였고, 죽음의 춤 부토답게 공포나 고통과 같은 극렬한 표정과 몸짓이 압권이었다.
테미츄 토시의 서빳 공연
그러나 서빳의 공연은 서막에 불과했다. 나는 실험예술제가 열리는주말, 제주 현대미술관에서 또 다른 느낌의테미츄 토시를 다시 만났다. 그는 민머리와 얼굴, 상체를 하얗게 칠하고 세로로 길게 트인 검은색 의상을 하체에 두르고 무대에 섰다.야외무대인 현대미술관 뒤뜰은 초록의 나무와 잔디, 그리고 여러 점의 설치미술 작품까지 골고루 갖춘 아름답고 너른 마당이었다. 수년간 제주를 오가며 제주의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그는 마치 그곳에서 원래 살고 있던 자연의 정령으로 보였다.
공연이 시작되자 자연의 정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구를 낙원인양 감사히 즐겼고, 대지의 소리에도 겸허히 귀를 기울였다. 때때로 두 팔을 벌려 하늘을 우러르며 경배했고, 우주와 교감하며 생명의 기운을 온몸에 받아들였다. 그는 자연과 하나가 되었고, 그렇게 춤의 주체가 사라지자 텅 빈 자아는 자기 자신이기를 멈추었다.그리하여 자연의 일부로 또는 관객으로 존재하며 경계를 허물고 우주의 에너지를 주고받았다.
공연 도중 그는 아주 작은 들꽃을 발견하였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꽃을 놓치지 않고, 작품의 소재로 활용하였다. 순수하고 섬세한 자연의 정령이 들꽃을 어린 소녀 관객에게 건네는 장면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판타스틱하였다. 이러한 장소성과 현장성, 그리고 형식화된 룰을 깨고 무용수가 즉흥성을 발휘할 여지는 다른 예술과 차별되는 부토와 행위예술만의 참맛이었다. 그것은 실험예술제에 늘 부토가 초대되는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는 세상을 한껏 소풍처럼 즐기며 자신의 역할을 끝내고,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순리대로 그렇게 생을 마감하며 대지의 품에 고요히 안겼다.
마지막 날, 테미츄 토시의 세 번째 공연은 서빳에서 시작된 공연이 마침내 클라이맥스에 다다른 것 같았다. 전날의 무대가 이어진 듯제주 현대미술관 뒤뜰에 그가 빨간 망토를 두르고 다시 등장했다. 그런데 처음부터 음악이 심상치가 않다. 신이 진노한 듯했고, 그것은 인간에 대한 마지막 경종으로 들렸다. 아름다운 지구별의 가치를 제대로 모르고 자연과 생명을 함부로 대하고 훼손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에게 희망은 있는 것일까? 어리석은 인간들은 위기를 깨닫지 못하고, 그 사이 자연은 병들고 비틀거린다. 제발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지만 그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 인간은 들으려 하지 않고 외면한다.
테미츄 토시는 모든 생명의 고뇌를 대변하고 있는 듯하였다. 인간에게 짓밟힌 자연의 정령이 마지막으로 느끼는 절망과 고통이 그의 표정과 몸짓으로 그대로 과감 없이 전해졌다. 뭉크의 절규가 저리도 간절할까? 어떻게 저런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싶게 극도의 절망을 온몸으로 표현해냈다. 그의 절절한 고통의 감정이
클로즈업되면서 전이되어 나의 폐부를 예리하게 찔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테미츄 토시의 세 번째 공연은 내게 최고의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선사하였다.
나는 인간의 내면이 이토록 깊고 섬세하게 다루어지는 아름다운 춤을 본 적이 없다. 부토가 한국에선 아직은 생경하지만, 왜 유럽에선 이 춤에 열광하는지를 알고도 남겠다. 그 속에는 부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정신세계가 있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뿜어 나오는 섬세한 감수성으로 폭력, 기쁨, 분노, 슬픔 등 인간의 모든 감정을 표현하는 부토는 죽음까지도 넘나든다. 극도로 느릿한 동작 속에서 오직 삶을 향한 처절한 몸부림은 역설적이게도 지독히 역동적이다.
공연이 끝나고 잠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나의 감동을 전했다. 그는 감상은 전적으로 관객의 몫이라며 웃더니, 내가 내민 그의 공연 포스터 뒷면에 사인과 함께 감사의 인사를 적어주었다.
Thank you! Korea!!
영적이고 신비스러운 영혼의 춤 부토가 그렇게 내 안으로 쑤욱 들어왔다. 테미츄 토시(Temmetsu Toshi)가 따라서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