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인 폭염 속에서도 제주 현대미술관에서 진행된 한 달간의 실험예술제는 한여름의 열기를 뜨거운 열정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마지막 주 공연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알프레도가 참가하였다. 그는 작년의 예술제에도 참가한 작가였다. 서귀포 올레시장에서 마켓 퍼포먼스를 할 때, 나도 함께 다니며 도와준 인연이 있었다. 그는 이번 예술제에서 공연과 전시를 함께 준비하느라 다른 작가들보다 일찍 도착하여 서빳에서 틈틈이 전시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작년의 추억을 나누며 누구보다도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알프레도의 공연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이틀에 걸쳐 진행되었다. 1부에서는 무대 위에 모래더미가 준비되었고, 빨간색 테이프를 기하학적 무늬로 야외무대 바닥에 붙이는 행위가 계속되었다. 한마디로 1부는 본 공연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다음 날 본 공연에서는 모래더미가 한라산인 듯 제주섬인 듯, 가운데 분화구를 품은 멋진 작품으로 변신해 있었다. 공연 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나는 무대 위 한쪽에 자리를 잡고 바닥에 앉아서 촬영을 준비했다. 이번 예술제의 리뷰를 맡아 카메라 성능이 좋은 최신 스마트폰을 구매한 터였다.
식물의 땅 속 줄기
무대 위에는 전날 설치한 붉은색 테이프가 얼기설기 얽히며 땅 속 식물의 줄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알프레도는 모래로 쌓은 한라산을 작은 삽으로 헐어 스텐으로 만든 둥근 원통형 거름망에 모래를 담으며 공연을 시작하였다. 제주도에서 이루어지는 실험예술제라는 이미지가 제대로 살아났다. 그는 모래를 퍼 날라 테이프를 한쪽 끝부터 덮어나갔다. 테이프가 모두 가려질 때까지 거름망을 흔들어 모래를 쏟아내고, 다시 모래를 담아와 흔들며 반복되는 행위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은 어쩌면 짐짓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행위였지만, 관객들은 오히려 호기심이 이는 눈빛을 반짝거렸다. 알프레도의 표정과 행동을 살펴가며 구도를 잡아 연속으로 촬영을 하고 있던 나도 흥미진진할 정도였다.
천막 지붕을 걸친 야외무대 위로 7월 한낮의 태양이 이글이글 폭염을 쏟아내고 있었다. 관객과 배우 모두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열기에도 불구하고 알프레도는 땀을 흠뻑 흘리며 공연에 집중했다. 평소 약간은 장난스럽고 천진난만하던 사람이 갑자기 진지해지자, 나는 그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작품에 깊이 몰입하는 그의 모습에 빨려 들며, 나는 좀 더 많은 자료를 남기기 위해 동영상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품의 중반을 넘어서려던 순간, 나의 스마트폰이 갑자기 뜨거워지며 먹통이 되었다. 전원을 포함하여 모든 기능이 중지되고 만 것이다. 아뿔싸! 땡볕 아래서 무리한 작동을 하느라 배터리가 제대로 열을 받은 것 같았다. 너무나 난감하고 당황스러웠지만 공연을 놓치지 않으려면 사진을그냥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사이 알프레도는 테이프를 모래로 다 덮고 이번엔 모래 속에서 빨간 테이프를 찾아 뜯어내기 시작하였다. 테이프는 줄줄이 이어지며 끝까지 연결되어 따라 나왔다. 무대에는 모래를 헤치고테이프가 제거되며 만들어진 선이 또렷이 드러났다. 멋진 설치미술이 탄생하며,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땅 속에서 서로 얽히며 연결되어 있던 나무의 줄기와 뿌리가 모두 드러난 것이다. 그러나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어디 땅 속뿐이랴? 나무는 뿌리가 줄기로, 줄기는 잎으로 연결되어 이산화탄소를 받아들이고 산소를 뿜어낸 덕에 인간과 동물이 호흡하며 살아간다. 나와 너, 인간과 자연, 온 우주의 삼라만상이 서로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오늘의 퍼포먼스는 모든 존재의 고마움을 다시금 일깨우고 있었다.
공연 도중 알프레도는 얼굴로 땀이 비 오듯 쏟아지자 팔을 들어 반팔 옷으로 이마를 쓱 닦아냈다. 이마와 팔뚝으로 불끈 솟은 힘줄이 클로즈업되었다. 순간 나는 인생을 관조하듯 묵묵히 평생 자신의 일을 다하고 죽은 한 남자의 이야기, 장 지오노의 단편소설 <나무를 심는 사람>이 떠올랐다. 소설은 황무지가 된 어느 프랑스 마을에 중년의 양치기 부피에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반평생 도토리를 심어 수천 그루의 나무를 길러내서 풍요로운 숲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박노해의 사진 `천 그루의 나무를 심는 사람’도 스쳐갔다. 만년설 바람 속에서 전쟁으로 잃어버린 지상 낙원 카슈미르의 땅에 30년간 봄을 기다리며 천 그루의 나무를 심고 살려낸 사람의 이야기다. 그들이 심은 것은 나무만이 아니다. 절망의 땅에 희망을 심는 행위만큼 벅차고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 있을까? 어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평생을 헌신하며 끈질기게 노력하는 고귀한 영혼은 우리들 가슴을 적신다. 그들의 삶은 그 자체가 기나긴 행위예술이었다.
그날 내가 알프레도에게서 언뜻 본 것은 그의 생을 관통하며 흐르는 순수한 예술혼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벅차오르는 감동이었고, 공연이 끝난 후 나는 진심으로 알프레도에게 브라보를 외쳤다.
사진작가 허정환 님의 사진입니다.
알프레도는 행위예술가이자 업싸이클링 작가이기도 하다. 그는 늘 폐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이를 활용해 예술작품을 만든다. 공연이 끝난 다음 주말, 그는 서빳에서 자신이 틈틈이 만들어 온 작품을 전시하는 오프닝 행사를 이어갔다. 그를 축하하기 위해 와인을 사들고 서빳 공간으로 들어서던 나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예전의 익숙한 서빳이 아니었다. 잔잔한 음악이 공간을 가득 채운 빛과 그림자의 하모니 사이로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서빳은 완전히 너무나 사랑스러운 공간으로 업그레이드되어 있었다.
무도회에 나온 신데렐라처럼 백조가 된 미운 오리 새끼처럼
알프레도는 마술을 부린 듯하였다. 쓰레기통에 버려졌던 폐품에 그의 손길이 닿자 놀랄 만하게 멋진 작품으로 변신하는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바닥은 커다란 원을 그리며 하얗고 깔끔하게 페인팅되어 있었다. 그 심오한 바닥을 비추며 공중에서 반짝이는 조명등은 모두 일회용 플라스틱 컵이나 접시, 폐 바구니, 폐차의 부품, 막걸리 페트병 등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추레한 과거의 모습을 벗어던지고 새롭게 태어난 작품들은 서빳 공간 안에 동화 속 판타지의 세계를 가득 펼쳐 놓았다. 조명도 사랑스럽고 기특하고 대단했지만,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그림자는 꿈결처럼 신비스러웠다. 나는 그 아득한 그림자 속으로 푹 빠져들었다.
전시 오프닝을 축하하기 위해 애월에서 듀엣 `가람과 뫼’의 멤버 윤영로 가수가 초대되었다. 그는 과거의 히트곡 `생일’과 함께 여러 곡으로 전시장의 분위기를 띄웠다. 축제가 끝난 직후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노르웨이의 작가 카타리나까지 알차게 구성된 정예의 멤버가 모여 분위기는 가족적으로 화기애애했다. 우리는 와인을 마시며 서빳에서 정성껏 준비한 음식과 함께 행복과 낭만을 나누었다.
그 후로도 서빳에 들를 때면 나는 먼저 조명등을 바라본다. 그러면 이제는 베를린으로 돌아가 열심히 살고 있을 알프레도가 떠오른다.한 달에 한번 이루어지는 댄스파티에서도 알프레도의 조명이 허공에서 반짝거리며 분위기를 살리는데 한몫을 하였다. 나의 눈은 늘 조명 작품을 따라다녔고, 알프레도의 신선한 감각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떠올리면 그의 다정한 미소가 어른거렸다. 넘쳐나는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 세상에 이를 작품으로 승화시키며 업사이클링 예술의 매력을 전하는 알프레도의 고귀한 사상이 고맙고 또 그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