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호통재라! 무상하게도 지난 밤비에 매화가 제 명을 다하고 말았다. 강풍을 뚫고 달려간 서귀포 걸매 생태공원의 매화원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매화원은 지난 입춘 때부터 꽃봉오리가 주렁주렁 매달리기 시작했고, 유독 햇살을 듬뿍 차지한 나무는 일찌감치 꽃을 활짝 피워 내기도 했었다. 그런데 명절을 보내러 잠시 서울을 다녀온 사이 다들 만개를 했었나 보다. 비가 내린 것까진 좋았는데, 바람까지 세차게 불면서 꽃눈의 흔적도 함께 사라져버려 여간 허망하질 않았다. 속절없이 아름다움이 제 명을 다하고 사라질 때의 슬픔 같은 것이 아스라이 밀려왔다.
바람이 거셌지만, 나는 아쉬움을 달래려 매화원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했다. 신기하게도 새봄을 맞아 새로 자란 매화나무 가지들은 하나같이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곧게 뻗어 올랐다. 그 기운이 어찌나 힘차 보이던지 하늘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힘껏 끌어당기는 듯하였다.관광객인 듯한 젊은 처자들이 웃음을 꽃잎처럼 까르르 휘날리며 겨우 몇 송이 가까스로 매달린 매화나무 사이에서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일찍 꽃을 피운 청매화는 꽃받침과 수술만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뒤늦게 꽃을 피운 홍매화만이 간간이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제야 얼굴을 내민 꽃망울은 모진 바람을 맞아 파르르 떨면서도 안간힘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오늘 같은 강풍에는 실로 위태로워서 더욱 애잔하였다.
예전부터 선비들이 가장 좋아했다는 꽃 매화는 엄동설한을 이겨내고 제일 먼저 꽃망울을 터뜨린다. 사실 봄의 전령사를 자처하는 꽃들이야 여럿 있지만, 자고로 매화만큼 기품을 지니며 인기를 누리는 꽃도 드물지 않나 싶다. 매화는 꽃도 예쁘지만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향기의 그윽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깊다. 한낮의 햇살이 거두어지는 저녁 시간, 매화는 그제야 은근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번잡한 낮 시간에는 시각으로 눈길을 사로잡다가, 시야가 어스름해지면 후각으로 매혹할 줄도 아는 것이다. 법정 스님은 향기를 듣는다고 하여 문향(聞香)이라고 표현하였다. 향기마저 들을 수 있는 경지는 또 얼마나 고매한가.
열흘 가는 꽃 없다 말하지 마라
매화를 떠나보낼 때마다 "정녕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단 말인가?"라며 통탄하던 내게 지상의 매화와는 차원이 다른 윤회매 전시 소식이 들려왔다. 오랜만의 서빳 나들이였다. 윤회매는 밀랍으로 꽃잎을 만든 인조 매화다. 벌이 꽃가루를 채집해 꿀을 만들고, 그 꿀에서 생긴 밀랍을 이용해 다시 꽃을 만든다.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와 닮아서 붙인 이름이 윤회매다. 윤회매는 조선 정조 때의 실학파인 이덕무(1741~1793)에 의해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200년이 지난 오늘의 전시 작가 다음(茶飮)에 의해 전승이 된 것이다. 그는 돌가루에 아교를 섞어 도자기를 만들고 밀랍으로 만든 매화를 함께 액자에 고이 넣어서 서귀포까지 배로 운반을 해왔다. 미술의 재료는 끝 간 데 없이 다양하다.
광주에서 다도를 할 때의 인연으로 서로 만난 적이 있다는 蘭언니는 다음 작가의 팬이었다. 언니는 그가 온다는 소식에 크게 흥분하였고, 우리는 다른 선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미룬 채 함께 서빳의 전시장으로 향했다. 작품들은 무척 놀라웠다. "이게 실화야?"라고 할 정도로 하나같이 정교하고 아름다워서 매화원의 매화가 다시 살아 돌아온 듯 가슴이 다 콩닥거렸다. 아니, 오히려 윤회매는 생명을 뛰어넘는 그 무엇이었다. 부처가 열반에 들면서 윤회를 끝낸 것처럼 윤회매는 영원한 생명을 얻은 듯 고고하였다.
전시 첫날이어서 작가 소개 뒤에 오프닝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전시 작가가 스스로 오프닝 무대를 마련한 경우는 처음이었다. 그토록 다재다능한 예술인은 드물었기에 더욱 호기심이 일었다. 무대에는 제주를 상징하는 한라산의 조형물이 멋지게 마련되어 있었다. 불이 꺼지고 은근한 조명 아래로 또르르 찻잔에 물을 따르는 소리가잔잔히 울려 퍼졌다. 서서히 물 무늬가 바닥을 타고 흐르며 벽으로 번져 올랐다. 벽면에는 보름달처럼 풍만한 달항아리가 등장했고, 다들 오매불망 기다리던 매화가지가천정에서 선녀처럼 사뿐히내려앉았다. 달항아리의 담박함과 매화의 고매한 품격이 썩 잘 어우러졌다.
도산의 달밤에 매화를 읊다
관객은 다 함께 달밤의 꽃놀이로 초대되었다. 곳곳에서 꽃망울이 터져 나왔다. 어느새 서빳 공간은 매화향으로 가득 채워지는 듯하였다. 마음은 달떠서 바람 따라 춤을 추었다. 손전등 하나로 방안의 매화가지를 비추어내며 유유자적 그림자놀이의 삼매경에 빠져 있던 작가는, 이제 버선발을 들어 올리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바라춤을 추었다. 매화향을 따라 두둥실 구름처럼 노닐었다. 그것은 인생을 달관하며 즐기는 신선의 세계였다. 또한 육체를 떠난 영혼의 자유로운 몸짓이었다. 그는 순간이나마 매향 따라 이 꽃 저 꽃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최고의 경지,달항아리처럼 완벽하고 충만한 홀로 있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아! 나지막이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토록 격조 있는 놀이는 금시초문이었다.
작가는 작품과 퍼포먼스를 통해 내면의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그의 공연은 한동안 시들해 있던 나의 영혼을 세차게 흔들어 깨웠고, 메마른 가슴을 소낙비처럼 시원하게 적셔주었다. 공연을 끝내고 작가는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유한한 삶 속에서 궁극적 삶의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그는 이미 우리에게 몸짓으로 메시지를 던졌다. 하지만 다시 한번 자신과의 조우를 게을리하지 말고 저마다 가슴 깊이 품고 있는 씨앗을 찾아내 자기 내면의 꽃을 피우라고 속삭였다. 그의 메시지는 단호했으며 망설임이 없었다. 내면의 꽃을 피우는 것은 세상의 눈먼 가치나 성공이 아니라, 삶의 진정한 목표인 `성장’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스스로 내면의 씨앗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꽃을 피우며 완성을 향해 끝없이 성장하는 삶이야말로 우리 인생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표일 것이다.
다음 작가는 한때 20년간 절에서 수행한 승려였지만, 법복 속에 차고 넘치는 재능을 모두 감추어 둘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지금은 한 가정을 꾸린 종합 예술인으로서 다도와 함께 그만의 작품 세계를 펼치고 있다. 법력의 내공으로 그의 예술은 더욱 깊고 은은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심지어 그는 공연 뒤풀이까지 책임지려고 다도 세트와 함께 자신의 브랜드로 만든 매실주 10병과 100개의 잔을 배로 실어 날랐다. 관객을 섬기는 자세는 우리 모두를 감동시켰다. 우리는 1차로 작품 윤회매에 취하고, 2차로 그림자놀이에 취했으며, 3차로는 뒤풀이 매실 홍삼주에 취했다. 덕분에 서귀포의 밤은 지독히 아름다웠고, 작가에게 더없이 완벽하게 대접받은 멋지고 특별한 하루였다.
어느새 3월이 왔다. 금쪽같은 시간들이 잘도 간다. 나는 다음 작가의 메시지를 다시금 되새기며 새봄을 맞이하는 자세를 가다듬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요즘 유독 내면의 중심이 흔들리며 글쓰기도 시들하고 만사 의욕이 예전만 못하다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모두 짓궂은 날씨와 코로나 때문이야, 라며 남 탓하고 있기에는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많다. 이런 상태는 스스로 내면을 돌보지 않은 결과일 뿐일 테니까. 나의 내면의 꽃은 나의 무관심으로 시들어가고 있었다.
성장하는 삶을 위하여, 나는 나의 루틴을 다시 정비하기로 하였다. 3월의 새로운 루틴에 명상을 추가했다. 이제나저제나 미루고 있던, 혹은 내킬 때만 찾던 명상을 규칙적으로 꾸준히 이어나가려 한다. 아침 명상과 저녁 잠자리 명상, 그리고 한낮의 걷기 명상을 통해 끝없이 자신과 조우하련다.한동안 방치해 온 나의 내면의 꽃을 찾아 다시 물을 주고 햇볕을 쬐이고 그윽하게 바라보며 사랑과 관심을 기울여야겠다. 그리하여 게으름과 권태, 자괴감과 외로움의 곰팡이가 피어나지 않도록 매일 세심하게 돌봐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