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데 없는 것을 쓸 데 있는 것으로
버티기 만렙 찍기
"나 당신한테 앞으로 일 안 줄 거야."
나지막하게 내 귓속으로 들려온 목소리. 저 문장은 귀로 들어왔다가 입으로, 그리고 목구멍으로, 마침내는 심장까지 파고 들어와 날 답답하게 했다. 신입 교육컨설턴트로 재직하던 시절, 쉬운 일부터 어려운 일까지 일만 시키면 사고를 치던 나에게 선배님이 건넨 저 말은 회사를 그만두라는 간접적인 메시지인 것 같았다.
당시 26살의 나이였고, 일 한지 3개월 차였기 때문에 금방이라도 회사를 나갈 수 있었다. 젊은 혈기에 자존심도 상해서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아직 회사에서 일을 하기에는 이른 나이니 호주에 가 워킹홀리데이를 하면서 더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루하루 회사를 그만둘까 말까,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하루하루 버텼다. 일을 주지 않으니 컴퓨터 앞에 앉아 일을 하는 척 분주하게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고, 키보드도 두드려보고, 눈동자도 많이 굴렸다. 노동자로 뽑혔는데, 순식간에 노동하지 않는 인간이 돼버렸으니 정수기 옆에 높인 커피도 사치인 것 같아 커피조차 마시지 않았다. 의자와 거의 일심동체인 것처럼 한 번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칼로 둘을 갈랐어도 누가 의자이고, 누가 나인지 그때는 구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렇게 일주일을 버텼고, 마침내 선배님에게 버티기 기술을 인정받아 일을 이어서 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벌써 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저 시간은 미세한 점처럼 내 삶에 아주 작은 영역을 차지하겠으나, 그때 일을 그만두었으면 서른 살의 나이에 개인사업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모두가 동의하겠지만 내가 정말 힘든 시기에 배웠던 일은, 버티는 한 더 기억에 남는다. 나도 그때 배웠던 영업, 기획, 교육 운영 등의 일이 지금 사업을 하는 데 있어 기초가 되어준다. 수많은 실수를 했던 과거의 나가, 수많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나에게 자극을 준다.
버티기가 중요한 이유는 뭘까? 버티기가 중요한 이유는 나를 이해하고, 주변을 이해하며 삶을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해서다. 성숙된 시선은 이로운 방향으로 내게 돌아온다. 사실, 한국 사회에서 온전한 '나'로 살기는 쉽지 않다. 소속을 중요하게 여기는 조직 문화의 특성상, 조직인으로 늘 주변의 시선을 달고 산다. 넓게 보면 사회인으로 사회의 시선을 받는다. 교육사업을 처음 시작했을 때, 교육 담당자와 미팅을 잡으려고 하루에 몇십 통씩은 전화를 했다. 그렇게 치열하게 미팅을 잡아도, 사업 초창기에 경력이 전무한 회사에 일을 주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수익을 창출하는 결과는 잘 발생되지 않았다. 직장 경험만 풀 장착한 우리 가족은 그냥 취업하는 게 좋지 않겠냐며, 내 노력들을 보지 않았고 사업을 잘하지 못한다고 사회인의 시선으로 초반부터 평가를 했다. 당시에는 그게 내 마음을 참 많이도 아프게 했다. 삶이 결국은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고, 혼자여서 더 치열하게 버텼다. 그렇게 버텨 결국은 하나씩 원하는 것들을 만들어갔다.
어느덧, 사업을 한 지 4년이 다 되어간다. 힘들어도 전화 영업을 하고, 미팅을 하며 교육을 수주하고, 큰 건의 교육도 성사 한 경험 때문에 지금은 한 결 더 긍정적으로 사업을 이끌어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들도 열심히 하는 나를 이해하고 인정해준다. 그리고, 가족이 그때 내게 보였던 시선도 지금의 나는 이해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성을 담보하지 못하는 인간은 주변의 존중을 받기 어려워지고, 자존감이 떨어지는 일이 자주 생긴다. 어쩌면 더 치열하게 생산성을 만들고 주변의 시선을 견뎠던 가족의 입장에서는 구성원인 내가 생산성을 꾸준히 만드는 조직에 소속되어 그 시선을 잘 견디길 바랬을 수도 있다. 당시에는 이들이 건넨 사랑의 방식이 내가 원하는 대로 꽂히지 않았던 것뿐이다.
사랑의 방식이 항상 꽃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때로는 받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사랑의 방식은 칼이 되어 그 사람의 심장에 꽂히기도 한다. 문제는 그 시기를 내가 잘 버텨 그 시절을 좀 더 성숙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냐는 것이다. 상황을 회피하면 내게 오는 비판은 그저 비난에 머물러 기억하지 않아야 할 그 무엇이 된다. 하지만, 상황에 부딪히면 내게 좋지 않은 것이라 여겼던 순간들도 내 옆에 앉아 내가 기댈 수 있는 친구가 되어주기도 한다. 돌이켜보면 쓸 데 없는 경험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