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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영어, 영어, 영어- 영어로 언어치료하기

해야하니 했고, 지나보니 해냈다

누가봐도 한국인이고 한국어가 모국어인 내가 미국에서 언어치료를 한다고 하면 다들 "영어로 하셨어요?", "영어로 치료해?", "실습도 영어로 해?" 라고 물어온다. 미국에서 언어치료를 전공하고자 하는 한국분들도 "영어로 실습하는건 괜찮으셨나요?", "외국인으로서 영어로 평가와 치료를 진행해야 하는데 취업이 가능 할까요?"라는 질문들을 하신다. 질문들에 대답을 하자면, 치료도 실습도 다 영어로 진행되고 힘들지만 또 어떻게 해내면 해내지더라. 이렇게 돈벌고 사는 나도 누가봐도 100프로 한국어인 억양으로 잘린 적 없이 이직 잘 하고 적당히 먹고살아진다. 물론, 이렇게 해탈하기까지 처음 몇 년은 많이 울고, 많이 작아지고, 아, 머리도 많이 빠지긴 했다.


석사과정에 입학하면 바로 첫 학기부터 학교 내 클리닉에서 실습이 시작된다. 내가 처음으로 배정된 클리닉은 School-age Language Clinic이었는데 언어장애를 가진 학령기 아동을 배정받아 한 학기동안 치료를 진행하는 것이었다. 첫 실습까지 주어진 시간동안 내가 준비하는 것이 맞는지, 한 세션을 채울만큼 충분한지 등 언어치료에 대한 질문과 준비로도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지만 거기에 더해 "영어"로 해내야 한다는 것이 아주 죽을맛이었다. 학부모가 지켜보며 이거 맡겨도 되나, 의심하고 걱정할까봐 자려고 누웠다가도 준비한 내용들을 영어로 말해보기를 몇번씩 했다. Hello만 들어도 영어가 유창한지 아닌지 알 수 있기에 hello 와 자기소개만 수천번 연습했다. 매번 세션계획서에 맞게 내용의 설명, 자극주는 법 등 다양한 레파토리에 맞추어 문장을 써보고 말해보고 표현과 억양을 변형해보며 세션안에서 나올만한 말들은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도록 매일 중얼중얼 연습했다. 누가봐도 외국인의 발음이었지만 준비해가는 세션 내용과 아이의 발전에 학부모도 좋게 봐주셨다.


어떻게 한 학기가 지났다. 조금 자신감이 붙고 영어도 한 뼘은 늘었다. 이젠 Adult neurogenic clinic과 Speech sound clinic이었다. 성인치료는 내가 세션을 준비하면 어떻게 해낼 수 있을것 같았다. 근데 Speech sound라니. 내가 모국어가 아닌데 내가 치료하는걸 학부모가 믿을 수 있을까? 아이가 나처럼 외국인억양을 가질까봐 걱정하면 어떡하지? 교수님께 상담을 했다. 교수님이라면 나에게 맡길 수 있냐고. 교수님은 나에게 환자는 발음을 배우러 오는거지 억양을 배우러 오는게 아니고 나와 수업 후 집에가서 연습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듯이 내가 그 아이와 24시간 내내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니 내 억양을 배울 걱정은 안해도 된다고 안심시켜주셨다. 당시 나는 2명의 아이를 맡았는데 다들 다행히 한학기동안 연령에 맞는 발음을 습득하여 무사히 졸업했다. 이제 학교 클리닉, 즉 한 학기에 몇 명 안되는 대상자를 위해 세션을 준비하고 연습해가는건 자신있었다.


시간이 흘러 유창성클리닉, 삼킴클리닉 등 교내 클리닉을 다 마치고 이제 공립학교실습시간이 다가왔다. 우리 학교에서는 졸업전 봄학기때 주 4-5일 실제 학교에서 실습을 했다. 나는 주 4일은 특수반이 있는 A초등학교에 주1일은 일반학급만 있는 B초등학교에서 실습을 했는데 이제 주 5일 풀타임으로 하는 실습이니 모든 세션을 학교클리닉처럼 할 말을 준비하고 연습해 갈 수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간의 미국생활과 학교클리닉을 준비하며 연습한 덕에 생각보다 수월하게 실습기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동안 반복해서 연습한 문장들이 이제는 체화되어 나의 것이 된것 같았다. 학교실습에서 어려웠던 부분은 치료가 아닌 회의와 미팅, 특히 IEP(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 미팅이었다. 미국의 학교에서는 언어치료를 포함한 특수교육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개별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데 1년에 한번씩 하는 annual IEP meeting과 3년에 한번씩 하는 Triannual IEP meeting이 있다. 언어치료를 받는 아이들의 경우 언어치료사 또한 이 IEP미팅에 참여하여 아이의 현 상태와 언어치료를 받아야 하는 이유(특히 학업적 영향), 또한 그동안 언어치료를 받으며 발전한 부분과 앞으로의 목표 등을 발표하고 다른 선생님과 학부모의 질문에 답변을 주어야 한다. 학교 친구들이나 1:1의 부모상담이 아닌 학교 선생님들, 가끔은 변호사도 대동한 부모님들이 다 계신 자리에서 언어치료사로서 나의 부분을 발표하고 의견을 제시하는 자리에서 내가 버벅거리거나 말이 안되는 비문들을 남발하면 단순히 나의 역량만 부족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언어치료 자체의 가치가 평가절하될까봐 걱정되었다. 이에 대비할 수 있는 방법은 역시 또 하나뿐이었다. 열심히 쓰고, 열심히 말해보고, 다르게 말해보고, 수천번 말해보는 것 뿐이었다.


이제 취업의 시간이다. 학생으로 학비를 내며 제공받은 시간에서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나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돈을 지불하는 사람이 있다. 어깨가 무거웠다. 나에게 배정된 환자들이 무슨 죄라고 외국인을 만나 발전이 더디면 안되니까. 다행히 첫 회사와 계약을 하고 첫 출근까지 한달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아직 담당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가상의 치료목표들에 맞추어 또 주구장창 말하기 연습을 했다. 구글같은 곳에 top 20 boy names, girl names등을 검색해서 이름말하기도 많이 연습했다. 내가 담당할 아동의 이름이 이중에 걸리길 바라면서.


병동에서는 주로 삼킴환자를 보게 되는데 이 때 내가 표현해야 하는 말은 오히려 한정되어 있다. 평가에서 쓰는말, 삼킴에 대해 설명하는 말 정도이니까. 단, 환자의 상태가 언제든 급변할 수 있고 다양한 검사와 시술, 수술을 받는 환자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환자의 상태에 대한 예상과 면밀한 검사, 적절한 치료 목표를 세울 수 있기에 차트리뷰를 꼼꼼히 해야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병원 및 의학용어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해서 하는 중인데 해도해도 끝이 없긴 하지만 첫 세션을 준비하던 때에 비하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아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많이 편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외노자들은 모두 공감할 것이다. 이해하는 것은 표현하는 것에 비하면 부담이 훨씬 적다. 특히나 구글과 네이버가 있다면.


이제 일일이 세션을 대비하여 영어연습을 하지는 않는다. 영어가 입에 많이 익어서일수도 있고 수많은 레퍼토리들이 자동재생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제 원어민처럼 영어를 하냐고? 수많은 연습과 수년간의 풀타임 치료에도 나는 여전히 한국인 억양으로 영어를 하고 세션을 진행한다. 그렇지만 취직도 잘하고 이직도 잘하고 돈도 꽤 번다. 운이 좋았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나의 억양으로 인해 환자한테 클레임을 받거나 일에서 제외된 적은 없다. 영어로 언어치료, 하면 할 수 있다. 영어에 겁먹지 말자. 머리는 좀 빠지고 잠은 좀 설치겠지만 그 시간도 언젠간 다 지나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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