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5년 전, 사내 연애로 만난 남편과 결혼한 지 일 년이 채 되지 않은 신혼시절의 일이다. 남편과는 첫 만남부터 장거리 연애를 했다. 나는 서울에 살면서 직장을 다녔고, 남편은 대구에 살면서 직장을 다녔다. 당시 나는 그룹 지주사의 인사팀이었고, 남편은 가장 크고 탄탄한 계열사의 인사팀이었다. 그 당시 우리 팀에서는 내가 맡은 업무를 해 본 선배들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여러 계열사에 전화를 돌리며 원격으로 업무를 배웠고, 남편은 나의 선생님 중 하나였다.
그런 연유로 우리는 결혼 직후부터 주말부부였다. 나는 내심 남편이 서울로 올라왔으면 했지만, 남편은 내가 대구로 내려오면 일하지 않아도 먹여 살릴 자신이 있다며 대구살이를 고집했다. 6년째 지옥 같은 회사 생활을 버티던 나는 솔깃한 제안에 넘어갔고, 대구에 신혼집을 차렸다. (지금은 '나보다 정년이 9년이나 긴 우리 마누라는 내 연금'이라며, 정년퇴직을 바란다)
사내 부부인데다가 두 사람 다 인사팀에서 일하고 있으니 사정을 뻔히 알고 어련히 알아서 발령을 내주실 줄 알았건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나는 결국 결혼해서도 여전히 옆방에 남학생이 살고 있는 하숙집 살이를 하니 가족계획은 꿈도 못 꾸고 있다며 인사담당 이사님께 읍소를 하였고, 사정이 받아들여져 후임을 물색하게 되었다.
"야. 니가 봤을 때는 어떤 애가 오면 좋겠냐?"
싸가지 없는데 일은 잘해서 바른말도 잘하고 혼나지도 않는 멘탈 엄청 센 사람이요, 아니면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여서 윗사람들 다 고생시키고 아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었구나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이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꾹꾹 눌러 담았다.
"너무 생초보 신입이 오면 업무도 과중하고 일이 많아서 힘들 것 같고요. 삼십 대 초반 대리급 남자가 적당할 것 같아요."
이성을 찾고 진심을 다해 정성껏 답변했는데, 과장님이 코웃음을 치며 하는 대답에 나는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니 자리는 손님이 오면 커피도 타고 차도 내야 되는데 삼십 대 초반 대리급 남자한테 그걸 어떻게 시키냐."
왜요, 왜 안 되는데요? 서른 살 먹고 6년째 같은 자리에서 일하고 있는 저는 왜 커피 타고 차도 내갈 수 있는데 삼십 대 초반 대리급 남자는 그게 왜 안 되는데요? 딸을 낳아 키우고 계시는 분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내뱉은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결국 내 후임으로는 이십 대 후반의 예쁘고 성실한 여직원으로 결정되었다.
그렇게 차별 딱지를 덕지덕지 붙이고 대구로 내려왔다. 유교정신이 살아 숨 쉬는 보수의 심장, 대구 말이다. 여기는 차별이 더 했다. 이곳에는 '내근직'이라는 것이 있었다. 언뜻 봤을 때는 '외근직'과 구분되는 말 같지만, '내근 업무'는 '여직원 업무'를 의미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밖에서 남직원들이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일은 편했다. 핵심 업무를 맡아 진행하기보다는 사무실이 굴러갈 수 있도록 살림을 살고, 본사와의 허브 역할을 하는 일들이었다. 간혹 외부 심사에 대응한다거나 규정을 개정하는 등의 나름대로 굵직한 일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허드렛일이었다. 남초 회사에서 여자로서 핵심 인력으로 분류되려면 남자보다 더 많은 것을 증명해 내야 했다. 기회도 잘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가임기 여성이지만 앞으로 출산하지 않을 의지가 있음을 드러내 육아휴직에 대한 우려를 잠재울 필요도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오히려 그런 나를 부러워했다. 남초 회사에서 여직원으로 살아가는 삶은 편하긴 했다. 자존심과 야망이야 버리면 그뿐이었다. 포기하면 편했다. 여직원은 높이 올라갈 수는 없었지만, 해마다 발표되는 평균 연봉 인상률은 동일하게 적용받았다. 윗사람들 대부분은 고된 일에는 남직원을 먼저 대동했다. 여직원은 차별받기도 했지만, 때로 여왕벌처럼 대우받기도 했다. 남편은 그게 불만인 모양이었다. 회사 생활은 편하게 하고, 월급은 비슷하게 가져간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