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키캔들 짊어지고 별안간 계단 타기
'양키캔들 가져가실 분'
아파트너에 나눔글이 올라왔다. 아파트너는 같은 아파트 주민끼리 공지사항이나 각종 정보를 공유하는 아파트 커뮤니티 앱이다. 오늘처럼 나눔글도 종종 올라오는데, 평소에는 회사에서 일하느라 뒷북이 일상이건만 오늘은 내가 일등으로 댓글을 달았다.
'제가 받아갈 수 있을까요?'
양키캔들은 고기를 좋아하는 우리 가족에게 필수품이다. 대식가인 우리 가족은 종종 마트나 정육점에서 고기를 구입해서 집에서 원 없이 구워 먹곤 한다. 그러고 나면 온 집안에 고기 냄새가 퍼지는데, 자기 전에 양키캔들을 켜놓고 자면 신기하게도 고기 냄새가 잡힌다. 내가 빠른 댓글로 양키캔들을 선점하고 나자 역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서 카톡이 왔다.
'오~ 양키캔들! 내 댓글은 지워야겠다.'
부부는 이심전심이라더니 남편도 양키캔들 나눔글이 올라오자마자 빛의 속도로 댓글을 달았다고 한다. 당연히 본인이 일등일 줄 알았는데 그 위에 내가 있었단다.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이라며 주거니 받거니 이야기를 나누는데, 아파트 커뮤니티 앱에 곧바로 대댓글이 달렸다.
'언제 오실 수 있으신가요?'
그제야 이웃의 동호수가 보였다. 마침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사는 이웃이다. 퇴근길에 양키캔들을 챙겨서 10층만 더 올라가면 우리 집이다. 이토록 아름다운 동선이라니. 새어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퇴근하고 6시 20분쯤에 도착할 예정이라며 답을 달았다. 문 앞에 내놓은 양키캔들 사진이 바로 올라왔다. 편할 때 가져가시라는 말과 함께.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벌써 퇴근시간이다. 다행히 이웃집 문 앞에 들러 양키캔들을 챙겨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감사의 표시로 뭐라도 드릴 것이 없나 찾아보는데 척박한 사무실에는 답례로 쓸만한 물건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름다운 동선을 망쳐가면서까지 무엇을 사가기도 괜히 그래서 결국 감사의 마음만 잔뜩 안고 나눔을 받으러 가기로 했다.
퇴근 무렵이라 그런지 아파트 지하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많았다. 나의 목적지는 17층. 버튼을 누르려고 보니 벌써 빨간색으로 불이 들어와 있다. 여기 누군가 있다. 내 양키캔들의 주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이. 괜히 민망한 마음에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주인 앞에서 멋쩍게 양키캔들을 들고 가는 상상을 했다. 준비해 온 것이 없어 손이 벌써 뻘쭘해졌다.
17층에서 문이 열렸다. 다행히 같이 내린 사람은 나눔글을 올린 이웃의 옆집으로 들어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문 앞에 놓여있는 양키캔들을 집어드는데, 아까부터 엘리베이터 앞에 있던 두 명의 남자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나를 유심히 지켜본다. 그리고는 둘이서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나누는데 '양키캔들'이라는 단어가 귀에 쏙 들어왔다. 아뿔싸, 만날 운명이었던가! 정황상 그들은 양키캔들을 나눠 준 집에서 나온 사람들임이 분명했다.
"아, 제가 이걸 받아가기로 해서요."
"아하, 네."
"죄송해요. 빈손으로 왔어요."
"아닙니다. 안 주셔도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나는 손이 비어있는 대신 허리를 연신 굽히며 이웃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제 집으로 돌아갈 시간. 계획대로라면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10층을 더 올라가는 것이 나의 완벽한 동선이었다. 그런데 양키캔들의 원래 주인들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 버튼을 누르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음, 이건 계획에 없었는데.
어디쯤 오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엘리베이터를, 오늘 하필 빈손으로 찾아뵙게 되어 민망한 내가, 고맙지만 낯선 이웃과 함께 오래도록 기다리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내려가고 나면, 나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한참 동안 또 기다려야 한다. 그것도 그들의 집 앞에서.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하다가 마침내 내향적인 나는 결심했다.
"같은 라인이라 계단으로 올라가 볼게요."
"네."
"정말 잘 쓰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리를 연신 굽히며 계획에도 없던 계단 타기 운동을 시작해 버린 나. 그동안 얼마나 운동을 안 했던지 10층 계단을 오르는 것도 힘에 부쳤다. 말 붙일 넉살이 없어서 가방과 양키 캔들을 들고 별안간 계단 타기 운동이라니. 내향적이라서 다리는 튼튼해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