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01
“누군가의 버킷 리스트에서 차례를 기다리는, 엽서나 사진을 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동경하던 곳. “죽기 전에 에게 해(Agean Sea)를 여행할 행운을 누리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하던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가슴을 울린 곳, 산토리니(Santorini)."
찬란한 햇살 아래, 혹은 장밋빛 노을에 젖어 산토리니를 걸어본 사람은 안다. 바람에 실려 오던 산토리니의 파란 종소리가 오래도록 가슴에서 울려댈 것을. 그래서 언제고 다시 그 섬을 찾아 느릿한 당나귀에 몸을 맡긴다거나 까만 모래를 뽀드득거리며 걸을 날을 꿈꾸며 따분한 일상을 이겨낼 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산토리니는 그리스 본토에서 약 200km 남쪽에 위치해 있는 화산 군도이다. 에게 해의 섬들 중에 단연 돋보이는 산토리니는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다섯 개의 섬을 통칭하는 지명인데,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토리니는 그 가운데 가장 큰 섬인 티라(Thira)를 일컫는다. 그래서 항공권은 물론 페리 승선권을 비롯한 모든 공식적인 곳에 티라(Thira)로 표기되고 있다.
티라 섬은 초승달 모양이다. 수천 년 전의 화산 폭발로 산토리니의 중심은 바다로 가라앉아 지금의 초승달 모양을 만들어 내었다. 섬을 가라앉게 한 거대한 화산은 전설을 만들어 산토리니를 잃어버린 대륙 ‘아틀란티스’로 믿고 있는 사람도 있다. 1956년에도 대지진이 있어서 티라 섬의 건물들은 대부분 손실을 입었고, 사람들의 손으로 재건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탄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화산활동을 하고 있는 검은 섬 네아 카메니(Nea Kameni)와 티라 섬에서 출토된 도기와 유물 조각에서는 신화와 전설의 숨결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누구든 티라 섬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섬의 중심에 있는 피라(Fira) 마을에 도착한다. 300미터 높이에 형성된 절벽마을인 피라 마을에서는 바다를 향한 문들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치 먼 신화 속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아니 바다로 풍덩 뛰어들 것 같은 문을 열고 들어서면 온통 순백색의 건물들이 훅 안겨 온다. 마을과 오래된 항구 사이의 계단을 오르내리는 당나귀들 사이로 파란 물감을 뿌려댈 것 같은 교회 종소리가 바람에 실려 오고, 좁은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미로처럼 숨어 있는 새하얀 아름다움을 만난다. 그곳에선 굳이 목적지를 정할 필요가 없다. 끝없이 이어진 흰 골목들 사이를 이리저리 헤매다 보면 아담한 문과 창이 제각각인 집들과 파란 대문, 지붕 낮은 카페와 갤러리의 매력이 가슴을 파고든다.
피라 마을은 자유롭고 정겨운 사람 냄새로 가득하다. 아침녘의 테토코풀루(Thetokopoulu) 광장 주변에서는 갓 잡은 생선을 내다파는 주민들 사이에서 싱싱한 삶이 느껴지고, 한낮의 거리에서는 관광객의 발걸음에서 여유로움이, 그리고 저녁 무렵 그리스 전통식당인 타베르나(Taverna)에서는 하루를 보낸 후의 흥겨움이 넘쳐난다. 어느 곳, 어느 때이건 피라 마을 곳곳에서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속 ‘조르바’의 자유로움이 섬의 따사로운 풍경과 겹쳐져 아름답다.
티라 섬의 북쪽 끝에는 이아(Oia) 마을이 있다. 그곳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을을 보려고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하다. 화산이 터져 절벽이 된 땅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의 테라스는 아랫집의 지붕이 되고 또 그 아랫집의 테라스로 끝없이 이어진다. 그곳에 누워 에게 해의 바람을 맞거나, 노을에 잠기면 모두들 말을 잊는다. 푸른 바다가 노란빛으로 또 붉은 장밋빛으로 물들고, 석양이 바다로 가라앉을 때면 가슴에 품은 꿈이든, 사랑의 속삭임이든 모든 말은 힘을 잃을 뿐이다. 그때에는 오래된 성채에 앉아 손을 꼭 잡은 연인도, 거리를 거니는 여행자도 이아 마을에 스며들어 그 자체로 예술작품이 된다. 그러다 마을 너머 작은 섬 위로 어둠이 내리면 모두들 발걸음을 옮겨 타베르나에서 와인 한 잔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산토리니의 와인은 노을빛을 닮았다. 바람 부는 섬 태생의 포도는 한껏 몸을 낮추고 땅바닥에 붙어 거친 자연을 온몸으로 이겨내며 자란다. 가녀리고 힘없는 포도덩굴은 자기들끼리 서로의 몸을 붙들고 가지를 동그랗게 말아 힘을 키운다. 그리하여 튼실해진 덩굴은 화산토양의 힘으로, 에게 해의 서늘한 바람과 태양으로 단단한 포도열매를 키워내다. 그리고 어느 날 우리 앞에 노을빛 와인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타베르나에서 마시는 한 잔의 와인에는 산토리니의 오랜 신화와 전설, 자연이 녹아든 셈이다.
섬의 인구가 10배로 늘어나는 여름철이든, 절반은 저렴하고 두 배는 한적하다는 겨울이든 산토리니의 풍경은 우리 안에 스며든다.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도 을씨년스러운 바람 속에서도 ‘먼 북소리’의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섬의 일부가 되어 걷다 보면 비로소 보일 것이다. 집안으로 스며드는 열기와 습기를 낮추기 위해 시작했다는 하얀 지붕과 바다로 들어오는 해적들을 막기 위해 뚫어놓은 담벼락의 구멍들에서 섬사람들의 지혜로움이, 내가 알지 못했던 아름다움이!
노를 젓다가
노를 놓쳐버렸다
비로소 넓은 물을 돌아다보았다.
고은, ‘순간의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