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04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쿠스코로 가는 길은 버스로 22시간. 먼 거리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대체로 이카(Ica)에서 휴식을 취한다. 이카는 사막 마을 와카치나(Huacachina)와 나스카(Nasca)의 거대한 지상화를 만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와카치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버스가 리마를 벗어나자 잿빛 바위산과 해안선이 끝없이 펼쳐지고, 주위 풍광은 순식간에 사막지형으로 변한다. 리마에서 4시간 거리의 이카. 그곳에서 택시로 5분이면 닿는 곳이 와카치나이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짜릿함
광활한 모래사막 한가운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작은 호수를 품은 마을. 와카치나는 도무지 잉카 제국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모래언덕이 사방을 뒤덮고 있는, 사막의 열기를 식혀주는 아름다운 오아시스 마을이다. 한때 페루 부유층들의 휴양지였던 와카치나는 지금은 배낭여행자들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싹 날려주고 있다. 그러고 보면 역사를 넘나들며 사람들에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곳이 와카치나이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줄줄이 서 있는 신기한 자동차, 버기(Buggy)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와카치나로 불러들이는, 창문도 천장도 없고 뼈대만 남아 있는 사막전용 자동차이다. 마을을 뒤로 하고 잠시만 달리면 만나는 광활한 모래사막. 버기는 앙상한 겉모습과는 달리 사막을 질주한다. 속도감이 그대로 느껴지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처럼 모래언덕을 내리닫는다.
마치 놀이동산의 아이들 같다. 벨트를 하지 않으면 몸이 공중으로 날아갈 것 같은 속도에 모두가 환호성을 지른다. 천지를 가르듯 질주하는 쾌감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높고 험한 모래언덕의 꼭대기다. 긴장된 순간, 버기는 거의 직각으로 보이는 언덕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하고, 땅바닥에 내리꽂힐 것 같은 두려움에 눈을 감고 만다.
이제는 끝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또 하나의 모험이 기다리고 있다. 샌드보딩(Sandboarding)이다. 까마득한 높이에 겁부터 나지만 보드에 몸을 싣기만 하면 모래가 저절로 이끌어준다. 익숙해지면 한꺼번에 몇 개의 모래언덕을 넘는 황홀함에 온몸은 모래투성이지만 몸보다 먼저 마음이 달리고 있다. 사람들은 모래언덕을 쏜살같이 미끄러져 내리는 짜릿함에 취해서 아래로, 또 아래로 내려가기를 반복한다. 바람을 가르며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쾌감을 선물한 버기와 샌드보딩은 와카치나를 잊을 수 없게 만든다.
모래바람을 씻어주는 피스코 사워(Pisco sour)의 달콤함
자연이 주는 장엄한 선물, 뜨거운 사막의 버기와 샌드보딩을 끝낸 후 마시는 한 잔의 피스코 사워는 천국의 맛이다. 피스코(Pisco)는 스페인 식민지의 산물인 페루 특산 와인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페루에 와인 제조법을 전해주었고, 페루인들은 건조한 사막기후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음료를 만들어 즐겼다.
이카에는 오래된 포도농장과 와인 양조장이 있어서 피스코 투어가 가능하다. 옛날 방식으로 와인을 생산하는 양조시설에는 와인을 담아 숙성하던 토기로 만든 항아리가 빼곡하고, 숙성 중인 와인 항아리도 볼 수 있다. 숙성이 덜 된 것부터 오래된 것들까지 차례로 맛볼 수 있는데, 몇 잔 마시다 보면 얼굴이 벌개진다. 피스코는 도수가 강하여 대체로 레몬, 라임, 설탕, 계란흰자 등을 넣어 칵테일로 만들어서 먹는데 대표적인 음료가 피스코 사워이다.
사막의 가이드 윌리
이카의 버스터미널. 그곳에서 만난 택시 운전수 윌리와 하루를 함께 했다. 네 명의 자녀를 두었고, 아내는 이카 시내의 마켓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윌리는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서 부부가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꽃보다 청춘’ 페루편이 TV에 방영된 이후 한국인 여행객들이 많아졌다며 윌리는 한국어 공부에 열심이었다. 이카에서 와카치나로 오가는 택시 안, 버스 터미널, 또 여행사에서 시간만 나면 한국어 공부였다.
연필에 침을 발라가며 작은 수첩에 한국어와 스페인어를 번갈아 꾹꾹 눌러쓰기도 하고, 휴대폰에 녹음도 해가며 한국어를 외우던 윌리.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가장의 책임감으로 운전과 가이드 등 온갖 일을 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잊고 있었던 우리네 보통의 아버지가 떠올라 콧날이 시큰해졌다. 그 바람에 저녁 먹을 시간도 반납하고 윌리에게 우리말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서 혹여 사랑하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하지만, 일에 치여 사랑할 시간이 모자라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다. 한낮의 뜨거운 열기가 식고, 어둠이 빠르게 와카치나를 삼키는 것처럼 그곳을 찾는 관광객들이 윌리의 사랑할 시간을 잊게 하지나 않을지 걱정하며 쿠스코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안락하고 즐거운 나의 집속에
무덤이 또한 들어있었다
가족들과 나눠먹은 음식속에도
하루하루가 조용히 사라지는
두려운 사약이 섞여있었다
사랑도 깊이 들어가보면
거기에는 짐승이 날뛰고 있었다
가시에 찔리며
낚시바늘 입에 물고 온 몸 파득거리며
-문정희, ‘통행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