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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을 얻다, 나프팍토스

그리스 02

by 살아 숨쉬는 그녀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한밤의 음악회

영혼을 울리는 노랫소리 별이 되어

온 세상을 빛내는

음유시인들의 자유로움

덩달아 우리까지 자유로워지는 곳"



때로는 잘 모르고 간 곳에서 뜻하지 않은 감동을 받을 때가 있다. 내게는 나프팍토스(Nafpaktos)가 그러하다. 그리스 여행을 준비하는 내게 나프팍토스에서 인턴을 마치고 고향 베를린으로 돌아가려는 참이던 인터넷 친구가 권한 곳으로 여행자의 성서라 불리는 ‘론리 플래닛’ <그리스> 편에 겨우 한 쪽 정도로 소개된 작은 바닷가 마을이다. 우리에게는 이름마저 낯설지만, 책으로 담아낼 수 없는 아름다운 바다의 요새와 성벽이 남아 있는 나프팍토스는 중세시대 지중해 무역권을 두고 다투었던 ‘레판토 해전’의 배경이 된 곳으로 레판토(Lepanto)는 베네치아 인들이 붙인 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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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은 1571년 펠리페 2세가 이끄는 스페인 함대가 교황령, 베네치아 등과 동맹을 맺고 오스만 제국의 함대를 물리친 해전으로 기독교 함대와 이슬람 함대 양쪽 합해 갤리선 500척과 17만 명이 동원된 대단한 전투였다. 오스만 제국은 이 해전에서 패배한 후 내리막길을 걸었고 기독교 문명권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으니 이 전쟁은 기독교 세계의 부흥을 알린 서곡이 된 셈이다. 젊은 시절 군인이었던 세르반테스가 참전해서 왼쪽 팔을 잃고 만 전투이기도 하여 지금도 나프팍토스 성곽 위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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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도 모르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단지 인터넷이라는 공간을 통해 알게 된 친구는 내게 최상의 친절을 베풀었다. 그가 예약해놓은 숙소는 나프팍토스 해변 바로 앞에 있어서 맨발로 모래사장에 나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저렴하고 전망 좋은 편안한 숙소에서 나프팍토스를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어쩌면 스쳐 지났을 곳을 오래도록 마음에 품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한 친구의 선물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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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우리를 위한 수호신이 존재한 듯 많은 여행의 즐거움이 따른 나프팍토스. 산과 바다로 이어진 길을 두 발과 다리에 의탁해야 했던 우리는 여행길의 누구나가 그렇듯 아침에는 어디든 다 갈 것 같고, 무엇이든 다 봐낼 것 같은 마음으로 호텔을 나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걷다 보면 몸은 축축 늘어지고 지쳐갔다. 인내심 약한 아이들은 투정을 부렸고, 대중교통이 없는 곳에서 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히치하이크였다. 그런데 우리가 엄지손가락을 치켜들 때마다 누군가 차를 세우고 친절한 웃음으로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다.


나프팍토스 성에서 내려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는데, 부자지간으로 보이는 남자 셋이 타고 있는 차에 아이들 둘만 부탁했다. 우리를 어떻게 믿고 아이들을 맡기냐고 묻는 운전자에게 “자식을 둔 아버지이니 우리 아이도 잘 보살펴줄 것 같아서요.”라고 했더니, “참 간도 큰 여자네요. 당신.”이라며 너털웃음을 웃고는 아이들을 태우고 떠났다. 꼬불꼬불 산길을 한참이나 걸어 내려와 우리는 해맑게 웃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만 난처한 지경에 처해 있을 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우리를 도와주던 추억이 많은 곳이 나프팍토스다.


마지막 날 주어진 또 하나의 선물인 해변 음악회. 그리스 국민가수의 공연이었는데 입장권도 필요 없이 어디서든 자유롭게 앉아 음악에 취할 수 있었다. 바닷가에 자리 잡은 야외 레스토랑이나 해변, 시원한 나무 그늘, 야외 공연장 등 그야말로 뼛속까지 자유로운 열린 무대였다. 오랜만에 자유를 찾은 우리는 눈이 감기는 아이들을 숙소에 데려다 놓고 다시 공연장을 찾아 늦은 밤까지 맥주 한 잔 들이키며 우리의 지난날을, 다시 오지 않을 지금 이 순간을, 다가올 시간들을 생각하며 노래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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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8시에 떠나네’ 중에서



적포도주처럼 붉은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던 나프팍토스. 이제는 전쟁의 흔적 따위는 찾을 수 없고, 푸르디푸른 바다와 이오니아 해를 시원스레 뻗은 다리가 펼쳐져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음악이 흐르는 카페와 레스토랑, 여유로운 사람들의 발걸음에 평화로운 웃음이 묻어나듯이 오랜 역사는 하나 둘 세월을 묻어 우리의 젊은 날도, 우리의 흔적들도 다 덮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늙은 길에는 빛나는 햇살 아래 무성한 나뭇잎만 푸르게 마을을 내려다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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