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01
리마(Lima), ‘왕들의 도시’에서 만난 소박한 사람들!
15세기 잉카 제국에 포함되었으며, 18세기 중엽까지 스페인의 남아메리카 지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 몇 차례의 지진으로 심하게 손상되었지만 식민 시대의 건축물이 상당수 남아 있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 중심부, 아름다운 해안가의 신시가지 미라 플로레스(Miraflores) 지역이 조화로운 곳. 리마(Lima)는 전통과 현대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도시이다.
대성당과 대주교 궁이 있는 아르마스 광장(Plaza de Armas), 산토 도밍고(Santo Domingo) 성당이 있는 베라 크루스 광장(Plaza de la Vera Cruz), 산 프란시스코 수녀원 등 탁월한 유산이 있는 과거를 품은 역사지구. 그곳에서 우리는 꽃보다 아름다운, 순박한 사람들의 환대를 받았다. 신문이나 잡지를 파는 노점 아주머니, 리어카에 짐을 가득 싣고 배달하는 사람, 길을 가던 아저씨……. 이들은 모두 이방인인 우리에게 최상의 친절을 베풀었다. 잠시만 길에서 머뭇거리거나 이리저리 고개를 돌려 무엇인가 찾는 시늉만 해도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어디를 찾으세요?”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길바닥에 오래된 음악 앨범을 펼쳐 놓고 팔던 아저씨도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사진 찍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좋아. 마음껏 찍어. 어떤 포즈를 취해줄까? 필요한 만큼 찍어.”라며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오랫동안 지켜보니, 아저씨는 돈 버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호객행위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거리에 장사판을 벌여놓고 오가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는 우리에게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만 날릴 뿐, 그뿐이었다.
온통 노랑 세상의 중앙시장
사람들의 미소와 관심에 자신감을 안고 중앙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맞이로 바쁜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중앙시장은 온통 노랑 세상이었다. 벽걸이 장식, 가면 안경, 모자, 파티용품, 목도리, 양말, 속옷……. 모양은 다르지만 모두 노란색이었다. 노란색은 ‘행운’을 뜻한단다. 그래서 새해의 행운을 기원하며 노란색으로 치장하는 것이 페루의 풍습이라고 한다.
리마에서 코이카(KOICA, 한국국제협력단) 봉사단원으로 근무하는 지인이 12월 31일의 페루 풍습을 알려주었다. 우선, 늦은 밤에 가족들과 돼지고기 요리를 나누어 먹는다. 하늘로 치켜든 돼지의 코처럼 모든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그런 다음, 12시가 되기 전에 포도 열두 알을 큰 소리를 외치며 먹는다. 포도 한 알이 한 달인 셈이어서 열두 달의 행운을 빈다. 자신, 친구, 가족, 그리고 세상 사람들의 행복한 삶을 위해. 마침내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서로 포옹하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축복의 인사를 나눈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가 불꽃놀이와 폭죽 터뜨리기를 즐긴다.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폭죽을 하늘 높이 쏘아 올린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낡은 물건을 밖에 내어놓고, 주머니에 돈을 넣고 집을 나서서 동네를 한 바퀴를 돌고 온다. 고통이나 고민 등의 나쁜 것은 내다 버리고 좋은 것만 가지고 오는 한 해를 상징한단다. 이 의식까지 끝나야 비로소 새해 준비가 끝난다. 노란 풍선을 집안 곳곳 달아놓고 달러가 쓰인 노란 모자를 쓰고, 노란색 꽃 목도리를 두르고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즐기는 그들에게서 새해를 맞이하는 소박한 염원을 볼 수 있었다.
페루의 미래를 보여주는 미라플로레스(Miraflores)
태평양을 마주한, 아름다운 해안에 자리한 신시가지 미라플로레스(Miraflores) 지역은 부산의 해운대와 비슷한 이미지이다. 부유한 백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으로 구시가지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연인들이 데이트를 즐기는 ‘사랑의 공원(parque de amor)’, 거대한 쇼핑몰 ‘라르코마르(larcomar)’ 등이 있으며, 태평양을 배경으로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이들도 보인다. 대사관, 호텔, 고급 주택가, 빌딩, 레스토랑이 즐비한 미라플로레스 지역에서는 미래를 향해 쭉쭉 뻗어가는 페루를 상상할 수 있다.
버스는 멈춰 서야만 한다.
쿠스코(Cuzco)행 버스를 예약하러 터미널로 향했다. 12월 31일에 출발하는 표를 구하려 했으나, 그날은 장거리 버스를 운영하지 않는단다. 한 해의 마지막 날만큼은 모두가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버스를 운행하면 버스기사, 차장, 휴게소 등 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일을 해야 하고, 누군가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으로 한 해를 마무리할 때, 누군가는 가족과 떨어져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버스는 멈춰 서야 한단다. 삶의 편리함과 효율성을 추구하며,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정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의 인식을 망치로 부수는 느낌이었다. 생각해보면 멀지 않은 과거에 우리 역시 까치설날부터 설날, 정월대보름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한데 어울려 축제를 즐겼고, 거기에는 상하귀천이 없었다. 우리가 잊고 있는 ‘모든 사람의 소중한 쉴 권리’를 실천하는 리마는 분명 사람이 아름다운 도시였다.
새들은 더 남쪽도 더 북쪽도 아닌,
길이 삼 킬로미터의 바로 이곳 좁은 모래사장 위에 떨어졌다.
새들에게는 이곳이 믿는 이들이 영혼을 반환하러 간다는
인도의 성지 바라나시 같은 곳일 수도 있었다.
-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맹 가리)’ 중에서
리마를 벗어나 해안가로 접어들면 모래언덕이 황폐한 모습으로 드러난다.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사막화이다. 일 년 내내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 리마에는 가끔 ‘잉카의 눈물’이라 불리는, 새벽녘에 낮게 깔리는 안개만이 땅을 촉촉이 적셔줘 생명의 숨결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황량함 속에서도 과거와 현대의 조화로움을 지켜가는,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리마. 그곳은 오래도록 노란색으로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