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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보물 상자가 열린 곳,
오얀따이땀보

페루 02

by 살아 숨쉬는 그녀

추억의 보물 상자가 열린 곳,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우리 집 뒷동산에 있던 키 큰 감나무 한 그루. 그 아래 자리를 깔고 아침마다 떨어지는 감꽃으로 목걸이를 만들어 한 개씩 따먹기도 하고, 나만의 보물 상자를 만들어 내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하나둘 챙겨 파묻어 두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세월을 먹었고 뒷동산도 감나무도 사라졌는데, 지구의 반대편 마추픽추 아래 오얀따이땀보에서 오래 잊고 있었던 보물 상자를 열며 추억의 길을 헤집고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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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스코에서 마추픽추로 가는 길목, 잉카인들의 젖줄이었던 우루밤바(Urubamba) 강 근처. 수많은 강과 시냇물, 기름진 토양 덕분에 오랫동안 잉카제국의 곡물창고 역할을 해왔던 이 지역을 잉카인들은 성스러운 계곡(Valle Sagrado)이라 부른다. 강을 따라 작은 마을과 잉카의 유적들이 모여 있는데,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는 잉카의 도시들 중 가장 훼손이 적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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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 틈으로 느껴지는 안데스의 숨결


쿠스코에서 97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오얀따이땀보에 가기 위해서는 낡은 시외버스와 콜렉티보를 번갈아 타며 먼지가 폴폴 이는 산길을 달려야 한다. 오얀따이땀보는 비극적인 사랑이야기가 어린 곳이기도 한데, 잉카제국 제2의 도시였던 이곳에 주둔하던 오얀따이(Ollantay) 장군이 잉카 제국의 지배자 파차쿠텍(Pachacútec)의 딸과 사랑에 빠졌지만 비천한 출신이라는 이유로 비련으로 끝났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골목을 걷다 보면 좁은 도랑을 따라 흘러가는 물소리에서 서러움의 냄새가 피어오른다.


외로움에는 세 종류가 있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데서 오는 외로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욕구로부터 오는 외로움,

신에게 가까이 감에서 비롯되는 심오한 외로움.

- 로버트 존슨, ‘내면의 황금’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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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거리는 낡은 대문과 낮은 지붕이 끝없이 이어지던 돌담 틈으로 새어 나오는 안데스의 숨결에서 나는 마치 어릴 때 숨겨두었던 보물 상자를 열고 들어선 것 같은 익숙함을 느꼈다. 골목에서는 아이들이 한참 인형놀이와 고무줄놀이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자신이 가진 인형을 몽땅 챙겨 와 담벼락 밑에 나란히 세워 놓고 소꿉장난을 하는 여자애들과 고무줄놀이하는 누나를 괴롭히는 동생은 영락없는 어린 시절의 나였다. 사람 키만큼 큰 등짐을 메고 걷는 사람들, 이른 아침 산에서 내려와 시장을 보고 생필품을 사서 산속 마을로 돌아가거나 시장 한 귀퉁이에서 옹기종기 모여 앉아 뜨거운 국수 한 그릇으로 안데스의 추위와 고단함을 달래는 사람들, 산에서 꺾어온 약초나 채소들을 장바닥에 펼쳐 놓은 할머니들의 모습은 추억 속 상자에 담긴 풍경들을 하나씩 펼쳐놓는 것 같아, 나는 그만 시간의 미로를 헤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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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스의 강렬한 원색을 입은 할머니들. 알록달록 고운 옷 위에 숄을 두르고, 모자 아래로 다소곳한 갈래머리를 색실로 묶은 인자한 미소의 할머니들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내 인생의 할머니들을 떠올리게 했다. 남자애들이 바글거리던 우리 집에서 주눅 들어 있던 나를 다독거려주던 동네 할머니들은 오랜 시간 내게 든든한 지원군이었는데, 이곳의 할머니들 역시 노란 축복의 꽃가루를 듬뿍 뿌려주며 인자한 눈짓과 손짓, 진심 어린 포옹으로 여행자인 나를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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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안녕과 풍작을 축원하던 고향마을의 지신밟기를 만난 것도 이곳에서였다. 풍물패를 선두로 소고패들이 집집마다의 지신을 밟으며 마당, 대청, 부엌, 외양간에서 한바탕 농악을 울려대던 풍경을 지구 반대편에서 만난 것이다. 이곳에서는 주로 가게나 부유한 집에서 깊은 산속에 사는 원주민들을 초청하여 악기 연주로 한 해의 안녕을 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우리처럼 음식과 음료, 약간의 금전으로 연주자들을 대접하는데 그 풍경이 낯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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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겨운 축제의 시간


음악과 춤을 좋아하는 페루 사람들은 축제를 즐긴다. 축제를 통해 삶에 의욕을 얻고, 가족과 사회가 하나 되고, 서로에게 믿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이어서 어딜 가나 축제로 흥겹다. 신성한 계곡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해마다 1월 초에는 500여 년 전 잉카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춤을 선보이는 축제를 벌인다. 계곡 주변의 마을 대표들이 전통복장으로 남녀노소가 어우러져 춤을 선보이는 퍼레이드를 벌이는데 잉카제국을 건설했던 여러 부족의 춤을 한 자리에서 볼 수 있었다. 마을의 깃발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곡물 바구니를 든 사람들을 선두로 춤추는 사람들이 입장하는데, 복장과 춤사위에서 우리네 시골 농악이 연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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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제에는 흥을 돋우는 술이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옥수수를 발효한 치차(chicha)인데 막걸리와 비슷한 맛이다. 페루에서는 집집마다 치차를 빚어 농주로 마시는데, 축제의 광장에는 치차가 가득 든 술통이 즐비하다. 인심도 후해서 여행자인 우리에게도 넘치게 술을 따라준다. 그 덕분에 우리 역시 마치 고향에 온 듯한 환대를 받으며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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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친 자연과 식민의 삶 속에서도 전통을 지키며 지혜롭게 살아온 사람들. 누구에게나 축복을 빌어주고, 인심을 나누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아는 성스러운 계곡의 사람들. 내가 잊고 있던 보물 상자를 선물한 그들이 언제까지고 자신들의 땅을 지켜가길 바라며 다른 마을로 발걸음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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