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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원색이 아름다운 마을,
친첸로

페루 03

by 살아 숨쉬는 그녀

화려한 원색이 아름다운 마을, 친체로(Chinchero)


중학교 때, 제법 근대화가 된 읍내에 살던 우리와 달리 하루에 서너 차례의 버스만이 오가던 깊은 산골에 사는 친구들을 참 많이 부러워했다. 아버지의 허락으로 일 년에 네 차례 친구 집에서 유숙할 수 있는 있는 자유를 얻은 나는 온통 깜깜한 마을을 밝히던 밤하늘의 별과 산짐승의 울음소리, 시래깃국이 설설 끓던 가마솥, 흙벽과 서까래가 숭숭 보이던 지붕 낮은 집, 홍시며 곶감으로 주전부리하던 친구네 집에 빠져들었다. 또한 새벽 별빛에 의지해 학교로 향하던 길에 다리를 스치던 풀섶의 이슬, 도란도란 나누던 친구들과의 이야기는 두 시간 남짓 걸어야 하는 수고로움을 기꺼이 감내하게 했다. 잉카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의 하나라는 친체로는 잊고 있었던 추억 속 시간여행으로 나를 달뜨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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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여인들의 손길이 빛나는 직물 장터


해발 3627m의 안데스 고산지역에 위치한, 고대 잉카 왕이 휴가를 보내기 위해 만들었다는 아름다운 마을 친체로는 잉카인들에게 무지개의 탄생지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일까? 친체로는 직물염색으로 유명하다. 마을의 귀퉁이에서 일주일에 세 번 열리는 큰 장터는 여행자의 눈길이 닿는 곳마다 잉카 여인들의 고단함이 묻어나는데, 알록달록한 원색이 여행자들의 혼을 쏙 빼놓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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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좋게 우리가 그곳을 방문한 날은 직물시장이 열렸다. 장터는 온갖 색의 천과 모자, 머플러, 가방 등 잉카 여인들의 손으로 엮어낸 소품들이 즐비했고, 집에서 기른 감자와 당근 등 우리 눈에 익숙하거나 낯선 약초들이 가득했다. 모두가 정해진 자기 구역에 상품을 펼쳐놓고 호객행위를 하고 있는 장거리에는 엄마를 따라 장바닥에 나와 시간을 보내던 아이들이 이제나 저제나 엄마의 장사가 끝나 집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새까만 눈동자로 우리를 붙잡았다.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기형도, ‘엄마 걱정’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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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가운데는 상설로 운영되는 직물 상점도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관광객을 위해 알파카의 털로 실을 뽑아 염색하고 직조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우선 알파카의 털에서 뽑아낸 실을 식물로 만든 천연샴푸로 깨끗하게 세척하면 하얀색으로 변한다. 그런 다음 옥수수, 곤충, 꽃이나 이끼 등 갖가지의 약초나 식물, 선인장의 벌레를 이용해서 원하는 색을 낸다. 자연에서 얻을 수 없는 색은 몇 번의 염색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면 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노란색으로 먼저 물들이고, 그런 다음 인디고와 같은 식물에서 얻는 파란색을 덧입혀 초록색을 만들어 낸다. 그런 과정을 거쳐 온갖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색들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염색한 실을 바람으로 말려 베를 짜면 아름다운 옷감들이 되니, 잉카의 직물에는 삶의 지혜와 수고로운 시간이 씨실과 날실로 엮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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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와 떠난 자의 추억을 나누는 장례식


누군가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떠나는 자리에 또 누군가 찾아드는 자연의 이치는 이곳 역시 비켜가지 않았다. 우리가 그곳을 방문한 날에 마을 이장님의 장례식이 있었는데, 아마도 살아있을 때 덕을 많이 쌓은 모양으로 온 동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서 망자를 애도했다. 특히 마을 입구의 작은 언덕에서는 전통복장을 갖춰 입은 원주민들이 함께 모여 떠난 자와의 추억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여행자에게도 망자를 보내는 마지막 길에 한 자리를 내어주었다.


장례식은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하루 종일 계속되었다. 남녀가 따로따로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으며 기도를 반복하다가 태양이 빛을 잃을 때쯤 관을 옮긴다. 관을 둘러멘 장정들 뒤로 추모객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마을의 큰 교회에 들른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아서 망자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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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고도가 높아 걷기만 해도 숨이 차는 골목길 끝에는 스페인 침략기에 세워진 흰 교회가 우뚝 서있다. 장례행렬이 떠나고 마지막 남은 햇살이 광장을 붙들고 있는 틈을 타 교회로 발을 옮겼다. 교회 주변에서는 서구의 가톨릭이 원주민들에게 어떻게 스며들었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들이 여기저기 보였다. 우선, 잉카의 신전을 허물고 그 위에 석벽을 세웠다는 교회는 색이 바랜 벽화와 성화, 검은 피부의 예수상, 일을 하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들이 세월을 말해준다. 교회 앞마당에는 잉카인들이 ‘대지의 어머니 신’으로 섬긴 파차 마마(Pacha Mama)를 상징하는 다층 계단과 그 위로 태양이 새겨진 십자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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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도 따뜻하게 품어주는 안데스의 산자락 아래로 마을의 수로는 겹겹의 세월을 품고 흐른다. 누군가 사람은‘공간’을 통해 여행하고, 공간은‘시간’을 통해 여행한다고 했는데, 친체로의 생명을 품은 수로가 언제까지고 시간 여행을 할 수 있기를, 마을의 안녕을 빌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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