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벗어던지듯이

엄마의 편지 09

by 살아 숨쉬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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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들아.

네가 길을 걸으며 순례자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전할 때, 영화 ‘안경’이 떠오르더구나. 우리가 함께 보았던, ‘카모메 식당’, ‘수영장’과 더불어 신선함을 안겨주었던 영화 말이야. 오늘 그 영화를 다시 보며 너의 여행을, 나를,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보았어. 도시 생활에 지친 타에코가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는 곳, 인적이 드문 바닷가 마을에 와서 휴가를 보내고, 마을 사람들을 만나며 변해가는 모습은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묻고 있더라고.


타에코는 혼자서 조용히 쉬고 싶은 마음으로 휴가지를 찾아오지. 그런데 친절한 민박집주인 유지, 어디선가 나타나 팥빙수를 파는 사쿠라 씨, 불쑥불쑥 나타나는 고등학교 생물 교사 하루나 등이 “젖어든다.”라고 말하며 타에코에게 다가가잖아. 자신의 삶 속에 발을 들여놓으려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해진 타에코는 민박집 ‘하마다’를 떠나잖아. 하지만 결국 그곳으로 돌아오고 다음 해 휴가철에 다시 찾아오게 되지.


타에코는 처음에는 휴가지에 와서까지 자신만의 리듬을 지켜 가려고 하잖아. 소중한 무엇이 들었을 것 같은 커다란 여행 가방을 끌어안고, 마을 사람들이 제안하는 아침체조를 거절하고, 팥빙수를 거절하지. 그러다 마음을 열어젖히고 경계를 풀면서 변해가잖아. 두 손으로 게를 잡고 어기적어기적 먹어대기도 하고,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팥빙수를 먹고, 함께 아침체조도 하잖아. 늘 아침마다 안경을 끼고 눈에 힘을 주며 세상을 보던 타에코가 민박집을 떠나던 날 안경을 놓치고도 흐뭇한 모습으로 공기를 느끼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더라. 나에게도 그런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타에코가 꼭 내 모습 같더라고. 나 역시 내가 세운 원칙 때문에 많은 것을 지나쳤거든. 그저 마음을 내려놓고 발 한번 담그면 또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는데도 절대 발을 담그지 않으려고도 했고. “우리는 느리게 걷자 걷자 걷자 그렇게 빨리 가다가는 죽을 만큼 뛰다가는 아, 사뿐히 지나가는 예쁜 고양이 한 마리도 못 보고 지나치겠네.”라던 ‘장기하와 얼굴들’의 노래 구절처럼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느라 아름다운 것들을 지나쳤지. 효율을 우선으로 생각해서 계획표를 짜고, 정신없이 보내고, 또 반성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보내면서 정작 내가 보낸 시간에서 기쁨을 찾지 못했어. 나는 언제쯤이면 타에코처럼 안경을 벗어던질 수 있을까?



휴가 때마다 바닷가 마을을 찾아와 팥빙수를 대접하던 사쿠라 씨의 모습에 오래 눈이 가더구나. 아마도 네가 알베르게에서 보았던 “감사해라, 또 감사해라.”라는 말 때문이었을 거야. 사쿠라 씨는 정성스럽게 팥을 삶아 사람들을 대접하잖아. 처음에는 사쿠라 씨의 역할을 이해 못 했는데, 이제야 알겠더라고. 사쿠라 씨는 마을을 떠나는 법이 없는, 그곳을 지켜나가는 주민들을 정성껏 모시는 역할이더라고. 우리는 흔히 여행지를 찾아가면 마치 우리가 주인이나 된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잖아. 자신이 머무르는 동안 그 값을 치렀으니까 그만큼 대접받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하지만 그곳은 주민들의 터전이고, 여행자는 잠시 그 터전을 빌려 쓰고 스쳐 지나갈 뿐이지. 그러니까 터전을 잠시 빌려준 그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너 역시 순례길에서 만나는 봉사자들, 또는 순례길에 사는 사람들을 사쿠라 씨와 같은 자세로 대해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마을을 찾아온 사쿠라 씨는 깊숙이 고개 숙여 마을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마을 사람들은 그저 서서 사쿠라 씨를 맞이하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오래오래 마음에 남더구나.


“한번 죽으면 그걸로 끝이야. 두 번 죽지는 않아.”

“얘는 자기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를 자주 잊는다.”


등장인물들이 무심히 던지는 말들도 가슴에 와 닿더라. 사쿠라 씨가 생선 머리를 칼로 내리치며 던지던 말처럼 삶의 끝은 죽음이잖아. 그러니 우린 살아내야지. 그것이 어떤 삶이든. 민박집주인 유지 씨가 자신의 집 강아지를 보며 하던 말 역시 우리에게 들려주는 말 같았어. 우린 사실 가진 것이 참 많지만 그걸 잊고 살 때가 많잖아. 내가 가지지 못한 것만 생각하지. 내가 잘 사는 길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생각할 줄 아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타에코를 찾아온 조교에게 언제 돌아갈 것인지 묻자 “싫증 날 때쯤이요.”라고 답하던 조교의 말도 마찬가지였어. 그렇지. 모든 것은 싫증 나지. 여행도, 사랑도, 일도. 이 세상에 영원히 좋기만 한 것은 없지 않겠니. 그러니 우린 오늘을 잘 보내자. 너는 너의 길에서 나는 또 나의 길에서. 그리고 정말 싫증 나면 또 훌훌 떠나자. 그리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서 또 잘 살자. 한 번 죽지, 두 번 죽지는 않을 테니까.


산들아. 여행을 끝낸 후의 네 모습이 기대된다. 너는 또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