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여행 1:1987년, 그 뜨거웠던 계절

나는 몰랐었다.

by 메아스텔라meastella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곳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1987년은 주식시장의 활성화로 엄청난 량의 업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전산매매가 시작되었고 시장의 활황으로 주식거래량은 가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새로운 주문량이 매일 갱신되다시피 바쁜 해였다. 수작업으로 진행되었던 증권회사의 업무가 전산화로 바뀌는 과정이라서 두 가지의 업무를 동시에 하기도 했었다. 다행히 내가 입사한 그 해에는 대부분 전산화가 이루어져서 이전의 직장선배들 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업무를 처리할 수 있었다. 주식투자는 유행처럼 번졌고 샐러리맨은 물론 평범한 가정주부들까지 증권회사에 모여들었다. 100포인트로 시작한 코스피지수는 짧은 기간 동안 500포인트, 1000포인트로 수직 상승했다. 특히 1000포인트를 찍었을 때는 '땅 팔고 소 팔아' 주식을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과열된 양상을 보였다. 결국 1988년 2월을 최고치로 하강국면에 이르렀고 계속된 침체에서 벗어나질 못 했다. 정부의 다양한 증시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주식시장은 계속 내리막길이었다. 외상으로 주식을 샀던 '개미투자자'들에겐 소위 말하는 '깡통계좌' 만이 남겨지기도 했다. 그 결과 많은 가정이 파탄 나기도 했다.




1987년 4월 7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던 것 같다. 택시로 동네에서 내려와 다시 지하철을 타고 증권회사지점으로 출근을 했다. 매일같이 많은 업무량으로 피곤에 지친 나는 아침을 먹는 대신 그 시간에 잠을 더 잤더랬다. 나의 직장생활은 이처럼 매일같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그렇게 계속되었다. 무릇 나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증권사 직원들이 갖는 고충이기도 했다. 증시의 활성화로 포항제철(현 Posco), 한국전력 등 국가기간산업뿐만 아니라 증권주까지 급격한 상승을 보이는 열풍의 시대이기도 했다. 증권주의 강세로 그 수혜는 증권사 직원들에게도 돌아갔다. 증권사 직원들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주식 매매를 할 수 없다. 다만, 근무하고 있는 증권회사의 주식을 '사주'로 받아서 거래할 수는 있었다. 주가가 높을 때 팔았던 직원들은 많은 차익을 내며 적지 않은 돈을 벌기도 했다. 당시 증권회사 여직원들은 '결혼시장'에서 인기가 높았다. 증권사는 최고의 인기 직장으로 떠올랐고 일류대 출신의 많은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직장이었다. 이때는 '돈은 있으나 놀 시간이 없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충분히 많은 월급과 보너스를 받기도 했다. 또 그만큼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다. 요즘 말하는 '워라밸'은 꿈도 못 꾸는, 아니 그런 것을 꿈꿀 수 있다는 생각조차 못 하던 때였다. 그동안 어렵던 살림도 많이 펴졌다. 밥상에 올라오는 반찬도 다양해졌고, 집 분위기도 한층 밝아졌다. 엄마에겐 그동안 우리 형편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던, 홍콩으로 해외여행을 시켜드리기도 했다. 이른 아침 피곤한 몸을 일으켜 출근하고 밤 12시쯤 파김치가 되어 택시를 타고 퇴근하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그땐 일해서 월급 받는 재미로 정말 열심히 직장생활을 했다.




'그날'은 일이 좀 일찍 끝나서 버스를 타고 퇴근하는 중이었다. 버스가 부산역, 중앙동을 거쳐 남포동과 자갈치에 들어섰을 때 거리는 난리도 아니었다. 그 수가 점점 불어나면서 온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하얀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로 북적였고 거리는 온통 뿌연 연기가 자욱했다. 연기 때문에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눈은 계속 따갑고 눈물이 났다. 데모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것에 새삼 놀랐다. 나는 몰랐다. 그날 내가 현장에서 직접 본 데모가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에 얼마나 중요한 사건이었는지, 정말 몰랐다! 내 나이 겨우 19살. 사회에 막 첫 발을 딛고 새로운 세계에 적응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던 때였다. 독재정권이 뭔지, 민주주의가 뭔지, 데모와 투쟁은 또 뭔지, 알지 못했다. 아니 관심 자체가 없었다. 나는 그저 회사생활 열심히 해서 우리 가족이 경제적으로 더 이상 힘들지 않게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 역사적인 현장에 있으면서도 그 가치를 몰랐다. 그냥 불의에 반대하는 데모로만 이해했었다.


'데모' 비슷한 분위기를 접한 것은 중학교 1~2학년 때, 학교에 교생으로 왔던 젊은 남선생님을 통해서였다. 교생실습을 마치고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우리에게 노래를 하나 불러주셨더랬다. '아침이슬'이었다. 그 노래를 들었을 때, 왠지 모를 슬픔과 알 수 없는 '결의감'이 느껴졌었다. 선생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그 워딩은 지금 생각나지 않지만, 노래를 통해서 그분의 울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땐 지금과는 달랐다. 인터넷을 통해 얼마든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니었다. 아니 그 어떤 매체를 통해서도 일반 시민들에겐 정보가 공유되지 않았고, 알 수도 없었다. 그래서 당시엔 이 '아침이슬'이 상징하는 의미도, 왜, 어떻게 불려졌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음악이 전해주는 그 강렬한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교실 안에서 느꼈던 것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그런 강렬함을 그 버스 안에서 경험했다. 그것도 직접적으로. 창 너머로는 부산 아지매들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눠 주는 것도 보였고, 수건으로 열심히 눈을 닦는 사람들도 보였다. 거리는 온통 뿌연 체루연기와 분노한 사람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이후 세월이 흘러 6월 항쟁에 대해 알아가면서, '사회 변화 요구'에 무지했던 나 자신에게 너무나 부끄러웠고 시위에 참여했던 부산 시민들, 아니 함께했던 전국의 모든 시민들이 고맙고 그들에게 미안했다. 이 미안함은 여전히 나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다. 독일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몇 차례의 촛불항쟁. 그 간절했던 2016년의 하나 된 마음. 직접 함께 하지 못하는 미안함이 너무 컸다. 해외에 살고 있는 많은 깨어있는 동포들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87년 역사의 현장이 있었지만 그 의미를 알지 못했고, 2016년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그 현장에서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나를 되돌아본다. 비록 그 현장에서 함께 하지는 못 했지만 우린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역사의 한 장면을 만들어 가고 있다. 87 민주화 항쟁이 그랬듯이, 지난 몇 년 전부터 전 세계적으로 'K열풍'이라 불리는 모든 분야의 한국인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요즘 세대의 젊은이들은 기성세대들이 가지고 있던 '이유를 알 수 없는 열등감'이 아닌 '자신감에서 나오는 당당함'으로 세계의 무대에서 마음껏 기량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의 근거 있는 자신감이 많은 변화를 이루어 낼 것이라 믿는다.


최근 들어 자주 들리는 끔찍한 범죄와 사건사고, 한국사회의 '과거로의 퇴보현상'을 보고 있으면 답답하고 안타깝고 분노가 일기도 한다. 지난 시간 동안 그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노력과 시간들이 만들어 낸 지금의 대한민국. 코로나 시기를 거치며 전 세계의 모범이 되었던 자랑스러운 '내 나라 대한민국'의 미래가 그렇게 밝지만은 않게 보이는 것이 너무나 안타깝다. 언젠가부터 인간 고유의 도덕성이 사라지고 있다. 거짓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르고 그 거짓말을 덮기 위한 뻔뻔함은 더 극악을 떤다. 사회를 이끌어 가는 기성세대의 이런 도덕적 해이함이 자라나는 다음 세대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막대하다. 그 결과물들이 지금 한국사회에 전반적으로 퍼지고 있는 것 같다. 대한민국에 아직도 끈질기게 남아있는 과거의 부정부패와 그 원흉을 근절하지 못한 것이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그들에게 기생해 살아가고 있는 모든 악귀들과 기형적으로 태어난 기생아들이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지길 간절히 기도한다.




keyword
이전 02화한국 여자가 독일에서 살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