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여자가 독일에서 살아가기

독일과 한국

by 메아스텔라meastella

시부모, 쉽지 않은 단어다. 그것이 한국 시부모님이든 외국 시부모님이든 쉽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의 시부모님은 좋은 분들이다. 좀 무뚝뚝 하지만 사람 좋고, 웃음 많고, 자식에게 헌신적이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다 같은 마음이겠지! 하나뿐인 아들과 며느리가 멀리 떨어져 사니 많이도 보고 싶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스러운 손주들을 자주 볼 수 없으니 더더욱 그립고 힘들 것이다. 800 km 나 떨어져 있는 거리라 매주 올 수도 없는 문제고, 그렇다고 우리가 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다. 아무튼, 쌍방이 다 힘들다. 지금 와 생각해 본다. 만약, 가까운 곳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내 아이들은 "친척"이란 말을 모르고 자랐다. 아니, 뭘 의미하는지를 모른다는 말이 더 옳겠다. 외동아들인 아빠는 당연히 형제자매가 없고, 한국인인 엄마는 형제자매는 넘치게 많지만 다 한국에 사니 쉽게 만날 수가 없고, 할머니 쪽 친척들도 다 덴마크에 사니 이 또한 만나기 힘들고, 할아버지 쪽 친척도 아주 먼 친척들 뿐이라 왕래가 거의 없다. 이래 저래 내 아이들만 불쌍하게 됐다. 그러니, 할아버지 할머니라도 가까운데 살면, '아이들이 엄마 아빠만이 아닌 다른 가족 구성원들도 알고 그들의 사랑도 맘껏 받으면서 더 안정적으로 컸을 텐데'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부모님도 말은 않지만, 아마 그런 생각일 거라 짐작한다. 독일 시부모와 한국의 일반적인 시부모들과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쩜 무리가 있을 수 있겠다. 그래도 굳이 비교를 해 본다면, 이 쪽 시부모들은 좀 쿨 한 편이다. 쿨 해서 쿨 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들이 개인적이다. 아무리 내 자식이라 해도 성인이 된 이상 그의 삶에 그렇게 간섭하지 않는다. 물론, 예외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자식들 또한 부모에게 기대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말하는 고부간의 갈등은 거의 없다. 어찌 사람과의 관계에서 문제가 없겠느냐만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고부간의 갈등'은 없다. 특히 명절 때나 가족의 행사가 있을 때면, 한국의 며느리들은 시댁에 가서 가사의 노동에 녹초가 된다. 명절증후군이니, 하는 말도 그래서 나온 것일 게다. 하지만 내 경우를 본다면, 이곳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아무리 며느리라고 해도 내 집에 온 이상은 손님이다. 그래서 손님으로 대접받고 온다. 당연히 접시를 나르는 등 시어머니를 좀 돕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시어머니가 다 한다. 또 시어머니가 그러길 더 원한다. 본인의 주방에 며느리라도 들어오는 것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은가 보다. 특히 나의 시어머니는 좀 많이 젊은 편이라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며느리 생각을 많이 해 주신다. 양쪽 집안의 도움 없이 두 아이를 온전히 혼자서 다 키우다 보니, 그런 며느리가 안타까우신가 보다.


이곳 독일은 '산후조리'라는 개념이 없다. 당연히 나도 산후조리를 전혀 못 했다. 두 아이를 낳고 바로 집으로 와 빨래하고 청소하고 평소 때처럼 집안 살림을 했다. 그래서일까? 평소 잘 아프지도 않았고 결혼 전엔 감기도 한 번 걸리지 않았는데 아이를 낳고 난 뒤론 크게 작게 자주 아프다. 병원에 몇 번 입원도 하고 항생제를 거의 달고 살다시피 했다. 내가 아프면, 나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힘들다. 이럴 때마다, 시부모님이 떨어져 사는 것이 참 아쉬웠다. 잠깐이라도 아이들을 맡길 수가 있을 텐데 그러질 못 했다. 이젠 아이들이 커서 나도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지만,전까진 감히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어딜 가든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야 했고, 꼭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 하고 그냥 흘려보낸 경우도 많았다. 혼자서 오롯이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누구나 다 공감할 거라 생각한다. 이젠 다행히 그런 시간들이 다 지나갔지만, 그땐 정말 힘들었다.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면 참 꿈만 같다. 그러다가도 그때를 되돌아보면, 마치 어제 일 같다.


보통의 독일 가정에서는 부인이 남편의 성을 쓴다. 한독 커플도 예외는 아니라 결혼 후에는 성이 바뀐다. 하지만, 난 내 이름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나는 남편의 성을 따르지 않고 부모님이 주신 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한국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생활할 때는 사실 불편함이 많다. 그래도 상관없다. 왠지 모르겠지만, 가슴속 저 밑바닥에서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 바꿨다. 어릴 적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엄마는 왜 벡 씨가 아니야?"

"응?"

그도 그럴 것이, 덴마크 사람인 할머니도 벡 씨이고, 아빠, 할아버지, 동생, 그리고 자기도 벡 씨인데, 엄마만 벡 씨가 아니니 이상도 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아이가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 있는 그대로 알려줬었다. '한국에서는 결혼을 해도 성을 바꾸지 않고 엄마는 한국 사람이니 바꾸지 않았다'라고 대답했던 것 같다. 몇 년 전 이와 비슷한 질문을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그도 한독 가정이고 남편의 성을 따라서 쓰고 있고, 국적까지 독일로 변경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왜, 독일 국적으로 바꾸지 않냐', '불편하지 않냐'라고. 여기서 생활하기엔 독일 국적이 훨씬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여러모로 혜택도 더 많고, 이곳에서 투표권도 주어지고, 특히 가족끼리 여행을 갈 때, 내 이름이 다른 것을 공항에서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냥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입출국 심사를 하면 된다. 어떨 때는 여권에 명시된 성 때문에 내가 이 독일 남자와 결혼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를 복사해서 가져다니기도 했었다. 이 문제는 새로 여권을 발급하면서 내 성 뒤에 '아무개 씨의 부인'이라는 글을 따로 추가 입력한 후 해결되었다. 내가 경험한 불편한 점은 이 정도였다. 국내여행을 할 때는 전혀 문제 되지 않는 그런 불편함이었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우리 가족들은 '추억여행'을 자주 떠났다. 25년 전 처음 밟았던 독일 땅, 아욱스부륵. 독일어라고는 '당케'밖에 몰랐던 그 시절. 독일로의 유학을 결정했던 그 순수함과 무모함.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새삼 놀란다. 아욱스부륵에서 기초 어학과정을 하고 대학에 입학 허가서를 받고 떠나기까지 한 10여 개월을 거기서 보냈다. 좋았던 기억, 힘들었던 기억, 흥분되고, 또 절망적이었던 기억이 공유하는 그곳. 그래서인지 세월이 흘러도 가슴속에 아련히 남아있는 추억이 너무나 그립다. 마침, 꼭 이맘때, 가을의 햇살이 내 감성을 여지없이 만져 줄 때, 난 그곳에 있었다. 내가 지냈던 기숙사 옆을 흐르는 강. 이 전 그 다리 위에 서서 강물을 한 참 바라보고 있었는데, 혹 자살하려는 것이 아닌가 오해를 받기도 했었다. 이 강물이 도착하는 끝자리에 작은 호프와 보트를 탈 수 있는 곳이 있다. 옛 추억을 더듬어 이젠 내 가족과 함께 보트를 탔다. 그땐 함께 온 유학생들과 탔었는데, 지금 그들은 뭘 하고 있을까?


아욱스부륵은 세계에서 최초로 만들어진 'Sozialwohung'인 'Fuggerhaus'가 있다. 이곳 출신의 거부 Fugger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었던 집단 거주지이다. 지금도 거의 무료로 집을 빌려서 살고 있고 거주지 안에 카페, 빵집 등의 편의 시설도 있어 지역을 알리는 관광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나지막한 초록색 건물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의 색이 가을이라 더욱 운치가 있는 곳이다. 창 너머 보있는 형형색색의 사탕류와 초콜릿을 보고 있자면, 단 것을 좋아하지 않은 사람조차도 먹고 싶게 만든다.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도는 맛있는 케이크. 한 참을 돌다 보면 어느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고, 그럴 땐 일단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원한 맥주 한 잔의 여유를 갖는 것도 좋다. 시원하게 한 모금 쭉 마시면, 최고다! 이젠 혼자가 아닌, 사랑하는 내 가족들과 함께 옛 추억을 찾아다닌다. 지나는 골목골목, 거리의 모습 하나하나의 기억이 참 새롭다. 세월이 많이 흘러서 적지 않은 변화도 있었지만, 독일 특유의 천천히 변화하는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독일에서 살다 보니 급격하게 변화해 가는 바깥세상과 많은 괴리감이 생긴다. 급속도로 변해가는 한국을 여기서 지켜보자니 정말 정신이 없을 정도다.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대학 동기와 선, 후배들의 소식을 듣다 보면, '정체되어 있는 나의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한 때는 작품이 하고 싶어서 힘들어할 때도 있었다. 그땐 지하실에 내려가 나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사부작사부작 작업을 하기도 했었다. 한국을 떠나 온 지 15여 년 만에 다시 흙을 만졌을 때의 그 감회란! Studium과 결혼, 또 아이들을 키우느라 전혀 엄두도 못 내고 있다가, 지역의 Volkschule(여러 취미활동도 하고 배울 수 있는 문화 센터 같은 곳)에서 도자기를 만들 기회가 있었다. 매주 한 번씩 2시간 정도의 오로지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그렇게 다시 하고 싶었던 도자기 작업! 오랜만에 만져 본 흙의 느낌과 그 특유의 냄새.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구나! 규모가 작은 강습이라서 물레작업은 할 수가 없었지만, 핀칭 기법으로 손맛을 살려서 얼마든지 멋진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흙을 집으로 가져와 아이들과 함께 만들기도 했다. 엄마와 같이 뭔가를 만드니 아이들이 정말 좋아했었다. 엄마의 설명에 따라 흙 작업을 하면서 멋진 작품들을 완성하기도 했다. 접시를 만들 때는 핀칭 기법으로만 하기엔 무리가 좀 있어서, 우선 밀방망이로 어느 정도 흙을 밀어 핀칭 기법으로 마무리를 했다. 이 작업을 아이들이 특히나 좋아했다. 꼭 '크리스마스 과자' 만드는 것 같다며 재밌게 열심히 만들어드랬다. 각자 개성 있게 만들어 모양도 내고, 또 그림도 그리고 찍어 눌러서 문양도 내고, 그렇게 즐겁게 작업을 했었다.


제인이 도자기1.jpg
제인이 도자기2.jpg

아이들과 함께 만들었던 첫 작품들.



이젠 아이들도 다 커서 다른 관심사들이 생겼고 각자 자기의 미래를 위해 준비를 하고 있다. 나만 아직도 아이들의 '아기 때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살아가고 있은 것 같기도 하다. '아이들은 3~4살까지의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평생 할 효도를 다했다'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다. 가끔 힘들고 스트레스받을 때, 아이들의 애기 때 사진들을 보면 그저 행복해진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그때 맡았던 아이들의 냄새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부모는 특히 한국엄마는 아직도 추억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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